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7. 12. 29. 15:56

에베소서 3장 1-13절 말씀 묵상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듯이, 바울도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갇힌 자가 된 것은,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는 점에서, 나름대로 비슷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바울이 이방인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자신의 삶을 드리셨기 때문에 가능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삶의 본을 보여주신 것은 이 세상 어떠한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비는 하나님의 드려지심과 더불어 사람이 함께 드려지는 삶을 살아감으로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공동체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헌신되어지는 삶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헌신이 없이는 공동체의 확장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특징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다른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인한 은혜를 경험함으로서만 확장되어진다.

이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은혜의 경륜을 따라서, 성도들도 다른 이들을 위한 은혜의 경륜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회복시켜 나가는 것이다.

헌신은 경제 원리를 포기하는것을 전제로 한다.

신앙의 영역은 경제 원리가 적용이 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신앙의 영역이 될 수가 없다.

교회 공동체는 개인의 완성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는 사랑과 순종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도,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요구되어진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나타난 첫 번째 상황은,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의 핑계를 댐으로서 상대방의 희생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영위함으로서, 인간에 새겨진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손상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희생이 없는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특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희생이 없는 교회 공동체는 확장 될 수가 없다.

희생이 없는 교회 공동체의 확장은 진정한 확장이 아니라 변질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실현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세 경륜은 공동체의 운영 원리와 공동체의 경제 원리가 어떻게 통합되었고, 어떻게 실패하였는지를 보여준다.

Mosaic Economy, 혹은 Mosaic Administration은 두 가지 다 모세 경륜으로 번역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경제 원리와 통치 원리가 구분없이 하나로 통합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바울이 받은 계시는 자신의 유대 중심적 사고를 뒤집어 엎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자신의 열심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근거한 허망한 것이었는가를 깨달은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에 참여하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십자가의 비밀이 모든 성도들에게 제대로 알려지기기를 바랬을 것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로 알게 된 비밀은 감추어야 할 비밀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알아야 할 비밀이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이들에게 알려져야 하지만, 모든 이들이 알 수가 있는 비밀이 아니었다.

Secret이 아니라 Mystery다.

Secret은 공유되어서는 안되는 비밀이라면, Mistery는 풀어나아가야 할 비밀이다.

영지주의자들은 몇몇 사람들만 소유한 비밀을 통하여, 자신들을 일반인들과는 구별된 특별한 사람이라는, 우월 의식과 특권 의식에 사로잡히게 했지만, 바울이 계시를 통해서 알게된 비밀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이들이 공유하고 알아가야만 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이 진리는 보편성이 결여되어있지만, 성도는 이를 개인적인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 숨기는 일이 없어야 했다.

성경이 완성된 이 시대에 진리는 성경 안에 전부 담겨 있기에, 성경 외적인 정보를 통해서 성경을 수정하거나 첨가해서는 안된다.

판넨베르크나 그의 영향을 받은 이머징처치는 진리를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미완성으로 보는 것이어서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사해 사본이나 쿰란 문서, 혹은 Q문서등을 통해서 성서에 추가하거나 해석에 수정을 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이러한 문서들을 근거로하는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활동을 통해 성경을 재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들 자료들을 통해서 성경을 재해석하기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이들 자료들을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비밀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유대인만을 구원해주실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중심적 사고 체계에서 이방인이 유대주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생각 할 수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시겠다는 계획을 실현시키셨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생각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바울이 이를 공개적으로 전하는 것은 유대 사회로부터의 핍박을 감수해야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로마에서 신적 권위를 가진 황제에 대한 반역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깨달은 진리는 시대적 위협을 넘어서는것이었기에

바울은 담대하게 이러한 진리를 이방인의 교회인 에베소 성도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교회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는 방량으로 나아가면서, 복음의 진리의 믾은 부분을 제대로 선포하지 못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사도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은 택함받은 자만 알 수 있도록 제한되어있기에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성령으로 알려진바 되었다.

여기서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이후에 성도들은 여러 모양으로 즉 사도로, 선지자로, 교사로, 능력행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다고 지금 시대에도 사도나 선지자가 있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또한 모든 성도가 왕, 제사장, 선지자라고하는 것은 지금 시대에 왕이 있고 선지자가 있고 제사장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혼란이 생긴다.

이는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직책이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키심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와 연합괸 자가 누리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직책을 말하는 것이다.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것은 바로 바울이 수 차례에 걸쳐서 말하는 비밀의 내용이다.

상속자, 지체, 약속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격이다.

에덴에서 아담이 시험의 검증을 통과하였다면 성취되었을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이, 아담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서, 이와같은 형태로 구체화된 것이다.

아담의 타락이 없었더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천국은 승리한 인간의 세계가 되었을 것이며, 인간은 교만하여 결국에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같이 높아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볼 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입은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생각해 본다.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이는 바울의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다.

바울이 큰 자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다.

성도는 어느 누구도 은혜를 입은 자이기에 할 말이 없는 자들이다.

자신의 크기와 능력을 생각한다면, 이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취한, 하나님께서 그토록 질책하셨던, 교만한 모습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성을 아시기에 바울에게조차도 교만하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다.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유혹과 위험이 있다면, 신앙의 영역을 자신들의 성공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이민 교회에서의 장로에 대한 치열한 경쟁은, 이들이 한국에서 높은 지위에 있다가 미국 이민 사회에서 낮아진 지위를 만회하는 수단으로, 장로의 직책에 대한 열망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교만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는 창조된 상위 구조의 영역에 있는 이들이다.

이들도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수밖에 없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종말에 이루어질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과 하위 구조로서의 땅이 연합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성도는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하여야한다.

인간은 부모가 낳았기에 그냥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사냐고 묻거든”이란 주제를 가지고 여러가지 답을 내놓지만, 진정한 답은 영원 전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뜻에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에서의 삶을 누리기 위해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다.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하나님께 나아감)

아담은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의 낯을 피했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피한다.

하나님을 피하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기도 하지만, 본질 자체가 죄인이기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고, 설령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죄인으로 규정된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이유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하기를 원했듯이 인간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바울은 이방인인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유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말한다.

죄인은 그 죄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지만,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나가는 말- 삶의 경영과 경제 원리)

이방인을 위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갇힌 자가 되었다.

자신의 생명과 삶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드림으로서 실제로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지만, 경제 원리로 본다면, 많은 댓가를 받아야하는 행위이지만, 바울은 경제 원리를 넘어서서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삶을 살았다.

경륜은 oikonomia 즉 economy와 administration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원래 신앙의 영역에서는 삶의 경영 원리가 경제 원리와 구분없이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삶을, 택한 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속량 제물로 드림으로서, 자신의 삶의 경제성과 경륜을 동일 선상에 둘 수 있었다.

바울도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께 갇힌 자가 됨으로서, 자신을 운영하는 경영 원리와 경제 원리를 구분이 없이 동일 선상에 둘 수 있었다.

흔히들 모세 경륜을 Mosaic Economy, 혹은 Mosaic Administration, 즉 모세의 통치 원리와 경제 원리를 분리되지 않은 영역으로 다루고 있다.

이와같이 신앙의 영역에서의 삶은 경영 원리와 경제 원리가 통합된 양식으로 이루어져야한다.

그리스도와 바울은 삶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경제 원리와 경영 원리의 통합을 이루었지만, 대부분의 일반 성도들의 삶은 경영 원리와 경제 원리의 단일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자기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다 주께 드림으로서, 모든 성도들과 재산을 공유 할 수 있었는데, 현대인들은 이와 같은 삶을 살 수가 없기에 신앙 생활의 이원화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성도의 진정한 신앙 생활은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서만이 가능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5:37

에베소서 2장 11-22절 말씀 묵상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에베소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합과 질서를 지향한다.

에베소서의 중심은 유대인도 아니며, 역사적 이스라엘도 아니다.

에베소서는 우주 만물뿐만이 아니라, 성도의 모든 관계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시킨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방인의 위치와 상태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과 관점을 표현하여야만 했다.

이는 에베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방인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육체적 관점에서의 유대인에 비추어 본 관점이다.

