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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9 :: 에베소서 6장 1-9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베소서 5장 22-33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베소서 5장 15-21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베소서 5장 8-14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베소서 5장 1-7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베소서 4장 25-32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베소서 4장 17-24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베소서 4장 1-16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에베소서 3장 14-21절 말씀 묵상
에베소서 6장 10-24절 말씀 묵상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비된 삶의 모습과 더불어 이제는 전투 태세에 들어간 군인과 같이 어떻게 전투를 해야하는지, 전투 요령을 가르쳐주고있다.
이는 비록 그리스도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파괴된 관계성을 다시 회복시켜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관계성을 정립하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타락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과의 관계성의 회복을 하였어도, 세상과는 회복될 수 없는 관계임을 인식하고서, 세상과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보다는 세상 권세자와 싸울 것을 명하고있다.
이는 자칫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선하다는 이분법적 논리로 전개될 수도 있겠지만, 바울은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성도가 싸워야할 대상은 비록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이지만, 인간은 육신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내적인 갈등으로 인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병행하여야 한다.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치 닭에 품겨진 달걀과 같이 성도는 주 안에서, 주의 강한 힘으로 강성하여질 수 있다.
이를 위해 성도는 교회 생활과 말씀,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더욱 성숙되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지치고 낙심한 성도의 안식처가 되어야하며, 영적인 공급처가 되어야한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성도는 주 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기가 쉽지가 않다.
성도가 주 안에서 강해져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과의 싸움에서 생존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취약점은, 교회가 이미 세상과 타협하면서, 세상을 닮아 가고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자연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교회가 세상보다도 더 타락하였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모습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게 현실이다.
교회의 타락은, 마치 전쟁터에서 전투하는 군인들을 지원해주어야할 후방 기지들이 이미 적군에게 공략당하여 파괴되어있는 상황과 유사할 것이다.
이는 사단의 세력이 교회 바깥보다도 오히려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가운데 더 역사함으로서, 교회가 영적 전쟁에서 철저하게 공략 당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마귀와의 싸움에서 인간은 아무 무장도 할 수가 없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사단으로부터 무장 해제를 당한 상태이다.
자체 무장이 안되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으로 사단과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가 없는 싸움은 혼자만의 싸움이기에 여지없이 폐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수가 없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도말고는 없다.
사람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유명 대학의 학위를 받고나면, 더욱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서, 오히려 자신을 과신함으로 마귀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명성교회의 사건은, 인간이 높은 자리에 오르고 물질이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들은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사단의 좀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어둠 자체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와 같이, 하나님을 팔아먹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사단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대신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와 욕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씨름)
씨름이라는 용어와 싸움이라는 용어에는 차이가 있다.
싸움은 상대방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반면에, 씨름은 자신의 내부에, 혹은 자신에게 밀착되어있는 경우다.
씨름은 어찌보면 자신의 내면에서의 갈등이나, 같은 공동체의 일원과의 갈등일 수가 있다.
싸워야할 대상이 외부의 적이라면, 자신은 선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내부의 적과의 싸움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죄성의 이중 구조를 인정하고서 자신과 씨름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씨름은 주로 욕심과 관계된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욕심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능이지만, 이는 사단이 휘두르는 손잡이가 되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영적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욕심과 교만의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한다.
가룟 유다도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단에게 패배하였듯이, 명성교회 세습 사건도 자신의 욕심과의 씨름에서 패배한 것으로서, 자신의 욕심을 사단에게 종속시켜버린 것이다.
명성 교회 사건은, 이들이 혈과 육이라는 욕심에서는 승리하였을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는 패배한 것이다.
(직접 싸워야 할 당사자로서의 성도)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은 사단의 다양한 특성들을 나타낸다.
이 네 가지는 서로 구분하기보다는 한 존재의 다양한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혼자 존재 할 수 없으며, 어떠한 형태로든 공동체에 속하여 있으며, 공동체를 주관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안식을 누리지만, 아직 육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이 세상 주관자들의 영향에서 자유 할 수가 없다.
사단도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사단에게서 완전히 보호해주시기보다는, 성도가 하나님의 도움하에 직접 사단을 대적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도는 전적인 보호가 필요한 어린 아이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장성한 어른과 같이 책임감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역경을 파헤쳐나가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할 때 막으실 수도 있으셨지만, 인격체로서의 아담의 결정을 존중해주셨듯이, 성도의 행동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고 보호해 주실 수도 있으시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성도의 인격 안에서, 성도의 능동적 대처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해 보아야한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악의 날은 인간이 사는 모든 날이 악한 날일 수도 있겠지만, 최후의 심판이 가까워질수록 사단은 더욱 발악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과 권위와 권력이라는 무장을 해제시킨 후에, 그 자리에 사단의 방식을 주입시키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자 통신의 발달은 무차별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려하기에, 인간의 내면의 악이 최대로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패망 직전에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을 배제하는 모습들이, 지금 이시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다고 말할 수 없다.
현 시대의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의 핵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의 부패된 모습일 것이다.
이렇게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는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만 할 것이다.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모든 기도와 간구)
성도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든 종류의 기도와 간구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악한 날에 성도는 기도와 간구없이 상황들을 해체 나아갈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상황의 악함이 근본적으로 자신들에게 원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이겨나가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있다.
상황을 해쳐나가기 위해서, 세상은 지식과 돈, 그리고 권력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성도에게는 다른 방법이 요구된다.
세상은 자신들이 힘이있고 부하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부하고 힘있는 이들은 성도들이다.
성도는 현재의 삶 가운데서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는 갖가지 방법과 다 갖추어져있는 셈이다.
성도에게는 미래가 약속되어 있으며, 현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 가운데,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바울이 권면하는 성도의 싸움의 모습 가운데에는 삼위 하나님의 총체적 임재를 경험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제공되고 있다.
성도는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과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이 악한 시대에 가장 큰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다.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쇠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대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고통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칭 사도라고 하는 목회자들의 경우 대부분은 교회를 기업으로 운영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사도들의 특징은 대부분 말씀을 전하는 일을 고난 가운데 수행하고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기에,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역경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도, 교만하지 않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인다.
만약에 바울이 이 시대에 생활을 하였더라면, 초대 교회시대보다도 이 시대가 더욱 힘든 시대임을 토로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유명한 목회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부귀영화로 몰락하는 것을 보면, 바울도 예외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일 것이다.
이 시대는 영적 전쟁에서 결코 만만한 시대라고 할 수 없다.
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바울은 갇힌 자로서, 갇혀있지 않은 자를 위로하고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진정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외적인 곤란에 처하여 있는 사람보다는 내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어려워도 내면의 풍성함은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준다.
힘든 이 시대를 풍요롭게 사는 방법은 물질이나 명예나 외적인 풍요를 추구함에 있지 않고, 오직 말씀을 소유한 자로서 삼위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이다.
(나가는 말- 새관점)
이 시대에 싸워야할 대적 가운데 한 가지는 변질된 신학이다.
허리에 띠어야 할 진리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면 더 이상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단들도 문제이지만, 신학적 왜곡은 성도를 무장해제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신학의 영역에서는 좀처럼 영적 전쟁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은 올바른 신앙의 형태를 잡아주는 뼈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생물도 뼈대가 틀어지면 원래의 특성을 가질 수가 없다.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는데 가장 취약한 부분은 개혁주의 신학의 붕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마다 심각한 신학의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은 둘째치고, 알미니안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등을 거쳐 최근에는 새관점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여있다.
새관점은 이머징미셔널처치(선교적 교회)와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과 연합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미명하에 기독교를 역사적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체시키는 작업을 하고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있어야하지만,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자체를 거부한다.
새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왜곡시키는 것은 물론 심지어 속죄 사역과 전가 교리를 부정함으로서 칭의 개념까지 바꾸어 버렸다.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역할을 단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으로 변질 축소시켰으며, 신약의 교회를 역사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으로 바꿔 버렸다.
바울이 말하는 마귀의 궤계 가운데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자들은 마치 자신의 폭넓음과 유행에 뒤지지 않는다는 신세대적 사고릉 과시하려는 의도인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단편적으로 자신의 학문과 목회에 적용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마치 개혁주의를 새관점으로 치장하는 것과 같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의지하면서 범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나가는 말- 축귀 사역)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가라!”하고 외치거나, 축귀 사역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귀신이 들린 경우가 아니고는 자신의 내면의 욕심으로 시험에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경우에 축귀 사역으로 대응하게되면, 자신은 의로운데 자신은 단지 외부의 마귀에 의한 희생자일 뿐이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된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성도는 이전의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하는데, 옛 사람과 마귀를 혼동하면 안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본질적 죄인이며,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에 참여될 수 없는 이들이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작업은 축귀 사역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사도 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 오히려 마귀에게 뒤집어 씌움을 당하는 이들을 보게된다.
영적인 접근법은 종종 이원론적 사고를 가져오기에 매우 조심하여야하고, 분별력을 요구하게된다.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실제로운 자신의 생활의 문제점으로 정신질환을 앓고있는데, 이를 축귀 사역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무식함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상식을 무시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들 가운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편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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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장 1-9절 말씀 묵상
오늘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사회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 관점에서본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회복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는 이 땅에서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투영되기에, 가정과 교회에서의 성도의 생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투영시키는 모습이 되어야한다.
이 땅에서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과의 관계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회복시킨, 하나님 나라에서의 관계성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자녀에게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주의 뜻에 합당한 경우에만 순종하라는 뜻으로 볼 경우가 있다.
이는 권위자들, 즉 정치인과 상급자들의 비도덕적인 행태와 같이, 부모의 부적절한 행동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기 위한 제한이 아니다.
로마서 15장 1-2절에서, 바울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셨기 때문에 권세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면하고있다.
부모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권세자에 대한 순종이라는 개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이루신 구속적 회복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회복하신 순종을 부모와의 관계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녀들의 순종은, 인간적인 방식의 순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신 순종의 맥락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순종은 부모의 기쁨과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순종은 창조 질서의 가장 기본되는 원리이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창조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리스도는 순종으로 질서를 회복시키셨다.
새 사람을 입어야하는 에베소 성도들은 불순종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순종의 새 사람을 입어야했으며, 부모로서, 자녀로서, 상전으로서, 종으로서의 각각의 위치에서 새로운 질서에 순응하여야만 했다.
새로운 순종의 질서는, 하나로 통일되게 하시는, 주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는 십계명의 제5계명인 출애굽기 20장 12절에서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와 맥락을 같이하고있다.
이는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다.
에덴에서는 아담의 순종을 조건으로 에덴에서의 축복이 보장되었었다.
아담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조건으로 가나안에서의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가나안에서는 모세의 시내산 언약에 대한 약속으로 제한적 축복이 약속되어 있었다.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가나안에서 쫓겨나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조건적 행위 언약 관계에 있었지만, 이 땅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행위 언약 관계에 있지않다.
자녀에게 보장된 장수는 자연법의 맥락에서 보아야한다.
하나님의 법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고는, 은혜 아래에 있다고 자연법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자연법도 하나님의 법 아래에 있으며, 율법이나 십계명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이끌어 가는 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시내산에서 주어진 제 5계명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구원과는 상관없을지라도 성도들도 항상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서 일반적인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노엽게 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의 죄성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
정상적인 세포조직도 지속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환경에 노출시키면, 변성이 일어나서 파괴가 되거나 암조직으로 변이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있으며, 상황을 수용하는데에는 한계점들이 있다.
부모는 특히 자녀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은, 자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사회에서 문제를 유발하는 이들의 많은 경우가 부모와의 비정상적 관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옳바르지 못한 자녀 교육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가 된다.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지금은 종이나 노예 제도가 없지만,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사회 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 당시에 종의 위치는 가정에 귀속되어있었다,
바울은 아내와 남편, 자식과 부모에 대한 권면에 이어서, 종에 대하여 권면을 하는 것은 상전과 종의 관계가 가정의 연장 선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에는 직장이 따로 있었다기보다는 가정과 직업이 혼합되어있었던 구조였다.
이 시대에 가정의 연장 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직장이기에, 종에 대한 말씀을 이 시대에 적용한다면, 제한적 의미에서 직장인들의 직장 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인들은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어느 정도는 종속되어 맡겨진 직책을 감당하여야한다.
바울에 종에게 권면하는 내용은 직무 수행과 관계된 것이며, 또한 상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도 마찬가지로 직무와 관계되어 직원을 대하는 방식에 관련되어있다.
바울이 앞에서 권면한 내용들이 가정의 영역이었다면, 이제 권면하는 내용은 직장의 영역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제한적 의미에서 적용되어야한다.
종은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인에게 귀속시킨 것이며, 직장은 자신의 극히 일부만 제한적으로 내어주는 것이기에, 전혀 다른 차원의 상황일 수밖에 없다.
성도는 이전에는 사단의 종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신분이 바뀌었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여야 할 것이다.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마음이라고 번역된 프쉬케(psuche,ψυχῆς)는 숨 쉬는 것으로 유지되는 영혼, 목숨, 생명을 뜻한다.
바울이 종들에게 권면하는 자세는, 외식하는 바리세인들과 같이 형식적으로 하지말고, 숨쉬는 것을 다하기까지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한다는 것이다.
외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칠한 무덤과 같이 외적인 모습에 치중했다.
이들의 행함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었으며, 결코 하나님의 뜻을 행할 마음이 없었다.
이들이 행하였던 외식은 결코 목숨을 바치기까지는 아니었으며, 최소한도의 형식적인 것이었다.
행함에 있어서의 기준은 하나님의 태초의 창조 사역이었으며, 이는 가장 완벽한 행하심이었으며, 하나님의 목숨까지도 내어놓는 사역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지금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도 더 이상의 완전함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이해 할 수도 없고 알수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원리가 하나님의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의 심오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실 때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의 사랑의 연합을 담아두셨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라고 말씀하신 가운데에는, 남자가 아내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것과 같이, 희생적 사랑이 요구된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신다는 뜻에는, 성자 하나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서 떠나, 성육신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면서, 택한 자들과 연합하심으로서, 태초에 이미 성도에 대한 완전한 창조 사역을 수행하실 것이 예표되어있었다.
그리스도의 행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순종하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종들인 사도들도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순종과 같이,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목숨을 바치는 완전한 순종으로서의 최선을 다하여야한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최선은 단지 생각으로서의 최선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같이 목숨을 바치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희생적 사랑의 행위여야한다.
그리스도의 종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들로,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위해서 부정직하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직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구조로 되어있기에, 현실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죄악에서 자유할 수 없지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은혜 가운데 살고있는 것이다.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모든 결산은 주께서 하신다.
사람에게 하듯 할 때에는 보이지 않는 이기적 목적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께 하듯이 하면 어떠한 위선과 가식, 속임수도 있을 수가 없다.
주께는 오직 진실된 행동만을 할 수 밖에 없기에,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일을 진실되게 할 것을 권면한다.
종종 선한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신다?”는 말을 듣게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선행에 대하여 값을 요구할 수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한 값은 어떻게 지불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으신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값을 치를 것인가?
주께서 주시는 것은 공로에 대한 값이 아니라 선물이다.
선물은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선물을 주시는 원리이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에 대한 축복으로서의 영원한 생명은 순종에 대한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도가 행하는 선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로 드려지는 것이어야한다,
주께서 물질로 갚아 주실 것이란 생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간은 하나님의 종이던지, 아니면 사단의 종이던지, 두 가지 중의 하나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종을 대하는 상전도, 자신의 주인의 행동 방식을 자신의 종에게 투영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종인 상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에게 속한 종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하며, 사단의 종인 상전은 사단의 속성을 투영시키듯이 자신의 종에게 할 수 밖에 없다.
성도는, 이전에는 사단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자신의 육신에 종속되어있는 이들에게 나타내어야만 한다.
(나가는 말)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등의 관계는 하나님의 권위 구조를 이 땅에서 투영시키고있다,
하지만 근대와 현대에 들어와서 인간의 문화는 권위 구조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였으며, 지금은 어느 정도 탈권위 구조에 안착되어있다,
반 세기 전에 한때 유행하였던 히피문화와 현재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은 권위와 권력과 전통을 거부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있다.
이는 좁게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넓게는 사회 제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부모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한다면 자녀는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에 혼란이 있을 수는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을 겪어온 부모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게되면서, 순종의 문제에 있어서, 자녀들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현대 사회의 구조 자체가 성경적이 아니면서, 또한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부작용들은, 자녀들에게 주 안에서 순종할 기회를 박탈하고있다.
이는 국가의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있다.
민주주의는 왕권에 대한 거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문제의 시작은 국민들의 불순종이 아니라 왕족들의 부패였다.
왕족들의 부패는 국민들에게 주 안에서 순종할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께서 원래 아담에게 부여하셨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권위보다는 사단의 권세를 더 경험 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변화되어야할 우선 순위는 권세자들이며, 부모들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이미 국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의미를 제거해버렸다.
더 이상 국가의 개념에는 왕국kingdom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왕국kingdom이었으며,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는 왕국의 개념이다.
현재의 민주주의 국가는 상전들이 지배하는 국가 체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주인이기에, 하나님의 통치권을 투영시킬 수가 없다.
민주주의 국가의 문제는 국민 대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일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론적인 왕국의 개념이 현실성이 없는 것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것이며, 민주주의의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죄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떠한 체제에 있던지간에 이 땅에서는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한시적인 체체 가운데 머물 수 밖에 없으며, 누구나 다 하나님의 나라를 투영시키지 못하는 구조 가운데 살고있기에, 어느 누구도 삶 가운데 말씀을 온전하게 적용시키지 못하는 생활을 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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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장 22-33절 말씀 묵상
바울은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풀어나가고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것에 관하여 논하면서, 바울은 이제 결혼에 담겨있는 비밀을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통하여 풀어내고있다.
바울이 정리하는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담겨있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에서는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가 담겨있다.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남자들은 종종 이 구절을 이용하여 아내에 대한 남자의 권위를 세우려고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복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순종의 개념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복종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남편에게 종속시키는 것인데, 이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인해서 피차 복종하면서 긴밀한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내가 독단적으로 남편과 관계없이 스스로 결정하여, 독립적인 행동을 하기 보다는,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신을 남편과의 긴밀한 관계성에 종속시키고서, 남편을 존중하면서 일을 하여야한다는 것이다.