그렇다고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를 정당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유대인에게는 외인이지만, 유대인들 가운데서 시작된 하나님의 영광의 열매에 참여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 심겨진 유대인의 입장에서 논술을 시작하고자 하는 것이다.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스라엘의 참된 구원은, 이스라엘의 죄성이 어떠한지 드러남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에베소 교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 존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지만, 참된 은혜의 복음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었다.

복음을 듣고 구원에 참여하는 자들은 어느 누구든지 간에 옛적에 자신이 어떠한 위치와 상태에 있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지만, 참된 복음의 은혜에 참여할 수가 있다.

에베소 성도나 우리는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어떠한 정당한  근거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행위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지만,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이를 믿었던 이들에게는 구원이 약속되었던 언약 가운데 있었던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비록 율법이라는 행위 언약 안에 있었지만, 율법의 본질이 은혜 언약이었듯이, 은혜 언약이 약속된 민족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에베소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에 과정적으로 참여된  역사적 이스라엘에 비추어보아도, 철저하게 외인이면서 이방인이었다.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는 말이 중요하다.

에베소 성도가 멀리있던 자들이었기에 가까이 있던 자들인 역사적 이스라엘의 비중이 더욱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합이다.  

멀리있던 자들과 가까이 있던 자들의 통합이 이 시대에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통합으로 발전되고있다.

기독교와 유대교를 통합시키려는 이들은 엉뚱하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축소시키거나 약화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배제하려고한다.

현대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대신학은 기독론 중심에서 신론 중심으로 위치가 이동되고있으며, 신학의 주제도 기독론 중심의 구원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하나님 나라로 주제가 바뀌고 있다.

현대 신학의 이러한 경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독교를 정립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현상이다.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계속되어 왔던 일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이방인들을 배척함으로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지만, 유월절 만찬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고,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막힌 담을 허신 것은, 유대 중심적인 편입과 확장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새로운 건축물로의 통합이다.

예루살렘의 파괴와 이스라엘의 흩어짐을 생각할 때, 막힌 담은 단지 육체적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서, 불순종하는 이들 가운데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에 의한 분열이 끝났음을 말하고있다고 보아야 한다.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새관점의 주장과 같이, 유대인들을 이방인들과 구별되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새관점에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산상수훈이라는 새로운 계명 아래에서 새롭게 통합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산상수훈을 또 다른 율법으로 규정하는 행위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행위 공로 개념을 기반으로한 심판 아래 놓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관점의 해석은, 그리스도가 화평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보다도 지키기 어려운 산상수훈을 주심으로, 더욱 무거운 짐을 지우시는 분이 된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의 본래의 목적은,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이방인들은 이미 자연법이라는 양심의 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정죄 아래에 놓여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진 새 생명은, 육체를 심판 아래에 묶어 놓았던 율법과 자연법의 요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충족되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이 가능한 것이다.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소멸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 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 아담에게 심겨졌던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에서 민족 간의 분열을 하나로 통합시킴으로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로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의 취해야하는 행위는, 서로에 대한 정죄에 의한 분열보다는, 서로에 대한 용서와 기도와 위로를 통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저주를 소멸시킨 것이기에,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를 정죄하거나 저주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사람과 민족 간의 평화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나아가는 것이지만, 인류가 추구하는 평화가 그리스도가 배제된 평화일 경우에는 이것이 또 하나의 바벨탑이 될 수도 있다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그리스도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평안을 전하시는 분이시다.

현대의 민족주의적 분열과 배타주의는 그리스도를 떠난 이들 가운데서 나오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작품이다.

민족주의, 배타주의에 호소하면서 자기들끼리 하나가 되려는 시도는 사단의 좀비로서의 집단 이기적인 행동일 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자하는 평안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를 민족주의적 애국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 24)”고 말씀하신다.

신자는 한 성령 안에 있기에 서로를 원망하거나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

성령은 이 땅의 창조주로서,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구속 언약을 실행에 옮기시는 분으로서,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시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일어난 첫 번째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신자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한 성령 안에서 화목하여야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교회가 확장된 이스라엘로서 하나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방인들도 이제 정정당당하게 하나님 권속이고 시민임을 말하고 있다.

그냥 바울이 선심쓰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성도가 가져야 할 분명한 정체성이며, 이러한 정체성이 기반이 되어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아가야 한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모퉁잇돌이 없는 터는 무너질 수 밖에 없다.

현대의 콘크리트나 빔을 박는 철골 건축 방식은 모퉁이 돌이 없지만, 이전의 모든 건축물은 모퉁잇돌 위에 세워졌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모퉁잇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 건축물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역사적 이스라엘을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로서의 실질적인 건축물로 보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하나님의 의”라는 모퉁잇돌을 사용하고 있다.

톰 라이트가 시도하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통합에는 더 이상 그리스도가 모퉁잇돌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순종의 의가 아닌,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모퉁잇돌로 삼는다.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주 안에서의 성전은 서로 연결된 건축물이다.

성도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를 통하여 성전으로 세워진다.

최초의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이 땅에 세워지는 공동체는 삼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택하신 자들과 함께 세워져 간다.

이스라엘의 패망의 역사에는 개인의 범죄가 어떻게 공동체의 파멸을 가져오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담은 인류 공동체의 대표이었듯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머리이시며, 모든 신자를 대표하시는 분이시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나아감으로서, 아담이 실패한 에덴-성전을 대체하는 그리스도의 몸됨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공동체가 되어져가는 것이다.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령은 창조 주이시며,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시어, 성도를 하나님의 처소가 되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가신다.

불순종의 자녀들은 사단의 뜻대로 이 세상을 파괴해가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간섭하심에 의해서, 최초로 세워진 에덴 성전을 이 땅에 구체화시키고 확장시키는 일을 해야한다.

리처드 미들턴과 같이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기반 위에서 기독교세계관을 주장하는 이들은, 창세기 1:28의 문화 명령을 마태복음 28:19-20의 대위임령보다 상위 명령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변화시키는 문화 명령을 수행함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세워나가야 할 성전은, 창 1:28의 문화 명령을 근거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 가는것이 아니라, 마28:19-20의 대위임령을 근거로 하나님의 성전을 확장시켜나아가는 것이다,


(나가는 말- 교회는 과연 확장된 이스라엘인가?)

톰 라이트는 교회를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을 이방인과 화해시킨 중재자로 본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최후의 만찬을,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서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였던 것에 대한 종료를 선언한 것으로 본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이방인들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본을 보여준 행동 방식이라고 규정한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못박은 사건이 아니라,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에 의해서 못박힌 사건으로서, 로마와 이방인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희생적으로 나아갈 때, 이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유대인들의 희생을 받아주셔서, 확장된 이스라엘 개념의 교회로 재탄생시키셨다는 것이다.

이들이 보는 신약의 교회는 유대교의 변형일 뿐이다.


오늘 에베소서의 본문의 주요 주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해되었다는 내용이 관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화해 개념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화해 개념과는 다르다.

톰 라이트는 유대교를 율법주의 개념에서가 아니라 언약적 율법주의, 즉 율법이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성경을 해석해서 얻은 결론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모임을 통하여 1세기의 “제2성전 유대교”에서의 역사적 자료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얻어낸 결론이다.

하지만 그는 일부 자료에만 치중하여 편협된 해석을 함으로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해석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가 확장된 이스라엘로서의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개념이 상실된,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의를 근거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로 인해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확장된 교회의 모퉁잇돌은 더 이상 그리스도가 아니시다.

홀로코스트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시도인지, 톰 라이트는 새관점을 통해서 유대교와 기독교를 하나로 통합시키려는 시도를 하려고 하지만, 이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오랜 통합의 노력이 실패하였듯이, 실패 할 수밖에 없는 무리한 시도다.

기독교는,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같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그 피로 인한 죄 사함과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의인이 되었다는 전가 교리와,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개념이 배제된다면, 더 이상 기독교일 수가 없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5:36

에베소서 2장 1-10절 말씀 묵상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은 자)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죽은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범죄한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상태에서 살아갔던 시간을 살아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면, 육신을 입은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되면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과 우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죽었다고 말하는 바울의 말이 틀린 말이 된다.