마치 성도가 교회의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뜻과는 관계없이 자기 독단적으로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이, 성도가 언제나 주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것과 같이, 아내도 남편의 말을 듣고서 남편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복종은 주인과 종과의 관계성에서 나온 종속의 개념보다는, 서로 의견을 존중하면서 자신의 독단적인 뜻대로 일방적으로 행하지 않는 관계를 의미한다.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싸움이었으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것은 곧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물리친 것이 된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했으며, 다윗의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예표하였다.
머리의 의미는 대표성과 출발점, 그리고 명예와 권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아내가 자신을 남편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은, 남편의 대표성과 권위를 인정하면서, 남편에게서 시작된 권위 구조를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며, 더 이상 아담의 실패로 말미암는 사단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의 구조로서의 교회와 가정의 형성은,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으로 인하여, 더 이상 이 세상이 사단의 세력만이 권세가 아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밑으로부터의 회복이다.
아내의 남편에 대한 불복종은 처음 하와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와는 남편과 떨어져있었기에 사단이 틈을 탈 수가 있었다.
하와는 남편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 독단적으로 선악과를 먹었기에,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은 이러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죄 가운데 놓이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된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아내는 더 이상 하와와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남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남편의 뜻을 존중하고서, 독단적인 결정을 하지 말아야한다.
서로에 대한 복종은 공동체를 묶어주는 끈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는 완전한 복종으로 연결되어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공동체의 회복이며, 이는 서로에 대한 복종의 끈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기본되는 가정 공동체는, 아내의 남편에 대한 복종으로서, 더 이상 사단이 틈을 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말아야한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랑의 원리)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창조 원리가 담겨있다.
남자의 갈비뼈와 여자와의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과 창조된 인간과의 관계와 유사성이 많이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에서 취하여 지으셨다.
형상과 갈비뼈는 존재 자체의 근본적 속성을 결정한다.
인간에게 비록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라는 사랑의 원리가 더해져야 생명이 있듯이, 남편은 아내에 대한 희생적 사랑이 없이는 남편으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슬림 남자들이 아내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사랑의 원리가 결핍된 율법의 저주와 맥락을 같이 하고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이 담겨있는 인간을 사랑하셨던 것과 같이,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든 여자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완성되어야한다.
에로스적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가 아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기쁨인 것과 같이, 아내는 남편의 기쁨이어야한다.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는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입은 성도들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한다.
100% 깨끗하지 못하면, 깨끗하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선행으로는 100%는 있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서만 100% 깨끗하여질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대표되며,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새 사람을 입으려는 성도들로 구성되어야하며, 새롭게 시작되는 가정 공동체도 복종과 사랑의 관계로 흠없이 새롭게 시작되어야한다.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육적인 자기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감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의 자존감이 밑바탕이 되어야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는 사랑을 받아야하며,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기를 사랑하여야만 한다.
아내는 남편과 한몸이기에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이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서 가정 공동체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존재감을 갖게되는 것이다.
29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과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에는, 동일한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담겨있다.
바울은 창세기에 기록된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를 인용하면서, 비밀에 대하여 말하고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한몸을 이루는 것은, 성자 예수님께서 삼위 하나님의 높으신 곳에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고, 이들과 연합하여, 한몸을 이루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있다.
남녀 간의 혼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과 맥락을 같이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남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 안에 담겨진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아담이 타락 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이미 내포되어있었던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생각하여야 한다.
혼인의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가 이 땅의 교회를 위하여 삼위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서 떠나 교회와 한 몸이 된 것에 담겨있다.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의 맥락에서 생각하여야한다.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의 유비analogy라고 할수있다.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부부사이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의 모형이다.
유형적 교회가 부부의 관계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부가 함께 하는 것보다 교회 생활에 비중을 더 두는 것은 성경적 원리가 아니다.
부부는 이 땅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창조 원리와 결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그 형상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인간은 창조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창조물에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창조물에 자신을 투영할 능력이 없고,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형상을 피조물에 담아놓을 수 있으시며, 자신의 형상이 담겨있는 피조물을 사랑 할 수 있으신 것이다.
창세기 1-3장에는 인간의 창조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흔히들 창조물에 대한 사랑이 기록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창세기 2장의 “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4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마치 남자가 아내를 사랑하여 부모를 떠나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이,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 되었음을 비밀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이 비밀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 사역에 담겨있는 비밀을 예표하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인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사랑을 완성하여가는 과정이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
이러한 사랑은 순종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아담과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사랑을 받기에 합당한 요구였으며, 순종의 조건이 형성되지 않는 상태에서 사랑은 성립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남편은 마땅히 아내를 사랑하는데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여야한다.
남편과 아내와의 사랑과 연합의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의 가장 중요한 맥락이다.
결혼은 이러한 창조의 비밀을 담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서구 사회에서 유행하고있는 동거문화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역하는 어둠 가운데서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동거 문화의 문제점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되는 것의 관계성에 비추어 볼 때 동거 문화는 많은 문제점이 있으며, 동거문화가 일반화되는 곳에서 교회는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교회의 정체성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혼인을 통한 한몸이 되는 원리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원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가 연합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동거문화는 연합의 개념이 빠져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위한 이 세상의 목적을 상실하게 만든다.
혼인은 서로의 재산을 공유할 것을 약속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
하지만 동거문화에서는 서로의 재산에 대한 소유를 주장 할 수가 없다.
혼인은 남편의 희생적 사랑과 아내의 복종이 요구되지만, 동거문화에서는 서로에 대한 희생은 계산에 의한 것이며, 행동방식은 자신의 독단적 결정이 우선이 된다.
서로 생각을 종속시키지는 않는다.
동거문화는 아담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아가페적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혼인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 즉 아가페적 사랑으로 연결되어있지만, 동거는 단지 육적인 에로스적 사랑만으로 연결되어있다.
혼인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담겨있지만, 동거는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사단의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혼인은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의 출발이지만, 동거는 교회의 본질을 훼손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의 속성 자체를 변질시켜버린다.
동거하면서 진정한 교회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서구 사회의 동거 문화와 교회의 몰락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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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장 15-21절 말씀 묵상
오늘 말씀은 마치 이민 선을 타고 이국 땅에 도착하는 배에서, 승무원들이 이민 자들에게 이국 땅에서의 생활 방식을 소개하면서, 앞으로 어떤 방식의 생활을 하여야하는지 설명해주는 장면이 떠오른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어떠한 새 사람을 입어야하는지 새 사람의 삶의 방식을 소개하고있다.
이는 원래 아담이 에덴에서 이루었어야 할 공동체에서의 삶의 방식이었는데, 잠시 아담의 타락으로 잊혀졌던 것을 다시 가르쳐 주는 것과 같다.
아담은 원래 에덴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직책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로서 마땅히 수행하여야 할 직책인 것이다.
제사장으로서는 하나님께 시와 노래로 예배하고, 선지자로서는 악한 세대를 분별하는 하나님의 지혜로, 왕으로서는 술취하여 사단의 지배를 받지 말고 자신을 통제하여 이 세상이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하도록 하여야한다.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지혜있는 자)
자신을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는, 마치 운전자가 주변을 잘 살펴본 후에 차를 움직이는 것과 같이, 자세히 주변을 살펴본 후에, 자신의 행동 방식을 결정해야한다.
이에 대하여 첫 번째 실수를 한 사람은 바로 아담이었다.
그가 하와와 더불어 자세히 주의하여 상황을 파악했었다는 언급은 없다.
사단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켜서 혼란스럽게 만들었는데도, 하와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모든 상황이 사단스럽게 움직여도, 부패한 인간은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하여 전혀 파악을 못하고 있다.
사단은 인간을 분명 파멸로 몰아가고있지만, 인간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있는지 전혀 의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한 지혜는,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세상적인 지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상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시기에,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를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한다.
그리스도인은 외부 상황을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볼 때에야 비로소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롭게 판단하고 결정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는 세상의 지혜는,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두 번째 아담의 후손인 신자는 그리스도께로 부터 오는 지혜로 상황을 판단하여야한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지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깨닫아야만 가능한 것이며, 신자는 이를 근거로 자신의 행동 방식을 결정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지혜는 성경에 대한 신학적 지식만으로, 인간적으로 분석하고서 판단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지혜는 오직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간섭하심과 도우심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지혜없는 자)
지혜없는 자는 한마디로 거만한 자를 말한다.
거만한 자는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하지 못한다.
거만한 자는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이다.
겸손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데서부터 시작된다.
거만한 자는 책망과 교훈을 멸시하며, 도움을 받기를 거절한다.
지혜 없는 자는 지식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받기를 거절하는 교만에서부터 오며, 구약의 이스라엘이 이러한 모습이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는 보편적인 인간들의 모습이다.
아담의 지혜 없는 행동은, 이스라엘의 교만과 우상 숭배로 재연되었으며, 이는 타락한 죄인들의 삶 가운데 보편적으로 재연되고 있다.
새 사람을 입어야할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지만, 이 땅에서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낌)
인간은 누구나 다 멸망의 시간을 살아가고있기에, 성도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최선을 다하여야한다.
주어진 기회는 하나님께서 잘 활용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때가 악하다는 것은, 마치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과 같이 상대방의 끊임없는 공격을 막아내야만 하는, 제한된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경기를 치러야만 하는 상황과 같다.
시간이 종료되면 더 이상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에, 성도는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여야한다.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함과 방탕함)
술 취함은 주어진 기회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어리석은 것이다.
술 취함은 마치 땜에 담겨있는 물을 아무 용도도 없이 그냥 흘려 내려 보내는 것과 같다.
술이 들어가면, 엘돌핀과 도파민이 과다 분비되면서, 몸 안에 축적된 에너지 밸브를 열어 이를 다 쏟아 버리게 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들을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버리는 것과 같다.
이와는 반대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제한된 시간만 허락해 주신다.
어떤 이들에게는 많은 기회들이 주어지고, 어떤 이들에게는 비교적 적은 기회들이 주어진다.
이는 마치 달란트 비유에서와 같이 결산을 요구하는 기회들이다.
술취함은 이러한 기회들을 쓸모없이 버리는 것인 반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게되면, 이러한 기회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가 있게 된다.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
다윗은 언약궤가 들어올 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주께 찬양을 드렸다.
(시편 95편)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전적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음을 찬양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랑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부모가 자녀를 보고 기뻐할 때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모를 즐거워하는 것 밖에 없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주께 찬양드리는 한 가지 방법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에서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은 일상의 삶 가운데서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있어야하며, 이를 표현하는 방법 가운데 한 가지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찬송하는 것이다.
새관점의 주장과 같이, 거듭난 성도에게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또 하나의 과제가 주어진다면, 성도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을 것이다.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에 있어서 감사해야하는 이유는,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일을 이루시기에, 성도는 모든 부정적 상황 가운데서도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만한다.
성도는 자신이 오해를 받는 일이 있다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였거나, 왕따를 당하였거나,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슬픔 일을 당하였다 하더라도, 이마저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일들로 바뀌어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들은, 성도들의 가슴을 찢어 놓을 수도 있고,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여 극단적으로 좌절되거나 우울증에 빠지게 할 수도 있기에, 결코 쉽거나 가볍지 않을 수도 있다.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경외함)
학생들이 서로 싸우다가도 선생님이 들어오시면, 더 이상 싸우지 못한다.
맏형이 있으면 동생들이 서로 싸울 수가 없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두려운 존재가 없으면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어있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셔서, 그리스도 안에 모인 존재들이며,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모인 이들이기에, 어느 누구도 서로에 대하여 부족함이나 부정적 모습 때문에 불평할 수가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용서하거나 용납하라는 말을 넘어서, 서로에게 자신을 복종시킬 것을 요구한다.
성도들 간의 복종은, 부부가 서로에게 복종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서로 복종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동체의 특징이며, 이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약속하신 구속 언약을 서로 복종하시면서 이루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이루어진 모든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로 서로 간의 복종이 요구된다.
피치 복종하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결속력이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특징이다.
아담은 타락 하면서 바로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었고, 가인을 아벨을 죽임으로서 철저하게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였었다.
바울은 거듭난 에베소 성도들에게, 앞으로 성도들이 이루어야 할 공동체는 서로 간에 피차 복종, 즉 서로를 서로에게 종속시키면서 강인한 결속력을 갖는 공동체를 이루어야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유형적 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성도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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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장 8-14절 말씀 묵상
에베소 성도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에베소 성도들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하기에 변화된 삶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들에 대하여 원론적으로 언급하고있다.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어둠)
어둠은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어둠이 아니다.
어둠에는 빛이 전혀 없으며, 어둠의 상황에서는 갈길을 알 수도 없고 주변 상황도 파악 할 수가 없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어둠의 자녀라는 말보다는 어둠 자체를 인격과 동일시 하면서 사용하고 있다.
바울이 보는 불신자는 어둠의 희생자가 아니라 어둠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바울은 거듭난 성도를 빛 자체이면서 빛의 자녀라고 칭한다.
이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빛 자체로 봄으로서, 빛 가운데 거하는 빛의 주체인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어둠과 동일시되고있는 불신자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그림자를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빛의 자녀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둠 가운데 주신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은총, 즉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전적인 선물이기에, 받는 이들의 모습이나 성품과는 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종종 일반 은총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선한 모습들을 인간의 인격 자체에 투영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사람들은 몇 가지 선한 것을 행함으로 인해서 마치 자신의 성품이 착하고 선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선은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선한 것일 뿐이지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선하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개념이나,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100% 죽어있고 부패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인간이, 자신이 무엇인가 누릴 자격과 능력이 있어서 누린다는 생각은 전적인 착각이면서 교만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잘나서 혹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의 이러한 교만을 계속적으로 질책하신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빛의 자녀로서 행동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감사하면서 겸손하게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공로적 댓가를 주장 할 수 없는 열매들)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은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 맺는 마땅한 열매로서 공로의 개념이 적용될 수 없는 결과물들이다.
착하게 살았고, 의롭게 살았고, 진실되게 살았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어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공로적 사고방식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은 바로 이러한 방식의 사고를 가지고있다.
새관점에서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공로적 행위가 요구된다.
새관점에서는 최종적 구원을 염두에 두고 은혜 안에 머무는 삶을 주장한다.
새관점에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은혜 안에 머물고(staying) 있었지만, 행위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은혜 안에 머물면서 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진실되게 살아야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이 나온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자체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보기 위한 무리수를 둔 유대주의적 사고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완전한 것이기에 최종적 구원에 더 이상의 필요를 요구하지 않는다.
성도의 잘못에 의해서 최종적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이는 행위 구원론으로서의 펠라기우스적 사고이며, 그리스도의 은혜는 불완전한 것이 된다.
성도는 마땅히 은혜의 열매를 맺어야하며, 그 열매를 가지고 어떠한 공로적 기대를 하거나, 댓가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시험한다는 것은 단순한 테스트가 아니라, 분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하며, 과정 가운데 옳고 그른 것을 발견해 나아가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과 생각이 모두 집중되어야만 가능하겠지만, 그 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은 타락한 심성을 가지고있기에 시험의 기준을 제대로 가질 수가 있다.
성도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분별해 나아가야 한다.
새 사람을 입은 성도는 옛 사람 아담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아담은 선악과에 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러한 시험을 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하와의 권고를 수용하였다.
하와는 뱀의 유혹을 시험하지 않고 뱀에게 시험을 당함으로서 타락의 굴레에 빠져들었다.
에덴에서의 실패로 인하여 아담의 후손들은 주를 기쁘게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 사람을 입으면서, 빛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이 약속된 이들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아담과 같이 분별력이 없이 다시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하여야한다.
사단의 유혹에 걸려들면 사단이 흔들 수 있는 손잡이를 제공해주기에,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성령을 근심시키는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슬픔이 될 수 밖에 없다.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책망하라)
책망expose하라는 것은 “죄를 드러내어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권고한다”는 뜻이다.
이는 유다 백성들의 죄악이 극에 달하였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였던 역할이었다.
이스라엘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죄악이 드러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하여 인간의 죄성의 실상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당위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였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인간의 죄성에 근거한 열매없는 어둠의 일이었으며, 이는 보편적인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일반적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인간의 죄악을 드러냄(책망함, expose)으로서, 어둠에 있는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문제로 드러나야만 해결책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상황 가운데 발생하는 문제들을 문제로 드러냄으로서, 그 가운데 성령의 간섭하심을 경험하는 가운데 복음의 능력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은,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과 같은 류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였으며, 보편적인 인간들이 행하는 모습들이다.
은밀한 것은 어둠 가운데 있는 것이며, 빛을 피할 수 밖에 없다.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원하는 것은, 우상이 옳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상이 어둠 가운데 있기에,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어둠의 사람들의 속성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러한 은밀한 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에베소 성도들이 옛 사람을 입었던 이전에 접했던 모습이었기에,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입장에서 권고하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다.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비록 성도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이러한 모습이 드러났던 것을 경험하였던 이들이지만, 아직 여전히 죽어있는 어둠의 사람들은 그들의 어둠이 빛 가운데 드러나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빛으로 비추시기에,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은 드러난 것들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는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음으로 빛 가운데 드러났던 것과 같이, 인간 모두는 결국 어둠 가운데 행한 모든 은밀한 것이 빛 가운데 드러남으로서, 죄악에 합당한 책임을 지게될 것이다.
대부분의 악을 행하는 이들은 자신이 어둠 가운데 행한 것이 드러나지 않으리란 생각으로하지만, 이는 단지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연 법칙을 넘어서시는 초자연적인 분이시다.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와 죽은자)
바울은 죽은 자와 잠자는 자를 대조시킨다.
죽은 자는 어둠 가운데 계속 있게되지만, 잠자는 자는 빛이 비추이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성도는, 죽은 자가 아니라 잠자는 자에 속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잠자는 관리의 딸을 일으켜 세우셨다.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마 9:24)
이 땅에서 육체가 잠자는 성도들은, 영으로는 천국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완전한 빛 가운데 빛으로 존재하는 부활체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신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한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둠 가운데서의 옛 사람의 방식이 아니라, 빛 가운데서 새 사람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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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장 1-7절 말씀 묵상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의 받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그들 가운데 부모의 모습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흉내를 내는 것은, 부모의 모습이 자녀 가운데 투영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자녀를 낳은 부모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이 투영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인간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이미 아담 안에서 일그러져있지만,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한다.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회복될 순 없겠지만, 행위에 있어서는 마땅히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는 행동을 하여야한다.