에덴 바깥에서의 아담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신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자라고 말해야할 것이다.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고 오랜 시간을 더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이는 영적인 생명과 육적인 생명을 동일시하는데서 나온 결론이다.

선악과를 먹은 날 아담의 육적인 생명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영적인 생명은 상실되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은 일차적으로는 영적인 생명이며, 육적인 생명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바빙크가 부차적인 육적인 생명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육신이 살아있었기에 하와의 후손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원시복음이 이루어질 수 있었음을 말하고자한 것이다.

영적인 생명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바빙크가 말하는 생명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여,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화란개혁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자들과 달리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종의 의지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바빙크의 생명에 대한 언급을 확대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바빙크가 말하고자했던 것은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한 구속에 대한 것이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날 죽었다고 보아야지만,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바울의 말이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은 사실상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생명이 없는 육신natural body으로 변화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그들이 육신이 됨으로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창 6:3).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아담이 창조 당시에 아담이 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적인 몸spiritual body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된  육신natural body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 즉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하늘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육신으로는 보이지 않는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로서의 하늘이다.

영적인 몸으로 창조된 아담은 에덴에서 천상의 세계를 공유하였으며, 동산에서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에덴은 영적인 몸을 지닌 아담이 하나님의 왕권으로, 제사장, 선지자로서 영적인 권위를 행사하였던 곳이다.

동산에서의 생물들은 아담의 영적인 권위에 복종하여야만 했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명령하는 다스림의 대상  가운데에는 "모든 생물"이 포함되어있다.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 가운데 가장 간교한 자인 뱀은 창세기 1장 28절에서 아담에게 다스리라고 명하신 생물(창 1:28)들 가운데 한 가지였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생물”과 창세기 3장 1절에서의 “짐승”은 동일한 어원을 가진 같은 히브리어 “חַי chay: 살아있는, 생존하는”로서 아담은 분명 왕의 자격으로 간교한 뱀을 다스리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반역자와 더이상 함께 하실 수가 없으셨다.

에덴에서의 아담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함으로서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을 지닌 자였지만,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 생명이 상실된 육신을 지닌 자가 되었다.

이러한 몸의 변화는 생명의 상실, 즉 죽음이었기에, 아담은 범죄한 날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은 사탄의 다스림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은 다스려야할 영적인 생물에게 다스림을 받게된 것이다.

즉 육신이 되었다함은 그 소욕으로 인하여 사탄의 다스림을 받는 죽음을 뜻하며, 바울은 이에 대하여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허물과 죄로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간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생명이 있는 영적인 몸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지만,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인생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다.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것은, 아담으로 인한 죄의 형질의 유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사회적 속성에 의하여 집단적인 악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강령decree에 의해서 인간이 죄인으로 규정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아담의 체질은, 땅이 저주를 받은 것과 같이, 영적인 몸spiritual body에서 육적인 몸natural body로 변한 것이다.

영적인 몸은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를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지만, 육신은 천상의 세계와 분리된 체질적인 한계를 가진 몸이 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본다면, 변화된 체질의 유전이라는 어거스틴의 설명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시기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음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바로 죽음이다.

아담의 죄를 전가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있는 모든 인간은,  파멸의 길로 향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생명이 없는 인간의 행위는, 인간이 보기에는 선한 것 같아도, 하나님보시기에는 악할 뿐이다.

생명이 없는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이 죽어있는 상태라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며,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벗어날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때,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생명의 선물을 받으려고 손을 뻗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는 구원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율법 앞에서 이스라엘이 사실상 죽은 존재임이 증명되었듯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서 죽은 존재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율법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보다는 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듯이, 하나님의 자연법 앞에 모든 인간은 죽은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패망하고나서야 그리스도의 구속의 손길이 다가왔듯이, 인간은 자연법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있는 모습이 드러남으로서 비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에 다가 갈 수 있는 것이다.


성도가 경험하는 다양한 역경들 가운데에는, 아직 죄성을 가진 육신이 고발되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담겨있음을 생각해보아야한다.



(살리셨다)


살아난다는 것은 죽었던 자에게만 적용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원리는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은 원리와 동일하다.

죽음과 삶은 전가에 의해서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설명하였던 것과 같이, 유전적인 방식만으로는 아담의 죄성이 모든 인류에게 옮겨진 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된 아담의 체질이 후손들에게 유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도 있지만,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강령에 의한 죄인으로의 규정은 전가 교리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3중 전가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 되었다.

두 번째는, 택함받은 자의 죄가 그리스도께 전가 되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의가 택함받은 자에게 전가 되었다.

질서 가운데 움직이는 창조 세계와 달리, 사람들이 사는 사회의 부정적 현상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전가 교리가 유일하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이 어둠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아니고는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성경은, 이 세상에 들어온 죄와 죄 가운데 죽은 인생에 대하여, 설명해주는 유일한 말씀이다.

하지만 성경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인간이 죽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펠라기우스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새관점에 이르기까지 인본주의 신학은 전가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를 전가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는 아담의 죄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암묵적으로 종결된 것으로 주장한다.

아담의 죄의 종결은 처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이 되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아담의 죄와는 관계없는 일종의 혁명적 행동방식이 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며, 일종의 새로운 삶의 행동 방식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의 죄성의 근원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인 죄가 아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죄를 말할 뿐이다.

새관점에서는 인간이 끊임없는 노력과 반복된 연습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새관점에서 보는 아담은, 단지 인간에게 안좋은 본을 보여준 인물에 불과하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은, 아담을 본받지 말고 예수를 본받자는 것이다.

인간이 영향을 받은 것과 전가되어 죽은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영향을 받은 자는 단순히 삶의 방식만 고치면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능력이 있는 자라는 것을 전제로한다.

예수를 믿음의 대상이 아닌 따름의 대상으로만 본다는 것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서 행할 능력이 있는 살아있는 존재임을 전제로한다.

새관점에서 보는 예수는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묘사되지만, 에베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는, 예수를 죽은 자를 살리신 분으로 기록하고있다.

톰 라이트가 보는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아니기에,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묘사될 수도 없다.

톰 라이트가 보는 허물과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 우월의식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배타적인 행동으로 인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극히 이스라엘 중심적인 해석이다.

복음은 삶의 교훈을 전해주는 소식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을 전해주는 소식이다.

성도의 삶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개선하거나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삶의 주체가 되셔서,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는 것이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인간은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 살아가는 어느 종족이나 신을 섬기지 않는 종족이 없다.

어떠한 인간의 종교도 죽음의 문제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신을 섬기는 행위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표면적인 현상일 뿐이다.

그 보다는 아담의 타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아담의 불순종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이라는 존재 가운데 누구를 따를 것인지에 대한 선택적 결정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서 자신을 지배하는 세력에 대한 정권의 교체와 같은 일종의 쿠데타였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아담이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영적인 몸을 입었지만,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는 아담이 육신이 되었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셨다(창 6:3)

그리스도의 부활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영적인 몸으로서의 부활체가 어떠하신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아직 육신에 제한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이미 영적인 몸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될 영적인 몸으로 변화될 것에 대한 약속의 징표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지 않는 육신이 된 인간은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살 수밖에 없지만, 아직 육신에서 자유할 수없는 성도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의 소욕은 인간의 본능이라는 말로 객관화시키기도하지만,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것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게 종속된 것이다.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아직은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거듭난 성도는 변화된 사람이기 이전에 섬기는 주인만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의 변화는 성도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택에 의한 것이다.

성화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동이 아니라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행동 방식이다.

인간은 육신을 입고 있는 한에는 성화를 통해서 변화될 수 없다.

선택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을 입고 있는 한에는 육신의 소욕에서 자유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게서 완전히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성도라 할지라도 육신이 죽은 날, 즉 살아있는 동안에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과 끊임없는 영적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영적 전쟁은 자신의 외부의 상황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다.

보통 개혁을 외치면서 외부의 환경과 싸우는 이들이 종종 불미스러운 일로 인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작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신을 입고 있는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사단의 좀비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죽어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이들은 사단의 종으로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다.