이러한 행동은, 방법론적으로는 인위적이지만, 하나님을 본받는 방식의 행동을 취함으로서 어느 정도는 성화의 과정으로서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는 더 이상 사단의 종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자녀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하시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에 부모는 기쁨 가운데 자녀를 위해서 희생을한다.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실천으로 증명된 희생적 사랑의 결과이다.
사랑 가운데서의 희생에는 기쁨 가운데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한다.
희생에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억울함과 손해본다는 피해의식이 뒤따르게되기에, 이러한 희생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다.
교회생활에서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이 없이 희생적 봉사를 할 경우, 그 후유증은 그대로 성도간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택한 자를 사랑하시는 가운데, 이들의 구원에 대한 기쁨의 고통과 자원하는 희생이 있었다.
택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기쁨이기에, 자원하는 희생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형상이 성도들 가운데서도 나타날 때, 이는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사랑하는 자를 위한 구속적 희생이지만, 성도 간의 희생은 구속적인 희생이 아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릴 수는 있어도, 이는 구속적이지도 않고 속량과는 상관없다.
새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것은,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 정신뿐이다.
그들이 보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구속적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에 대하여 구속적 희생을 말하는 개혁주의의 관점과는 차이가 있다.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음행)
하나님의 창조 목적 가운데 한 가지는, 피조물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행위로서,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음행은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탈하는 관계성의 파괴 행위이다.
우상 숭배와 음행은 밀접하게 연관되어있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포기하는 것이다.
음행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과 깊게 연관되어있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을 떠난 행위였으며,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서, 모든 인류에게 음행의 문을 열어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명하신 행위 언약을 파기하는 범법의 행동이었다.
정상적인 관계는 약속을 근거로 한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약속이 없어도, 태어남 자체로 이미 약속이 형성되어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자체에 하나님과 언약 관계가 내포되어있다.
사단의 말을 듣고서,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는, 약속 즉 언약을 파기한 행위였으며, 이는 음행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기에,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한 약속을 전제로한 결혼 문화에 대해서도 거부하려는 경향이 있다.
동거문화는 서로에 대한 의무적 관계성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에서 생겨난 문화이다.
결혼은 서로에 대한 약속을 전제로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관계없이 서로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여야만 한다.
마치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행위 언약 성격의 약속을 하였던 것과 같이 결혼도 상대방에 대한 의무를 다하여야한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음행의 연고로 인하여, 행위 언약을 파기했기에, 하나님의 저주로 바벨론 유배 생활을 하여야만 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행위 언약 관계에 있지 않았었다면, 이스라엘의 음행의 연고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으셨을 것이며, 대신에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동거문화에서는, 결혼과는 달리 계약 관계에 있지 않기에, 서로가 음행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동거 관계는 마치 하나님과 이방 민족과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동거문화는 대부분 음행에 대한 부담감에서 출발한다.
서로에 대한 의무를 지키길 원치 않기에, 결혼하고서 음행한 연고로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음행에 대한 부담을 덜고자 동거를 선호하게되는 것이다.
결혼문화는 시대에 뒤진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법칙의 범주에 속한 것이다.
결혼은, 모형과 그림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예표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재산의 공유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듯이, 결혼은 서로의 소유를 공유하는 것이다.
동거는 상대방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다.
동거 문화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삶의 방식으로서, 희생적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동거 문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천국의 상속자, 그리고 공동체를 위한 희생적 사랑의 행위라는 성경의 중요한 특징들과는 대립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음행을 피하라고한 것은,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성도들의 음행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더러운 것)
육체적으로도 더러운 것이 있고 생활 방식과 동기에 있어서도 더러운 것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회칠한 무덤과 같이 더러운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나마 최소 한도의 명맥을 유지하고있을 뿐이다.
인간의 존재 방식이나 동기는 원론적인 더러움이지만, 바울이 말하는 더러운 것은 특히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행동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울이 말하는 온갖 더러운 것들은 주로 성생활과 관련이 되어있을 것이다.
성에 대한 무분별한 남용은 음행과 동거문화는 물론, 동성애와도 관련이 있기에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고 성도들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에베소의 아데미 여신을 중심으로한 문란한 성생활에 대한 관점은 오늘날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관점과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비록 인권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다고 하더라도, 인권이 하나님의 명령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경우가 바로 동성애에 대한 인권일 것이다.
동성애를 여러가지 생물학적인 인자로 정당화시키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동성애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 뿐만이 아니라, 자연법에도 위배되는 더러운 것이다.
타락 이전에 여성으로서의 하와는, 아담을 위해서 지어졌고, 아담은 여자를 보고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법칙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보시고 특히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것은, 사람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운행 원리들이 하나님의 창조 법칙에 순종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만물 가운데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것이 없었기에 보시기에 좋으셨을 것이다.
타락 이후에 인간의 속성은 많은 변질을 가져왔으며,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었으며, 삶의 환경에는 파괴적이고 부정적 요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체질도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변화가 일어나면서, 성에 대한 왜곡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타락 이후에 창조 세계의 속성들에도 부정적인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아 홍수로 인한 환경의 급격한 변화는 많은 생물들의 생태학적 특성들에도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타락과 자연 환경의 변화는 인간의 내적인 속성과 외적인 속성에 변화를 가져왔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죄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동성애 성향도 이러한 타락의 영향에서 생겨진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동성애자들의 변태적인 성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모습에 더러운 짓을 하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행위라고 할 수 있기에, 바울이 말하는 바와같이,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아야 할 더러운 것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탐욕)
탐욕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 이상의 것에 대하여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우상숭배나 온갖 더러운 것도 탐욕의 유형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정상적인 소득 이상의 것에 욕심을 부리면서 행하는 온갖 부정 부패들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탐욕은 인간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동문회 모임에서 동문들과 같이 식사를 하다보면, 접하는 잡다한 소리 가운데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가운데 속하여 있지 않은 것은 거의 없는것 같다.
공적인 안건 말고는 거의가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 이상과 관련이 되어있다.
이는 이 세상 문화가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흔히들 그리스도인들은 문화변혁을 사명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마치 먹물에 깨끗한 물을 붓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성도에게는 오히려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마음에 가득한 것들이 입밖으로 나오기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가 거의 파악된다.
불이 그 빛으로 증명이 되듯이, 사람의 성품은 말하는 것으로 증명이 된다.
음란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하는 말은 인간이 사단의 좀비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만약에 성도의 입에서 이러한 부정적인 말들이 나온다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는 행위다.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대위임령(마 28:19-20)의 사명을 위임받은 자이기에,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여야 할 성도의 입에서 이와같은 더러운 말이 나와서는 안된다.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우상 숭배는 엄연히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행동 방식이다.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들은 앞에서 살펴 보았던 것과 같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가증한 자들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들을 용납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의 붕괴를 초래한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상숭배자들이 가지고 들어온 이와같은 더러운 것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킨 결과로 인한 것이다.
유다의 멸망을 초래한 므낫세의 죄악은,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를 성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것으로, 유다의 멸망과 더불어 그 이름이 같이 기록되고있다.
성도는 우상 숭배자들의 교회 공동체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심각성을 가지고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어느덧 교회 안에서 이러한 모습들이 일반화되고있는 것보게된다.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속이는 것이 능동적 범죄라면, 속임을 당하는 것은 수동적인 범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이 진짜같아서가 아니라, 거짓인줄 알면서도 우상들이 마음이 원하는 것에 기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스스로 범죄하면 명분이 없기에, 자신의 범죄에 대한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서 속임을 당해주는 것이다.
속임을 당하는 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도 피해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속이는 자와 같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주식 투자를 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할 경우 대부분이 다른 사람의 권유로 하지만, 실은 자신의 마음의 소원에 명분을 만든 것 뿐이기에, 결과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르고 행한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으신다.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러한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같이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면서도, 그들의 우상 숭배는 그대로 가지고 들어옴으로서, 그들과 같이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속이게 내어줌으로서,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불순종의 아들들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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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장 25-32절 말씀 묵상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신분 변화에 걸맞는 행동을 할 것을 권하고있다.
이는 일반 사회에서 생각하는, 천민에서 귀족으로의 상승이나, 혹은 부자기 된 가난했던 이에게 요구하는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새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은 입는 것으로서, 본질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바울이 권면하는 성화로서의 새 사람을 입는 행위는, 윤리와 도덕을 말하는 행동 양식의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내적인 변화를 위한 것이다.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거짓)
거짓은 속임수라는 말의 의미도 있겠지만, 거짓의 구조는 진짜를 숨기고 가짜를 진짜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일종의 사기를 뜻한다.
옛 사람이 아담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새 사람은 그리스도께 뿌리를 두고 있다.
거짓은 생각과 말과 행동등 다양한 방법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다.
거짓은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진실로 믿게하면서 살게하는데,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거짓에 속고 있다.
거짓의 아비는 사단이며, 아담이 사단에 속아서 거짓에 참여한 연유로, 모든 인간은 거짓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방향에 무엇이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아무 것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단은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거짓을 진짜로 착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욕심을 쫓아가는 많은 것들이 실상은 거짓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짓인 줄 알면서도 자기 욕심에 끌려서 거짓을 따라간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상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쫓아갔듯이, 모든 인간들이 마찬가지다.