육신을 좇는 이들 가운데서 볼 수있는 표면적인 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일반은혜가 없다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종속되는 지옥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일반은혜는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특별은혜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문화를 개혁하거나 환경을 개혁하려는 이들은 종종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을 상실하고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우매함에 빠지기도한다.

아담의 범죄는 단순한 불순종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서 사단의 종으로의 신분의 변화다.

신분의 변화가 없는 행동의 변화는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중세 로마 카톨릭의 실패는 신분의 변화가 없는 행동의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실패의 원인이 인간이 노예의 신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은 신분의 변화가 없이는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에게서 자유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았기에 인간의 의지를 노예의지라고 표현하였다.

행동방식의 변화를 통해서는 성도가 될 수가 없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을 하여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공중 권세 잡은 자보다는 고수가 될 수가 없다.

육신을 입은 성도는 그 육신의 소욕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

더 이상 두 주인을 따를 수 없는 자이다.

성도는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 살 수있을 뿐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하였던 것은 사단의 종인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의의 열매도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중 권세잡은 사단의 좀비 역할을 하는 인간의 문화의 종국은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특별은혜를 위해서  파멸로 치닫는 것을 늦추고 있을 뿐이다.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받은 복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복음을 받은 이들의 이전의 상태가 어떠하였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있다.

복음은 일종의 죄인에게 최적화된 맞춤형 말씀이다.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 신학자들이나 현대인들이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은 죄에 대한 인식에 있다.

인간이면 누구나 인간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라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인정하기 싫어한다.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차이는, 인간이 죄를 짓는 이유를 규정하는데서부터 차이가 난다.

어거스틴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가 유전적(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강령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고있지만)으로 전가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체질을 가지고있다고 규정하는데 반하여,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이 사회적 속성을 가지고있기에 사회 구성원들의 죄를 모방하고 영향을 받아서 죄를 짓는다고 규정하고있다.

이러한 차이는 죄를 짓는 원인이 내부에 있느냐 아니면 외적 환경이 있느냐의 차이이다.

죄를 짓는 원인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이를 해결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죄를 짓는 원인이 인간 내부에 있다면, 복음은 본질적 죄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며, 죄를 짓는 원인이 외적인 환경에 있다면, 복음은 외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수단으로 해석될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에베소의 그리스도인이 죄인이었던 때의 상태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고 말한다.

육체는 인간이 지니고있는 몸 자체를 말하기에 인간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가 없으며, 인간은 육체의 욕심에 종속되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있다.

결국 인간은 육체의 노예이며, 육체에 종속된 존재이기에, 육체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노예 의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외적인 환경들은 내적인 상태가 외부로 드러난 결과들일 뿐이다.

문제에 대한 원인적 접근이 없는 현상적 해결책은 그 때 뿐이며, 오히려 상태만 악화시킬 뿐이다.

문제에 대한 원인적 접근은 본질 자체에 대한 것이기에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동물들은 각기 그 본성에 따라서 움직이며, 각기 그 종들의 특성을 드러내면서 살아간다.

죄성을 가진 인간의 행동 방식도 본성을 따라가는 동물과 한 가지이다.

개가 개답지 않게 행동할 수 없듯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움직이는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질 자체가 죄인인 특성을 드러내면서 육체의 소욕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개가 자기들의 특성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가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기 이전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성을 지니고있다.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갓 태어난 어린 아이라도 하나님의 특별 은혜에 의한 선택이 없다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녀임을 알 수 있다.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들의 행동 방식은 어떤 민족보다도 우월한 시민 의식을 보여주는 행동이었지만, 그들의 행동 방식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자신들의 본질적인 악을 가리기 위하여 무덤에 칠하는 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들의 행동 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이들의 죄성을 고발하며, 이들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접근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느 유명한 교회의 목사님은 도덕적인 본을 보여주며 욕심을 내려놓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있지만, 그곳에 모여든 교인들은, 그가 전하는 복음이 도덕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복음이라는 사실을 인식을 하지 못하고있다.

교회가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해서 사회의 지탄을 받고있는 이유로 교회가 도덕적인 본을 보여주는 것이 일차적인 본질이 되어서는 안된다.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죄인임을 고발하고있다.

이는 도덕적인 행동의 유무에 관계가 없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하실 수 있으셨던 것은, 이들이 죄없다 생각하는 바리세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죄를 고백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질적 죄를 가리려는 목적의 도덕적인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길 원하신다.

인간이 본질적 죄인인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고는 그 원인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인간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회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본질적인 죄임임을 고백하여야만 한다.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는 회개를 전제로한 신앙고백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고백을 말하고있다.

현대신학자들이 말하는 회개에는 자신이 본질적 죄인은 아니지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를 하나님께 고백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는 바리세인들이 행하려는 선행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참된 고백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즉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육신의 소욕을 쫓아서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아담의 죄에 동참한 본질적 죄인임을 고백하여야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않고는, 인간에게는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거부하며 살아갈 수있는 능력이 없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누구나 다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고있기에, 자신의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 고행을 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적선을 하거나, 선행을 하기도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는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다스릴 수는 없다.

거듭남이 없는 온갖 종류의 수행이나 선행은 또 다른 육신의 소욕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참된 거듭남은 자신에 대한 주체가 바뀌어야만 한다.

모든 인간에게 아담의 죄가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하나님 나라일 뿐이다.

수련을 통한 윤리 도덕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어느 종교에나 있다.

인간이 아무리 수련과 연습을 해도 그 주체는 죄성을 가진 자신일 뿐이다.

거듭난 자는 자신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이며, 자신의 삶의 주인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다.

성도의 삶은 내주하시는 성령이 주장하시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이 될 때, 윤리와 도덕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열매맺는 성도의 삶은 에덴에서 아담이 받은 명령을 다시 실행하는 삶이 아니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명령을 이 땅에 선포하는 삶이다.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은 이들은 더 이상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아담이 받았던 명령을 수행 할 수가 없다.

창세기1장 28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종식되었으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

아담이 처음 받았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한 명령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육신의 소육을 쫓는 사단의 종을 생육하고 번성시킬 수 밖에 없는 체질의 변화를 가져왔다.

성도라 할지라도 죄성을 가지고있는 육신을 입고있다.

육신이 된 인간에게, 문화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같이,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한 문화변혁운동이 성도의 과제가 될 수도 없다.

아담의 후손들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은 항상 악할 뿐이었기에, 세상에는 악이 가득할 수 밖에 없으며, 이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을 쌓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녀를 많이 낳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노아 홍수와 더불어,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하여 물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듯이,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심령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진노의 자녀들이 될 수밖에 없다.

성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자신이 본질적인 진노의 자녀임을 외면하고 도덕을 쫓아가는 모든 인간들은, 아무리 도덕과 선행으로 자신을 포장한다고 하더라도,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들이 본질적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더 나은 복지 사회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하나님을 배제하고 사단의 종노릇하는 현대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종국에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심판을 받게 되어있다.

성도의 참된 신앙생활은, 행동 방식의 개선을 넘어서, 본질적인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해주는 복음을 전하는 일로 귀결되어야한다.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본능적 속성에 속하여있다.

자녀가, 부모가 왜 나를 사랑할까 고민할때, 답은 자녀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데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한다.

긍휼의 사랑은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에 대한 사랑하심이기에, 자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한다.

응답하지 않는 행위는 스스로 자녀임을 포기한 것이기에 더 이상 하나님께도 책임이 없으시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1절의 내용이 반복되지만 그리스도가 추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율법의 요구인 저주를 충족시키고, 종결시킨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율법의 요구와 저주가 없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최종적으로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신 말씀은 아담의 후손에게 요구되었던 죄값을 다 치루셨다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자로서, 더 이상 첫 번재 아담의 후손에게 요구되었던 저주가 더 이상 요구되어지지 않는다.

은혜는 신자에게 거져주어진 속량에 의한 죄사함이다.

그리스도께서 대신 갚아주신 것이다.

이는 톰 라이트와 존 파이퍼의 “칭의 논쟁”의 핵심 주제이다.

톰 라이트는 새관점을 대표하고 존 파이퍼는 개혁주의를 대표한다.

새관점에서는 죄인에 대한 선고는 전적으로 재판관 재량에 달려있기에 누가 대신 죄값을 지불함으로서 무죄 선고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재판관이 무죄 선고를  하는 근거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아브라함과 약속한, 하나님의를 근거로 한다.

개혁주의를 대변하는 존 파이퍼는 죄인의 죄값을 그리스도가 대신 갚아주셨기 때문에, 죄인에게 더 이상 죄를 물을 수 없기에, 무죄 선고가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신자의 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개혁주의는 신자의 의가 전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에서는 개혁주의의 주장을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

새관점은 의도적으로 그리스도를 배제시키고 있다.

신자는 자신의 죄값을 지불하신,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값주고 사신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새관점의 주장대로라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시다.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종말에 이루어질 신자의 최종적인 위치는 놀라운 것이다.

보통 노예를 값을 지불하고 살 경우, 노예에게는 단지 주인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노예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경의 비밀은 값주고 사신 종을 더 이상 종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녀로 부르시면서,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위치를 부여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며, 성도는 모든 세대에 걸쳐서 이를 증거해야한다.

이를 증거하기 위해서 신자에게 요구되는 이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성화의 과정이 요구된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인간의 반응일 뿐이기에, 믿음이 구원을 얻어내는 행위에 속할 수가 없다.

믿음은 단지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기 위해서 손을 뻗는 행위에 불과하다.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행위- 공로)


최근에 새관점의 경향을 보이는 김세윤 교수를 비롯한 몇몇 신학자들은, 믿음에 행위가 추가되어야지만 최종적 구원에 이르게 된다면서, 인간의 행위적 책임을 강조하지만, 이는 구원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전적인 선물이라는 관점에 상충되는 개념이다.


또한 메튜 베이츠Matthew Bate는  믿음보다는 행위가 포함된 충성allegiance으로만 최종적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메튜 베이츠는 그리스도로부터 의를 전가받았다고하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의 문제가 있으면, 최종적 구원에서 탈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바울은 행하는 것과 믿은것, 그리고 성취하는 것과 받는것을 대비시키몀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충성은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의 행위의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이 기준이 되어야하기에,  인간적 관점에서 보이는 충성이나 선행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이나 선행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인간이 보기에 아무리 충성된 행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한 가지 방식의 행동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요구하시는 행위는, 인간 스스로의 생각에서 출발된 충성된 행동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개념과 관련이 있어야한다.


모든 인간은 이미 불순종의 아들로서, 구원을 위한 순종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에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매튜 베이츠가 새롭게 제시하는 충성allegiance의 개념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마찬가지로 제2성전 유대교의 문서를 근거로한 것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지만, 모든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 분리되어 영적으로 죽어있는 신분이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이를 행할 능력도 없다.


구원에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적 형태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에, 톰 라이트나 메튜 베이츠가 주장하는 바와같이, 행위의 부족함으로 최종적 구원이 상실된다는 개념이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공로에 의지하여 구원을 완성하려고 하지만, 이는 인간이 보는 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희망 사항일 뿐, 순종하고는 관계가 없다,


알미니안들은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된다고 말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제한함으로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손상을 입히는 개념이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새관점이 은혜의 복음이라고 말하지만, 이들이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요구하는 선행은 인간을 다시 행위 구원론으로 집어넣는 이론이다.


인본주의 신학들은 어떠한 형태이든간에 한결같. 구원을 위해서 인간의 행위를 요구한다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가 지음받은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는 마땅한 행위이다.

교인들이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5:35

에베소서 1장 15-23절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주 예수 안에서)

성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성도들의 외적인 요소나 상황이 믿음을 넘어서서 작용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실은 외적인 요소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위에 작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교회는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외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져야한다.

사람의 외적인 요소들이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의 사랑과 교제를 넘어서는 요인으로 작용 될 때는 교회의 변질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

교회의 성도들이 과연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서로 배척하고, 파벌을 조성하고, 자기 중심적인 교회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많이 경험하게된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의 공동체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본다.

에베소 교회도 어느 정도는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부족함을 넘어서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았고, 그 가운데 더 많은 결실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다.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교회의 부정적 요소들로 인하여 교회에 대한 식상한 마음은 결국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약화시키게 된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보여준 것과 비교할 때 우리는 과연 얼마나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감사했는가?

선교지역에서는 박해를 무릎쓰고 목숨을 걸고서 교회를 세우려고하는데, 한국의 현실은 교회가 너무 많이 생기면서 변질되고 왜곡된 교회가 일반화되면서, 교회의 중요성과 교회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식어버린 것이  현실이다.

교회는 오직 세상의 박해 가운데 깨끗해질 수 있기에,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상실해가는 과정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상황 가운데에서도,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교회는 복음으로 다시 일어서게되며, 부정적 상황을 통하여 죄를 깨끗게 하는 복음을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바울의 에베소 교회에 대한 격려의 말은 모든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게 해주는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이러한 위로와 격려는 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형제들에게도, 또한 모든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은혜의 말이 될 것이다.


(중보 기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위해서 기도한다.

일종의 중보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중보 기도가 논란이 되는 것은 중보자의 기도와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성도는 바울과 같이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다.

중보자는 수직적인 관계에 있지만, 중보 기도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중보 기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마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위치 문제 때문이다.

모세가 중재자가 되어 백성들을 위해서 하였던 기도는, 구별괸 제사장이 있던 제도하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후에 모든 성도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되었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이 회복되었다.

성도에게는 더 이상 모세와 같은 중재자가 필요하지 않다.

성도가 하는 중보 기도는 중재자의 위치에서가 아니라, 회복된 제사장의 직분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수평적 관계에서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지혜와 계시의 성령은 우리의 육적인 능력 위에 계신다.

인간적인 이성과 논리로는 성령의 도우심을 알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성도는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지혜와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아가는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성령은 창세 전 구속 언약에 참여하신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분으로서, 이 땅에서 창세 전에 예정된 이들 가운데 역사하시어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가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이러한 성령을 경험하도록 늘 중보 기도를 해왔다.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마음의 눈)

성도들이라도, 눈이 어두운 상태에 있는 경우가 있다.

소망이 무엇이며,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크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신앙 생활을 할 수도 있다.

마음의 눈이 떠져서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경험 할 때 신앙생활은 많은 변화를 가져 올 수 밖에 없다.

교회의 많은 부정적 요소들은, 교인들이 아직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눈이 떠지지 않았기에, 이 땅에서 잘못된 것들을 구하는 과정 가운데 일어나는 것들이다.


(부르심의 소망)

일차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주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은 창세 전 구속 언약에 근거하여 이 세상에서 택하신 자를 사용하셔서 택하신 자를 부르신다.

먼저 부름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마음의 눈을 뜨고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한다.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성도가 기업을 물려받는 것은, 처음 아담 가운데 약속되어진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에 의지하여, 받게되는 것이다.

성도에게 물려줄 영광이 풍성한 기업은, 원래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 예정하신 것이다.

이를 우리에게 알게하심은 이 땅에서 사는동안 소망 가운데 힘을 얻게하시려는 것이다.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능력의 지극히 크심)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세상의 어떠한 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능력이다.

세상은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려고한다.

세상의 힘은 파괴적이며, 권위적이며, 배타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은 세상 것과 같지 않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은 죄의 권세를 압도한다.

목을 곧게 세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이는 단지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한 것이다.

진정으로 힘이 있는 자는 머리를 숙일 줄을 안다.

성도의 힘은 세상과 부딪치는 힘이 아니라, 그들을 수용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사랑하며, 희생 할 줄 아는 힘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만물이 교회는 아니다.

최초의 성전인 에덴은 만물과 구별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었던 곳이다.

성전으로서의 에덴과 에덴의 바깥은 구분되었듯이, 교회와 만물은 구분이 된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성도 개개인보다는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있다.

지금은 교회가 비록 세상의 걱정이 되고,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세상에서 변방에 속하여있지만, 교회는 궁극적으로 만물 위에 우뚝 세워질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가 세상과 아무런 경계가 없이 확장되어나가서는 안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택함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비록 유형적 교회는 불신자의 방문에 대하여 배타적일 수는 없지만, 교회 자체가 불신자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같이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미셔널 처치, 혹은 미션얼 처치라고 부르는 선교적 교회는 교회 자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흩어지는 교회의 형태를 취한다.