옛 사람인 인간에게 진실과 참된 것은 불편하기에, 오히여 거짓이 편하고 좋아서, 스스로 속는 줄을 알면서도 거짓을 쫓아간다.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새 사람으로서 서로 마디가 되는 구조를 위해서 필요하지만,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기에, 모든 인간은 사는 동안에는 결국 죄인으로 증명될 수 밖에 없다.
복음은 결국 죄인으로 고발되는 이러한 인생에게 생명을 줄 수 있기에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분을 품는 것과 마귀에게 틈을 내어주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성이 있다.
분을 품는 것은 인간의 내면의 죄성을 쉽게 활성화시킨다.
인간의 행동 방식의 약점은 학습되어진 이상의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악에 학습되어지거나 선에 학습되어진다.
인간의 내면의 죄성은 그 자체가 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인간에게 죄의 소원이 있을지라도 이를 다스려야한다.
환경의 중요성은 인간이 어떻게 학습되어지느냐에 따라서 악에도 학습되어지고, 선에도 학습되어진다.
오늘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전하는 진리는 학습되어져야 할 환경을 바꾸라는 것이다.
환경이 촉매제catalyst라면 인간의 죄성은 기저제base라고 할 수 있다.
기저제는 촉매제를 만날 때 반응을 일으키면서 결과물을 도출해 낸다.
기저제는 일정한 환경이 조성되면 활성화된다.
분을 품는 것은 마치 인간의 내면의 기저제에 열을 가해서 폭발시키는 것과 같다.
이러한 폭발 사고를 방지하고자 바울은 분을 품지 말라고 권한다.
환경으로 인간의 죄성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죄성을 활성화시키는 촉매제를 제거함으로서 어느 정도의 부작용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도둑질에는 합법적인 도둑질과 불법적인 도둑질이 있다.
불법적인 도둑질은 당연히 범죄 행위에 속하지만 합법적인 도둑질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다.
자기 손으로 수고하지 않고 돈을 버는 행위도 도둑질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
합법적인 도둑질 가운데는 카지노, 투기,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등이 있을 수 있다.
도둑질하는 것 못지 않게 자신을 도둑질 당하도록 내어 버려두는 것도 도둑질을 조장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인이라면 한 번쯤 주식투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식은 자본주의 사회가 지탱되는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이지만, 이는 합법적인 도박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식은 상황에 따라서 지속적인 등락을 반복하기에, 주식에 투자한 만큼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신앙인의 주식 투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식의 등락에 대한 관심 집중과, 사고 파는 시점을 파악하기 위하여 기울이는 열정이, 하나님께 향하여야 할 마음을 다 빼앗아 가도록 자신을 사단에게 내어맡긴다는 것이다.
결국은 마음을 도둑질한 사단은, 성도를 잡고 휘두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성도라 할지라도 사단에게 휘둘려서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음을 염려해야한다.
성경에서는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잠28:20)”고 말씀하신다.
주식 투자로 얻은 이익으로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 헌금으로 쓰여질 때 과연 이를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
비록 아직 죄성을 가진 육체이지만, 성령의 내주하심은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는 것은 가식이며 위선이지만, 덕을 세우는 지혜로운 말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의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성도는 비록 죄인이지만, 죄악에 대하여 용서받은 죄인이다.
죄인인 것과 죄악은 차이가 있다.
죄인은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몸을 절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면 이를 악하다고 할 수 없지만,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는 것과 같이, 죄인이 자신의 죄성을 제어하지 않고 사단의 도구로 내어맡긴다며는 이는 하나님보시기에 악한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성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만,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이에 대한 징계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성도는 사는 동안에는 죄성을 가진 육체를 지니고 살기에, 죄의 소원을 다스려야만 한다.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몸이 거룩한 성전이 되었기에, 몸의 소욕을 다스리는 것이, 진정한 삶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할 수 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듯, 선한 말로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이 진정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는것이 될 것이다.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의 역할 가운데 한 가지는 성도를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구원의 날까지 하나님께서 인을 치신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한 것이지만, 성도에게는 100%의 책임이 주어진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누구도 구원을 장담 할 수 없으며, 열매맺지 못하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택함받지 못한 사람임을 증명해주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성도의 악행은 마귀에게 틈을 제공 할 뿐만이 아니라 성도를 잡고 흔들 합법적인 손잡이를 제공해주는 것이기에, 자신이 믿었던 구원에 대한 확신이 거짓이었음을 증명해 줄 수도 있다.
거짓말이나, 분을 내는 것, 도둑질 하는것, 더러운 말을 내뱉는 것들은, 사단에게 잡고 흔들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를 제공하기에 성령께서 근심하실 수밖에 없다.
성령은 인격체이시기에, 비록 성도 안에 거하시지만, 성도의 행동 방식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신다.
성령께서 근심하시는 것은, 성도가 어디까지 잘못될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며, 심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 죄에 이를 수도 있기에, 성도는 사단이 잡고 흔들 손잡이를 제공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러한 행동 방식은 옛 사람을 벗는 행위이면서, 새 사람을 입는 성화의 과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행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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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장 17-24절 말씀 묵상
오늘 에베소 성도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 우선 변화된 성도로서 갖추어야 할 모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전반부는 옛 사람의 허망함에 대하여, 후반부는 생명에 참여하는 새 사람이 입어야 할 옷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주 안에서 증언한다)
증언을 한다는 것은 마치 재판관 앞에서 증인으로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증언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였던 것과 같이, 법적인 책임이 뒤따르는 행동이다.
말을 들은 사람은, 나중에 달리 행동하였을 경우에, 변명의 여지가 없이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
바울은 새 사람을 입는 성도의 행함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질 수 있는 행동이어야한다는 입장에서 증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있다.
바울이 에베소 편지를 통하여 전하는 앞으로의 내용들은 새 사람을 입는 성도가 갖추어야 할 행동 양식으로서, 그의 전하는 말을 들은 성도라면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마음의 허망한 것)
마음의 생각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내용, 생각의 방향성, 그리고 생각의 결과들이 모두 허망한 것, 즉 죽음으로 향하여있다는 것이다.
이는 에베소 사람만의 경우가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하는 모든 이방인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고, 현재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있는 모습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화려함과 굉장함과 아름다움과 다양한 예술 활동들도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연결되지 못할 경우에는, 허망한 것으로 마침표를 찍게 될 수 밖에 없다.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총명이 어두워짐)
총명이 어두워졌다는 말은 역으로 어두워지기 전에는 총명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을 역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총명은 그나마 인간에게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희망을 걸고서, 하나님께서 주신 일잔 은총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일반 은총은 구원의 은혜인 특별 은총으로 연결되지 않을 경우 결국 희망의 불꽃이 사그라들어 어두워 질 수 밖에 없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은 죄인으로서의 절망적 상황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 가운데 있던 총명도 어른이 되면서 더욱 어두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누구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악을 제어할 만큼 성숙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죄성에 대한 제어력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성숙해지지만, 주변의 사회 풍습의 집단성으로 말미암아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제어가 쉽지 않다.
죄성은 의식적인 교육을 통해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의 경우에는 인간의 죄성에 대한 통제가 안되어, 사회가 집단적 죄악에 빠져들기도 한다.
특히 에베소와 같이, 우상을 섬기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죄성을 다스리기가 쉽지가 않지만, 현대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총명이 어두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을 수용할 만한 환경이 조성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이다.
의식적인 제어로 인하여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제어하지 못함으로 인한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패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바울이 권하는 새 사람으로서의 행실은 그 자체가 삶을 의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사단에게 휘둘려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조건들이다.
(생명에서 떠난 삶)
인생을 열심히 사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목적은 상실된 채, 현실에서 쫓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육체적 욕구를 쫓아가는 삶이다.
하지만 육체의 죽음은 푯대를 상실하는 것이된다.
열심을 내었지만 정작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보시기에 좋았던 세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생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신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사람은 원래부터 감각이 없지는 않았다.
삶의 환경에 익숙하여지면, 감각이 무뎌진다.
에베소 사람들은 우상 숭배에 익숙하여졌기에, 방탕과 더러움이 잘못되었다는 의식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문화 충격은 대부분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하면서 생기게 된다.
하지만 그 문화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서 문화에 동화되고, 그 문화에 일체감을 느끼면서, 충격이 아닌 친근감, 더 나아가 향수를 느끼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문화를 수용하게되면, 그 다음은 그 문화의 주체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의 방탕함에 대해서도 감각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내어맡김으로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된다.
이러한 방탕은 결국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게된다.
에베소 지역의 우상 숭배는 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주변 지역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신들의 본거지로서, 이들의 문화는 이러한 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상들의 급속한 전파는 인간의 체질이 우상의 속성과 들어맞기 때문이다.
우상들을 중심으로한 문화는 인간의 죄성을 자극함으로서 사람들로하여금 철저하게 사단의 노예가 되게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게 된다.
성도가 죄를 가볍게보지 말아야 하는 것은, 마치 어린 자녀가 아무 준비도 없이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위험할 뿐만이 아니라, 면역력이 없는 환자를 세균에 노출시키는 것과 같다.
비록 구원에는 문제가 없을지라도, 그 삶은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소지가 없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밖에 때문이다.
이는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야 할 군인이 무장을 해제하고서 적진에 들어가 그들의 전투에 동참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군인의 모습이다.
건실한 삶은 영적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신학자는 부인과 자식을 놔두고 여비서와 동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방대한
술을 하기도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쓰여진 저술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술이었을까 의심이 될 수 밖에 없다.
삶의 변화를 외치던 “근원적 혁명”의 저자 존 하워드 요더도, 정작 자신의 성추행 사건으로 몰락하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J 목사의 뻔뻔함과 이를 치리하지 못하는 교단의 부패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럽히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악행의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다른 유사한 악행을 저지른 이들에게 악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악의 확산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아간의 범죄의 심각성은 아간이 숨겼던 물건이 우상 숭배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시날산이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이스라엘을 손쉽게 부패시킬 수 있는 소지가 있었기에,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아간의 죄는 철저하게 다스려졌어야 했다.
교회 공동체에 들어온 악행들은 공동체 전체를 침몰 시킬 수 있다는 관점에서 결코 가볍게 다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움으로부터 출발되며, 이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서 습득 될 수 있다.
의의 옷을 입은 것은 단 번에 성취된 칭의의 사건이지만,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은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성화의 과정이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성화의 꼭 필요한 과정이다.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예수를 증거하는 진리에 대하여 듣고 가르침을 받는 것은 칭의를 위한 전제 조건이면서 동시에 성화의 과정에서도 필연적으로 따라주어야하는 과정이다.
진리를 듣고 가르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진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있기에,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될 수가 없다.
Y대학교에서 건학 이념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이다.
하지만 학교의 표어와는 달리 학교에서는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을 뿐만이 아니라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가르치는 인본주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학문과 진리는 구분되어야한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기에 학문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진리는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진리는 문화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오랜 보수 전통 가운데 폐쇄적인 결혼문화권에서 생활하였던 청년들이 서구의 동거문화 가운데 들어가게되면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생각의 변화를 거부하면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이 된다.
이들에게 결혼문화는 구시대적 유물일 뿐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결혼 문화만이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의 편지를 받은 에베소 성도들이 듣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였던 것은, 에베소의 풍요의 여신 아데미(아르테미스)의 영향으로 성적으로 문란하였던 풍조에서 떠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진리 안에 거하며 올바른 결혼문화를 정착시키는 것도 한 가지 였을 것이다.
성도들에게는 문화와 진리가 충돌 할 때 항상 진리 안에 거하여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진리를 듣고 가르침을 받아서 죄악에 대하여 무감각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전통과 권위와 권력을 거부하는 특징을 보여주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은 어느 시대보다도 지혜가 요구되며, 죄악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기 십상이다.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유혹의 욕심은 인간의 본성이 죄악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보여준다.
10여년 전에 뉴욕에서의 정전 사태는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죄악에 친밀한 가를 보여주었던 사건이었다.
정전으로 인한 순간적인 어두움은, 많은 인간들이 서로를 해하면서, 성폭행과 도적질과 폭력이 난무하였던 아비규환의 시간이었다.
인간은 본성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죄성이 억제될 뿐이지, 결코 선하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일그러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인간에게는 그나마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가 남아있기에, 인간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하나님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모습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사단의 좀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시는 것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다.(데후2:11-12)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는 것은 그들과 같이 심판의 대열에서 벗어나게하려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의 모습 가운데에는 썩어져 가는 구습에 대한 구분이 불분명한 것이 많기에, 성도에게는 많은 지혜가 요구된다.
사단은 성도를 미혹하는 방법으로서,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에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이를 용납하는 행위는 사단에게 자신을 휘둘게할 손잡이는 제공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롤러코스터에 탄 사람은 중간에 내릴 수 없기에 정지될 때까지 많은 고생을 할 수 밖에 없다.
사단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현대 사회는 어느 때 보다도 성도들에게 많은 지혜가 요구된다.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칭의는 단번에 오지만, 칭의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성화의 과정은 평생을 요구한다.
존 머레이John Murray는 성화를 두 가지, 즉 단번에 이루어지는 결정적 성화definitive sanctification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의 두 단계로 나누지만,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새 사람은 입은 자, 즉 성화된 자가 아닌,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즉 성화의 과정이 요구되는 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신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분에 걸맞게 요구되는 행동이다.
성도 자체는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죄성을 가진 육신 안에 거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사람의 옷을 입는 과정이 필요하다.
옷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방식이다.
옷은 사람을 변화시켜준다.
마치 경찰관이 경찰복을 하고서 범죄에 가담할 수 없듯이, 성도는 새 사람의 옷을 입음으로서 자신 안에 내재해있는 죄성을 다스려야한다.
(나가는 말- 문화 변혁)
“새 하늘과 새 땅”의 저자 미처드 미들턴은 문화 변혁을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대위임령보다도 더 고차원적인 행동 양식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에베소서를 통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바울의 편지에는 어디에도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 변혁에 참여 할 것을 요구하는 구절이 없다.
바울의 권면은 문화의 변화보다는 성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우상 숭배가 가득했던 에베소에서 성도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 자신이 새 사람으로서 행하여야 할 삶의 양식으로서, 바울은 이에 대하여 원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에게 권면하는 삶의 변화는 변화된 신분에 걸맞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윤리 도덕의 변화도 아니며, 문화의 변혁을 위한 것도 아니다.
타락한 문화 가운데 유혹을 쫓는 구습은, 심판받을 자에게 심판 받기에 합당한 근거를 제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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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장 1-16절 말씀 묵상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의 갇힘은 희생이 따르는 신앙 생활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하면서, 신앙 생활이 자신의 생활에 손상이 되거나 제약이 될 때, 손해보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세상과 타협하거나 분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울의 갇힘은 신앙으로 인한 삶의 영역에서의 희생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교회를 위한 신앙생활이 삶의 영역에 깊이 들어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교회 생활과 일상 생활의 이원화를 추구하는 신자들에게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 네 가지 삶의 모습은 구약 이스라엘에서는 볼 수도 없었고, 생각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바울의 투옥으로 이어지는 행동 방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주의 결과이며,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 희생은 죄의 결과이며, 투옥은 죄값을 치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희생적 삶의 모습을,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성도가 갖추어야 할 마땅한 성품과 연계시키고 있다.
(겸손)
이스라엘 공동체의 패망은 교만과 관련되어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만을 질책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취한 때문이다.
신약의 성도가 받은 지위와 능력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성도의 겸손은 교회 공동체가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온유)
온유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성품이다.
온유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부름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의 열매이다.
부드러움으로는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한다.
하지만 온유한 자는 세상에서의 희생을 감수하여야한다.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과 같이, 세상의 핍박에 대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
온유한 자는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며, 시기하거나 다투지 않으며, 희생을 각오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은 마치 고무줄을 당기는 것과 같이 언젠가는 움직일 것을 기다리면서, 움직임을 늦추는 것이 아니다.
오래 참음을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인내가 아니다.
오래 참음은 순간 순간 좌절과 포기와 낙담과 절망이 쌓여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단순히 움직일 시간을 늦추거나, 참지 말아야 할 시간을 늦추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내적 능력의 표현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성도는 순간 순간 분노와 시기와 다툼의 생각을 죽임으로서, 온유한 모습을 드러내는 가운데 인간적인 행동 방식을 접어야한다.
움직임을 결정하고 행동하여야 하는 순간은, 오직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진행되어야 한다.
(용납)
용납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상황을 수용하는 것이다.
용납은 오래참음의 결과이다.
여기에는 분별력이 요구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 것에 대하여 질책한다. (고후 11:4)
부정적 상황은 긍정적 상황을 위한 과정으로 용납될 수도 있겠지만, 불의를 좋아하는 자를 심판 위하여 허용된 것도 있기에 조심해서 용납하여야 한다.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는 것과 사랑 가운데 용납하는 것은 구분되어야한다.
서점에 나와있는 신앙 서적과 신학 서적 가운데는 진리의 영이 아닌 미혹의 영으로 쓰여진 책들이 많이 있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용납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는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하나됨 가운데 속하여 있는지 분별하여야 할 것이다.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도는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서 평안의 연결로 성령의 하나됨을 유지하도록 열심을 내야한다.
하나됨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이다.
하나됨은 공동체의 기본 요건이다.
아담은 지음을 받았을 때 삼위 하나님의 하나된 공동체적 형상을 부여받았다.
에덴에서의 순종은 궁극적으로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됨의 완성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됨의 파괴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파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간이나 다윗의 범죄와 같이, 한 개인의 불순종이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한 개인의 불순종이 공동체의 하나됨에 미치는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신약의 교회는 상실되었던 공동체의 회복이면서, 하나로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진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하나되게하는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고, 성도는 성령 안에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그리고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된 교회 공동체를 가꾸는데 참여하여야한다.
교회에서의 교만과 다툼과 분열은, 성령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일이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는 만유내재신론과 결부되어서는 않된다.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은 하나님께서 만물 안에 계실 뿐만이 아니라 만물이 신이라는 개념까지 나아간다.
하나됨은 삼위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과 같이, 궁극적으로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성도도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몰몬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성도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일반 은혜와 택한 자에게 주시는 특별 은혜도 모두 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 교회를 세워나아가는 것이다.