선교적 교회는 우주적 교회를 지향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우주적교회를 지향하는 선교적 교회는 만유내재신론적 성향을 내포하고있다.

선교적 교회는 칼 바르트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에서 출발된 WCC의 교회 형태이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세상과는 구별되어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은 신자들의 모임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선교적 교회나 톰 라이트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동력으로 사용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의 신론 중심적 교리는, 그리스도의 기독론을 배제함으로서 보편구원론적 성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전통적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이원론적으로 배타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 세상은 모두 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구속을 받는 하나님 나라로 구분되어야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이다.

교회는 이러한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다.


(나가는 말)

왜 성도는 교회 공동체로 모여야 하는가?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고 개인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겠지만 왜 모여야하는가?

교회는 처음부터 공동체적으로 시작되었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은 아담 안에서, 성전으로서의 에덴 공동체로 시작되었듯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전으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시작된 것이다.

교회는 관계성과 공동체성의 완성이며, 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표현이다.

이 땅에서의 교회 공동체는 위험과 희생을 요구되지만, 성도는 하나님께서 본성 안에 새겨넣으신 공동체성을,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가는데 기울여야 한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5:34

에베소서 1장 7-14절 말씀 묵상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짐으로서,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을 수 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역사적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이루어진 상태로 보고있다.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 것은, 새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거하기 위한  인간의 의가,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가 아닌, 성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개념은, 원래 불트만 학파의 케제만이 주장하였던 것으로서, 톰 라이트는 이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신실하게 이행하셨다”는 의미의 의라고 말한다.

새관점에서는 역사적 이스라엘 자체를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보고있으며, 교회는 단지 확장된 이스라엘이라고 보고있다.

이는 역사적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같은 속성을 가진 공동체로 보고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과는 관계없이, 새관점에서 말하는 은혜는, 성부 하나님만의 은혜이다

새관점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단지 이미 주어진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었는데, 이들이 이미 주어진 은혜 안에 머무르는데 실패한 이유는, 이들에게 주어진  음식법과 할례법을 이방인들과 구별하기 위한 민족적  우월주의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원래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선교적 공동체로 세워졌는데, 이들이 선교적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만보더라도 새관점에서 말하는 역사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의 피가 없이도 구원받은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새관점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를 배제하려는 유대주의적 색체가 농후한 발상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많은 새관점주의자들이 유대인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했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제공해주고있다.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죄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것으로서, 일종의 율법이 요구하는 값을 지불함으로서 율법의 요구에 마침표를 찍으신 것이다.

에덴에서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죽음의 요구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불순종의 요구로서의 죽음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나시어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신 것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요구에 대한 값을 치루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은 에덴에서의 순종의 요구와 가나안에서의 순종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심으로 더 이상의 사망의 요구를 잠재우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에덴에서의 순종의 요구로서의 아담 언약과, 가나안에서의 순종의 요구로서의 시내산 언약은 동일하게 행위 언약의 범주에 속하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비슷한 속성을 갖는 것은 둘 다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의 피는 속죄가 아닌 다른 뜻으로 해석 되거나, 혹은 구원론의 변화를 가져 올 수 밖에 없다.


(속량 곧 죄 사함)

그리스도의 구원은 속량의 개념이 있기에, 이스라엘의 출애굽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새관점에서는 출애굽을 이스라엘의 구원 사건으로 보고있으며,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을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광야에서의 시험이 요구되었으며, 불순종에 대한 속량 개념이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에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심으로서, 더 이상의 시험이 요구되지 않는다.

새관점주의자들이나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게는,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듯이, 시험이 요구된다.

이와는 달리 성도에게 요구되어지는 행위는, 구원을 위한 시험이 아니라, 마땅한 열매로서 요구되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열매가 없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보다는, 구원받은 자의 증거라는 관점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구원은 죄의 결과와 죄의 요구와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이다.

죄의 요구와 속박은 인간의 죄성과 욕심과 관계가 있기에, 사는 동안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사단과의 영적 전쟁으로 말미암아 계속적인 시험에서 이길 수가 없다.

죄 사함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에는, 성령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구원에서 탈락되는 일이 없다.

속량은 죄에 대한 것이기에, 성도는 죄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있어야한다.

속량의 일차적 결과는 죄사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잠정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렇게되면,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무의미한 것이된다.

대신에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상을 표현하는 로마와 어떻게 싸워나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삶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으로 대체한다.

개혁주의에서는 아담 안에서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것을 말하지만, 새관점에서는 아담의 죄를 무시함으로서,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모든 지혜와 총명)

구원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은 택함받은 신자에게 제한된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복음의 비밀을 알수 있다.


(비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누구나 알 수가 있지만, 복음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알 수가 없다.

복음은 행위를 요구하는 표면적인 모세 율법의 내면에 담겨있다.

복음은 율법이 진정 말하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자에게만 열려있다.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에 속하여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다.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 언약의 표면적인 속성만을 보았기 때문에 비밀에 가리워있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진 본질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인간이 경험하는 자연법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구원의 은혜는 표면적으로 주어진 율법이나 자연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나 자연법은 정죄를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유대인들에게 감추어졌던 비밀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관계없이, 믿는 성도는 하나의 공동체로 완성되어, 하나같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된다는 것으로서, 당시 유대인에게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에 있는 것)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천지로 표현되는 하늘과 땅은 상위 구조upper-register와 하위 구조lower-register를 가리킨다.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며, 천사들이 있는 곳으로서 눈에 보이는 하늘과는 구분된다.


(땅에 있는 것)

땅은 육에 속한 하위 구조로서 여기에는 눈에 보이는 하늘도 포함된다.


(통일되게 하려 하심)

하늘과 땅, 모든 피조계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구속되는 것이 예정되어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세상의 종말에 완성될 모습이다.

초림에서는 민족 간의 경계를 없애고, 재림때는 상위 구조upper-register로서의 하늘과 하위 구조lower-register로서의 땅을 하나로 통일 시키는 것이다.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은 예수의 재림 때에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과 하위 구조로서의 땅이 연합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 되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서 태초에 창조하신 하늘과 땅이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의 연합으로 통일될 것이다.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일을 성도들 가운데 행하실 때, 특히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일하신다.

이스라엘의 부정적 상황을 통해서 인간의 죄가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필요로 하였듯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녀는, 아담의 자손으로서의 죄를 드러냄으로서, 구원의 손길을 뻗으신다.

성도는 부정적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부정적 상황을 고치려는데 온 힘을 쏟아붓다가 결국 자신도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곤 한다.

현대문명은 인간이 뿌린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려는데 온 힘을 쏟아붓지만, 결국은 자신들이 만든 또 다른 부정적 상황에 함몰되곤한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 상황은 내면 세계의 부정적 요소의 산물일 뿐인데도, 현대 문명은 결코 원인이 되는 내면적 접근을 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 상황은 그 뿌리가 인간의 내면의 죄성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표면적인 문제 해결은 결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될 수는 없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부정적 상황을 통하여 내면의 죄가 드러남으로서, 비록 표면적으로는 멸망하였지만,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 될 수 있었다.

인간 사회의 부정적 상황은 결코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는 그 현상적 상황에 말려들어서는 안된다.

신자는 다만 주어진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 역량 밖의 상황에 까지 들어가려고하면 안된다.

이는 마치 토네이도 속으로 들어가서 바람을 잠재우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예정)

신자는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뜻에 따라 택함을 입은 존재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존재에 대하여 고민하여왔지만, 영원 전에 삼위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하심이라는 관점에서의 인간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있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다.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현재적 존재를 인지적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들이 해석하는 성경은 경험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이러한 방식은 창세 전 구원을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정하심 가운데 섭리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지 않고는 해석되어질 수가 없다.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

복음은 일차적으로 구원에 관한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

현대에 들어와서 신학의 뚜렷한 변화 가운데 한 가지는 구원론 중심의 기독론에서 신론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구원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면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시대적 인물로 취급받는다.

구원론에서 신론으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분야로는 신칼빈주의, 신정통주의, 새관점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의 본질은 구원론이다.