성도가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전하는자로, 목사로, 교사로 부름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주신 선물의 분량대로 맡겨진 직책들이다.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인간들은 모두 다 사단에게 사로잡혔던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자신의 종으로 사로잡으시고서, 이들에게 선물을 주신다.
원래 아담이 에덴에서 받은 직분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이었다.
이러한 직분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관리하기 위한 직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사단에게 빼앗겨 왜곡되고 변질되었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회복하시고서, 자신과 연합된 성도들에게 이러한 직분을 위임시키신 것이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타락한 세상 가운데 세워지는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직분은 좀 더 다양해야 했기에, 사도로서, 선지자로서, 복음전하는자로서, 목사로서, 교사로서의 다양성이 필요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로 연합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령의 강림하심과 더불어,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의 교회의 사역이 맡겨졌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러한 다양한 선물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공동체적 사역들이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땅 아래 낮은 곳에 지옥, 즉 하데스를 의미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지옥을 뜻한다면 이를 뒷받침할만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의 설명을 찾아야만 한다.
땅 아래 낮은 곳보다는 “낮은 곳인 땅으로”라는 표현이 문맥에 더 적합하다고 본다.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사도와 선지자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필요한 사역자들이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도 사도와 선지자를 자칭하는 것은 완성된 성경에 더하려는 행위이다.
사도행전 29장이나, 목사에게 사도라는 명칭을 적용하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다양한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은사주의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허물 수가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성도들에게 많은 신학적 지식이 요구된다.
아직도 교회에서 성경이나 신학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분위기다.
한국 교회에 이단들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것은, 교회에서의 충성 봉사에는 열심이지만 정작 성경을 체계적으로 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하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는 성도가 성경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면 부담스러워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회는 목회자의 전유물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단과 거짓의 유혹에도 흔들림없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
유독 한국 교회에 이단이 많은 것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을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아는 일에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진리는 논쟁을 유발할 소지가 많고, 자칫 성도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이 다를 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분열을 유발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사랑 안에서 극복해 나아가야한다.
하지만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곡된 진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상하게 할 수 있기에, 진리는 반드시 바로 세워져야하며, 이는 자칫 분열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하나의 진리 안에서 다양한 교단이 있는 것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의 터에 뿌리를 내리고 견고하게 세워져가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다.
이를 극복하는 수단은 사랑이지만, 인간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사랑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능력이 없는 사랑이다.
교회의 분열과 교단의 분열과 성도 간의 분열은 희생이 없는 공허한 사랑을 외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통하여,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희생적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기에, 성도는 자기 희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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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장 14-21절 말씀 묵상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한글로는 족속으로 번역되어있지만, 이는 혈통이나 가문에 비중을 든 가족의 의미를 가진다.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왕적인 통치권이 있음을 의미하면서도, 하나님의 왕권은 가족적인 의미가 크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종이었던 택한 자들을 속량하시고,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을 부여해 주셨다.
하나님의 왕권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아버지라고 부룰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셨다는 관점에서는 자녀이면서 동시에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상속권을 부여받는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은 동물들에 대한 왕적인 통치권이 아담에게 있음을 의미하였지만, 이들이 아담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브라함, 사라, 이스라엘, 바울등의 이름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시작된 삶을 의미하면서, 삼위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들을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족속, 즉 가족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가족에게까지도 이름을 주심으로서 땅에서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통치권과 주권을 선포하고 계신다.
하늘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상위 구조Upper-register로서 하나님이 계시면서 하늘의 영들이 있는 곳이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비밀은 이방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뿐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역으로 인해서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함으로서, 더 이상 하늘의 권세에서 추방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권세에 전적으로 복종하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에베소 성도들도 하나님의 풍성한 것으로 가득 채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견고한 터 위에서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원해서이다.
바울의 기도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바라면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성령의 능력)
성령의 능력은 창조의 능력이다.
첫 창조때 성령께서는 혼돈의 수면 위를 운행하시면서 이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덴의 유형으로서의 가나안으로 인도 하셨다.
성령께서는 솔로몬 성전을 뒤덮으시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셨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강림하시어 성도들 가운데 임하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셨다.
성령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에게 임하셔서, 이들을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하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심으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풍요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한 것이다.
(속사람)
신비주의는 속사람의 변화가 없이 신적인 것을 경험하려고하다가 문제가 생긴다.
속사람은 관상기도에서 말하는 내면의 불꽃이나 신적인 신성한 영역이 아니다.
관상기도에서는 사람의 존재를 플라톤적 이원론으로 해석함으로서, 사람의 겉은 부패해 있으나 내면 깊숙이 있는 속사람은 신성하고 거룩한 영역으로 규정하고서, 관상 기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속사람의 세계 속으로 심취해 들어간다.
하지만 관상 기도를 통해서 들어간 내면 깊숙한 세계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전혀 다른 세계다.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요한, 토마스 머튼이 말하는 내면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예수는, 실제의 예수라고 할 수 없다.
관상 기도를 통해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면,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있는 관상 기도를 통해서도 다같이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토머스 머튼은 일본의 선불교 지도자와 교제를 나누다, 추진된 방콕에서의 세계종교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감전 사고로 죽기도하였다.
로마카톨릭은 1962년부터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타종교와의 대화의 통로로 관상기도를 택한 것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가 않다.
관상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왜곡시키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성경에는 어디에도 이러한 방식의 기도를 권하지는 않는다.
관상기도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바울 사도의 제자(행 17:34) 디오누시오라고 잘못 생각한 위(僞)디오니시우스의 영향으로 중세 수도원중심으로 기독교에 깊숙이 들어온 잘못된 기도방식이다.
바울이 말하는 속사람은 인간의 위선적인 외적인 면이 아닌,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면으로서, 성령께서 간섭하시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을 말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영역이 하나로 통합되어져야하는데 있어서, 이에 참여할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간구하고있다.
이는 자기 의지에 의한 도덕과 윤리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허드슨 강에 안전하게 비상 착륙한 조종사의 훈련으로 터득한 노련함과 같이, 끊임없이 반복된 훈련과 자기 개발로 좀 더 노련하고 기술적으로 고도화된 삶의 필요성을 말한다.
이는 인간의 사고에서 출발한 지극히 인본주의적 방식이다.
바울이 기도하는 속사람의 변화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창조 사역에 속한 부분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에 의한 것이다.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마음에 계시는 것은 복음의 가장 놀라운 비밀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의 모든 바탕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마음 가운데 계셔야지만 가능하다.
엄마의 태에서 나온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가장 평안함을 느낀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가족으로 참여되는 영광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가득한 것으로 가득 채워지는 유산을 상속받을 자이다.
이 모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믿음은 축복의 원인이 아니며,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반응이지만, 이는 모든 축복의 출발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소유된 사람이다.
엄마의 소유가 된 아이는 엄마의 품 안에서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가족의 일원으로 자라가듯이, 그리스도께 소유된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면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굳건한 터 위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져 간다.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풍성함은 이 세상의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바울이 편지를 받을 에베소는 웅장한 항구도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하는 아르테미신전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들은 풍요를 상징하는 아르테메 여신을 섬기면서 굉장한 것에 심취되어있던 이들이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에게 전하는 하나님은 그곳의 신전에서는 생각해 볼 수 없는 표현을 한다,
너비 길이 높이 깊이는 하나의 단어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임을 나타낸다.
바울은 성도가, 뿌리를 내려야 할 나무로서, 지어져야 할 성전으로서 굳건한 터를 제공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서, 하나님의 가득한 것으로 가득 채워 지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을 보면 그렇게 충만하게 사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않고, 더군다나 본을 보여주어야 할 목회자들의 부족함을 보면서 별로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육적인 관점에서만 굉장한 것을 느끼려는 인간의 본질적 죄성과 무관하지 않으며, 영적인 것에 굉장함을 느끼지 못하는 죄성을 가진 육체의 한계점이다.
바울이 전하는 이러한 충만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바울과 같이, 철저하게 영적이어야하고, 기도하면서 육체의 소욕을 다스릴 때, 진정 실질적으로 가득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부여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의 인격을 존중하시기에, 구하지도 않는데 일방적으로 부어주시지는 않는다.
성도는 구하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넘치게 부어주실 수 있도록 실질적 행동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지만, 정작 준비가 안된 쪽은 성도들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기에, 성도에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간섭을 하시지 않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실 충만한 것을 마음에 생각하고,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성도의 삶은 교회를 떠날 수가 없다.
현재 교회를 나가지 않는 이들 가운데는 교회 난민들이 많이있다.
난민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상황의 심각성으로 인하여,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는 피해자들이다.
그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을 비난하기에 앞서, 현재의 유형적 교회들이 공동체적 책임감을 느끼면서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를 떠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의 위치는 결코 가볍거나 추상적인 것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에 의해서 우리의 자격이나 위치, 혹은 하나님의 바라심이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존재는 창세 전에 계획하셨고, 택하셨고, 자녀로 삼으셨고, 상속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하셨고, 모든 하나님의 가득한 것으로 채워질 것이 약속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엄청난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육신의 방식으로 이를 이해하려고하며, 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자가 된 거지가, 거지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생각과 습관을 바꾸지 못함으로서 하나님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비록 갇힌 상태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풍요를 자신의 풍요로 누리면서,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바울을 닮기 위해서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기도와 간구로 천상의 삶을 살아갈 때 진정으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풍요를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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