구원론이 배제된 이들의 신학은 결과적으로, 택함과 예정이 배제된, 만인 구원론쪽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음)

인치신다는 것은 약속에 대한 보증이면서 동시에 소유에 대한 권한을 나타내는 것이다.

믿는 것과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은 성령의 인치심의 결과물이다.

성령의 인치심으로 믿음을 갖는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의 표시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이들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 할 수가 없다.

신자는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사실을 믿게끔 인치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새관점에서는 믿음도 구원의 근거가 아닐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치심의 결과물도 아니다.

이들이 보는 성령의 역할도 구원의 약속과는 관계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단지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일 뿐이다.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기업의 보증)

기업은,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선악과 명령과 창조명령(창 1:28)이 완성되었을 때 주어질 예정이었던 종말론적인 축복과 영생에 대한 것이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아담이 실패 한 것을 다 이루셨기에,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명령을 다 이행한 것으로 간주되어, 영원한 축복과 영생을 기업으로 얻게된다.

이는 성령이 보증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마치 서류에 도장을 찍음 것과 같이 성령 하나님의 보증을 나타낸다.

보증이 되심은, 아직 우리가 죄의 육신 가운데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지을 수 밖에 없는 죄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에서 떨어질 것에 대한 염려를 없애준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알게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게 인도하심으로서, 구원받은 자로서 이땅에서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시는 보혜사이시다.


(나가는 말)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떠한 것도 무의미한 것은 없다.

긍정적인 요소든, 부정적인 요소든, 삼위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두 다 필요한 상황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기에, 역사적 이스라엘이 겪었던 부정적 상황과 같은 유형의 부정적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

다윗이 겪은 부정적 상황과 눈물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동력이 될 수 있었듯이, 성도들이 부딪히는 부정적 상황은, 성도에게 꼭 필요한 연단의 과정일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금을 제련 하듯, 연단한 후에 정금같이 사용할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어려운 환경을 충분히 감당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에베소서 2017. 12. 29. 14:51

에베소서 1장 1-6절 말씀 묵상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간의 비전)


바울의 사도직은 본인의 선택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으며, 바울은 단지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한 것 뿐이다.


이는 간접적으로 바울의 편지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비전과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자기 생각에서 출발한 열심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자기의 일일 뿐이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자신의 비전을 품었지만, 이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생각에서 출발한 열심 가운데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기의 일인 경우가 있다.


얼마 전 성추행 물의를 일으켰던 J 목사가 항상 외쳤던 말은, 젊은 이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비젼을  품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기가 속한 분야에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방식이고 인간의 욕심이며, 하나님을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바울의 경우와 같이, 철저히 인간적인 꿈과 인간적인 자만과 인간적인 능력이 무너지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여서 할 수 있다.


유명한 신학자들과 저명한 목사들이 나름대로 성공하였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이다.


이들의 학문과 목회는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복음은 보편화 될 수 없는 소수를 위한 것이다.


참된 신학과 참된 목회에는 성공이라는 용어를 적용할 수가 없다.


신앙의 영역은 꿈을 이루거나 비전을 품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은 고난의 길임을 생각해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된 바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는 자로서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에, 바울은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다.


교회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마음 아픈 것 가운데 하나는, 담임 목사가 강대상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고 바울을 목사라고 칭하면서 목사의 직책을 사도와 동등하게 만들면서, 강대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사람 혼자만의 발상이 아니라, 목사들을 대상으로 목사교를 만드는 훈련과정에서 배운 이들이 공공연하게 써먹는 방법이다.


결국 교회는 내전을 겪었고, 오랫동안 몸담았던 많은 성도들이 난민이 되어 교회를 떠나는 것을 보면서, 자칭 사도라 칭하는 목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악독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사도라는 용어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말이기에, 누구의 보냄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에, 이미 말씀이 주어진 이 시대에 어느 누구도 자칭 사도가 될 수는 없다.


만약에 자신을 사도라고 부른다면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기의 말을 덧붙이는 자로서, 자신이 이단임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도행전은 28장에서 끝난 것이지 29장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아버지)


구약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부를 수 있는 명칭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개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성도의 신분을 말해준다.


백성은 왕과의 관에서 친밀감의 한계와 관계성의 막연함을 보여준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용어는 사용해도 자녀나 아버지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새관점이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그리스도와의 연합 개념이 성립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성도의 자격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신비 가운데 한 가지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이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역에는 가까이 갈 수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며, 궁극적으로 성도로 하여금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의 영역에 들어오게끔 하는 것이다.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구속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으로서 삼위 하나님의 긴밀한 공동체에 참여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만 참여될 수 있는 영역이며, 그렇다고 성도가 신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걸맞는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이 성도에게 주어졌다고 성도가 그리스도와 동등해 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우리의 주인이시다.


주(퀴리오스)는 어디까지나 종이 주인에게, 혹은 신하가 상전에게 사용하는 용어로서,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위임한다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신 종에 불과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종으로서 부르지 않고, 자신과 연합된 자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셨다.


이는 이 세상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놀라운 축복으로서 성도로서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평강)


평강은 전쟁이 그친 잠시동안의 샬롬의 상태를 말한다.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싸움에서 잠시만이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가 있다.


평강은 계속된 영적인 전쟁을 위한 막간의 휴식이며, 충전이다.


세상 사람들은 술에 취하거나, 취미 활동을 하거나, 여러가지 방법으로 삶을 충전하지만, 성도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인하여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주일 예배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대표적인 평강 가운데 한 가지다.


주일은 성도가 누려야 할 평강의 날이다.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 모인 교회의 성도는 어떠한 세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목회자는 주일에 모인 성도들에게 평강의 시간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으로 성도로 하여금 이 땅에서 평강을 누릴 권리와 자격을 주셨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자가 없다.


그리스도는 길이시며, 진리이시며, 생명이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부 하나님과 성도가 연결될 수 있는 통로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구조는 그리스도가 없이도 구원에 머무를 수 있는 구조다.


새관점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아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율법이 은혜의 구원 안에 머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머무른다는 것은 이미 구원의 구조 안에 들어와있다는 말로서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구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없어도 성립되는 구조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예수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우월주의로 인해서 은혜 안에 머무름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은혜 안에 머무를 수 있는지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준 모델로서의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처음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의해서, 택함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되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되는 것이다.


신령한이란 말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이라는 말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는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시기 전인 역사적 이스라엘을, 이미  이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로 보는 새관점은 신령한 복으르받았다고 할 수 없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은 자이기에, 구약의 소수의 믿음을 가진 이들 이외에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고 말 할 수 없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창세 전 영원 가운데 택정함을 입은 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요구되지 않는다.


창세 전 택정함을 입은 이들은 오직 하나님께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 맡기신 이들이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구원을 받은 이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성도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성도가 받는 구원은 현재적 환경에 의한 즉흥적인 구원이 아니며, 성도의 의지에 의하여 선택되어진 것도 아니며, 오직 창세 전에 미리 계획된 삼위 하나님의 택정함을 근거로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찰스 핫지는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창세 전 구속 언약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언약적 연합federal union이 성도의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실제적 연합actual union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The Trinity and the Covenant of Redemption, J. V. Fesko, loc1995)


택한 자에게 요구되는 거룩함과 흠이 없음은 구원을 위한 선행 조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신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영원 가운데 결정된 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택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이 땅에서 행하여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고난은 성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할 수 없이 성자 하나님께서 감당하신 것이 아니라, 택한 자를 사랑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담겨있는 사랑의 표현이다.


창세 전 구속 언약의 중심에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택함받은 자의 중재자가 되신 것은 이미 영원 가운데 성부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근거를 두고있다.


이미 창세 전에 택정함을 받은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할 수도 없고 무흠할 수도 없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는 중재자도 아니시며,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자는 있지도 않았으며, 오직 출애굽한 유대인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교회는 단지 확장된 유대이스라엘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언약적으로 연합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 앞에서의 중재자로 보지 않는 새관점주의자들은 받은 은혜를 행위로 유지함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이 되려고한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떠난 죽은 육신이 되었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을 만큼 거룩하고 무흠할 수는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인간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육신이 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서부터 출발된 인본주의적 사고의 산물일 뿐이다.


새관점의 논리에서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아들 하나님이 아니라 따름의 본을 보여주는 유대 혁명가일 뿐이다.


창세 전 구속 언약을 인정하지 않으며, 성도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위격을 손상시키는 새관점주의자들은 결과적으로 이단의 판단의 기준이 되는 삼위일체의 개념을 손상시키는데까지 이르게된 것이다.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택한 자를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들이 되게하심은 창세 전에 있었던 구속 언약의 내용이다.


구속 언약은 창세 전 영원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결정된 세분 하나임 간에 약속이었으며, 이러한 약속은 인간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예정된 택한 자에게만 제한되는 것이며, 택함을 받은 예정된 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들로 양자 삼으신 것이다.


(기쁘신 뜻)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법정적 개념에는 자칫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따스한 성품이 결여되기도한다.


어떤 이들은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사건을 자녀에 대한 학대라고 표현하기도한다.


하지만 창세 전에 택한 자를 구속하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은 삼위 하나님께서 모두 기뻐하심으로 결정하신 것이다.


창세 전에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은 마치 아이를 낳기 위하여 준비하는 부부와 같이 기쁨 가운데 준비되어진 것이다.


남녀가 결혼하여 낳게 될 아이에 대한 기쁨은 삼위 하나님의 기쁨에 대한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낳기 위한 산모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고통의 그림자이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와에게 잉태하는 고통이 더해진 것도 그만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고통을 알게하기 위한 것이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잉태의 고통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담겨있는 존재이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은 아이가 갖는 자존감과 같이,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이 땅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이 고통스럽고 비천하다고 하더라도, 자존감까지 손상되어서는 않될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담겨있는 존재이기에, 이 땅에서의 삶이 결코 허무하거나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에, 삶을 결코 헛되게 살아서도 않되며,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성도는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의 기쁘신 뜻 안에서 구원받은 자이기에,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는 가장 부요한 자이다.


(우리를)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제한되어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되어있는 이들은 모든 이들이 아니다.


더군다나 레위 자손의 제사장을 중심으로 모인 유대인들도 아니며, 오직 멜리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 그리스도가 제사장이 되시고 중재자가 되심으로, 믿음을 고백함으로서 구원에 참여된 이들로 제한된다.


예정된 이들은 모두가 아니며, 유대 이스라엘도 아니다.


모세는 중재자였지만 제사장이 될 수가 없었다.


새관점을 주장하는 제2성전 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택함받은 자들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 하나님의 제2위격으로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주어지는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제2 위격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나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만린 구원론적 방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은 오직 믿음의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로 제한된다.


(예정하심)


성도에게 현재의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무계획적으로 상황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다.


모든 일들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의 부패와 타락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부패한 자가 자기 길을 가도록 내어버려두셨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패를 그냥 내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간섭하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에정론을 거부하는 이들은 아담의 타락에도 하나님의 책임이 있으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마치 결함이 있는 차를 리콜하듯이, 아담의 타락에 하나님의 책임이 있으시기에, 이에 대한 후속 대책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한다.


그렇다고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책임이 있으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는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을 지닌 인격체이다.


인격체는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간섭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자신의 결정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


아담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적 존재이기에,  아담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이 있는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존재였다.


인격적 존재의 결정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결정이었기에, 자신이 선악과를 먹고자 결정했을 때 간섭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의 형상의 인격적 속성의 상실을 가져왔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어 육신이 된 인간은 더 이상 자유 의지가 없는 사단의 종일 뿐이다.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사단에 종속된 존재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타락하여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그들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들의 걸음을 인도하심으로서, 주의 기쁘신 뜻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인도를 하신다.


성도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이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인간에게 스스로의 행함의 결정권이 있다고 말한다.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고백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노예 의지를 강조하였다.


노예 의지 상태에 있는 이들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상황에 따라서 즉흥적으로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시기에, 인간의 행함과 공로에 영향을 받으셔서 그들의 행함을 보시고 구원을 결정하시지는 않으신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고,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구원의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지만 이는 모두 인간의 노예 의지를 강조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상반된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강조하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신앙고백이 되어야한다.


새관점주의자들이 종교 개혁자들에 대하여 비난을 서슴치 않는 이유 가운데 한가지는 노예 의지 개념에 대한 반발이 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행함으로 유지함으로서 최종적 심판에서 최종적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행함으로 완성시킨다는 인본주의적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행위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과 구원 사역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기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전가 교리를 거부하는 새관점주의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양자 삼으신 것은 영원 가운데 그리스도를 아들로 지명하심으로 성도를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하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수가 없다.


영원 가운데 예정된 성도는 이미 영원 가운데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federal union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경륜적 구속 사역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연합actual union이 일어난다.


이 모든 일은 영원 가운데 성부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메시아이신 성자 예수님께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자는 영원 가운데 약속하신 구속 언약을 근거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주체적 행위가 들어갈 공간이 없다.


인간의 주제적 행위를 구원과 연관시키는 자리에는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다.


성경의 모든 구속적 경륜은 영원 가운데 약속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 하기에, 영원 가운데 아들로 지명을 받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될 수없다.


새관점의 문제는 인간의 구속에 그리스도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관점에서의 그리스도는 단지 행동의 본을 보여준 혁명가일 뿐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구원을 주장하는 어떠한 논리도 영원 가운데 맺어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근거를 하고있지 않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 구원을 주장하는 인간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스스로 교만한 자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임을 알지 못할 뿐이다.


(아들들이 됨)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시편 2:7-8)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 삼으셨다.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삼위일체 개념에 혼돈을 가져오기도한다.


인간적인 생각에 아들의 존재는 아버지보다도 한 단계 뒤이기에, 시간 상 아버지만 존재하고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아리우스는 아들인 그리스도가 태어난 자라면 성부 하나님의 존재의 시작에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기에, 창조된 자로서 아버지와 아들인 그리스도가 동질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말씀은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삼위 하나님의 결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 지명되셨음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경륜적 삼위일체로서의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 하셔서, 둘째 아담으로 모든 택함 받은 자의 맏형이 되셨지만, 존재론적 삼위일체로서의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성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셨음은 전적으로 택한 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기 위하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지명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구속 사역을 감당하신 것은 택한 자를 아들 삼으시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비천한 육신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 너를 낳았도다라고 하신 말씀은 영원 가운데 약정하신 구속 언약 가운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으셨음을 말하고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처음 아들인 아담을 대신하는 둘째 아담으로서의 아들되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되심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자신의 피조 세계에 들어오셔서 창조를 완성하시기 위함이었다.


성부 하나님은 처음 아담의 아버지이셨지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더 이상 육신이 된 인간의 아버지가 되실 수가 없으셨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 안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렸지만, 택함을 받은 자들은 다시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한 것이며,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이다.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로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을 자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순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창세기 1장 28절의 지배 명령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스림으로서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아담과 그의 후손에게 유업으로 주시기 위함이었다.


처음 창조된 아담은 아들로 창조되었지만 불순종하여 아들의 자격을 상실하였기에, 더 이상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불순종한 아담이 낳은 후손들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육신일 뿐,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실행할 능력이 없는 존재들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어야했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둘째 아담 그리스도의 대표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세되었다.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이 된 성도들은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다스릴 것이다.


인간이 육신 안에서 경험하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유산을 물려주는 일들은 육신에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들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자식 이외에는 존재를 기뻐하고 유산을 물려주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고 아들 삼기 위해서 기쁨 가운데 구원하시는 고통을 감당하셨다


택함받은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인식하면서 성화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아이가 부모의 자녀가 된다는 것에는 어떠한 조건도 있을 수가 없다.


아이는 태어났다는 자체로 부모의 기쁨이 되며, 아이는 부모를 기쁘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은 어떤 인위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부모에게 기쁘게 달려가는 아이가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면 된다.


부모가 자신을 기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는 부모를 충분히 기쁘게 해 줄 수 있다.


우리는 자녀와 같이, 아무 공로도 없이 은혜를 입은 자들이기에, 그리스도로 의의 옷을 입은 이들은 마땅히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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