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7. 12. 29. 15:58

에베소서 3장 14-21절 말씀 묵상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한글로는 족속으로 번역되어있지만, 이는 혈통이나 가문에 비중을 든 가족의 의미를 가진다.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왕적인 통치권이 있음을 의미하면서도, 하나님의 왕권은 가족적인 의미가 크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종이었던 택한 자들을 속량하시고, 종의 신분에서 자녀의 신분을 부여해 주셨다.

하나님의 왕권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아버지라고 부룰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셨다는 관점에서는 자녀이면서 동시에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상속권을 부여받는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은 동물들에 대한 왕적인 통치권이 아담에게 있음을 의미하였지만, 이들이 아담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브라함, 사라, 이스라엘, 바울등의 이름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에서 시작된 삶을 의미하면서, 삼위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이들을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족속, 즉 가족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가족에게까지도 이름을 주심으로서 땅에서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 대한 통치권과 주권을 선포하고 계신다.

하늘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상위 구조Upper-register로서 하나님이 계시면서 하늘의 영들이 있는 곳이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비밀은 이방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뿐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역으로 인해서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함으로서, 더 이상 하늘의 권세에서 추방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권세에 전적으로 복종하면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에베소 성도들도 하나님의 풍성한 것으로 가득 채워져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의 견고한 터 위에서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원해서이다.

바울의 기도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바라면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성령의 능력)

성령의 능력은 창조의 능력이다.

첫 창조때 성령께서는 혼돈의 수면 위를 운행하시면서 이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에덴의 유형으로서의 가나안으로 인도 하셨다.

성령께서는 솔로몬 성전을 뒤덮으시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셨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강림하시어 성도들 가운데 임하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셨다.

성령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에게 임하셔서, 이들을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하시는 분이시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심으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풍요를 누리게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한 것이다.



(속사람)

신비주의는 속사람의 변화가 없이 신적인 것을 경험하려고하다가 문제가 생긴다.

속사람은 관상기도에서 말하는 내면의 불꽃이나 신적인 신성한 영역이 아니다.

관상기도에서는 사람의 존재를 플라톤적 이원론으로 해석함으로서, 사람의 겉은 부패해 있으나 내면 깊숙이 있는 속사람은 신성하고 거룩한 영역으로 규정하고서, 관상 기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속사람의 세계 속으로 심취해 들어간다.

하지만 관상 기도를 통해서 들어간 내면 깊숙한 세계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전혀 다른 세계다.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요한, 토마스 머튼이 말하는 내면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예수는, 실제의 예수라고 할 수 없다.

관상 기도를 통해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면, 모든 종교에 공통적으로 있는 관상 기도를 통해서도 다같이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토머스 머튼은 일본의 선불교 지도자와 교제를 나누다, 추진된 방콕에서의 세계종교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감전 사고로 죽기도하였다.

로마카톨릭은 1962년부터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타종교와의 대화의 통로로 관상기도를 택한 것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가 않다.

관상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왜곡시키는 개념이면서,  동시에 성경에는 어디에도 이러한 방식의 기도를 권하지는 않는다.

관상기도는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누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바울 사도의 제자(행 17:34) 디오누시오라고 잘못 생각한 위(僞)디오니시우스의 영향으로 중세 수도원중심으로 기독교에 깊숙이 들어온 잘못된 기도방식이다.

바울이 말하는 속사람은 인간의 위선적인 외적인 면이 아닌,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면으로서, 성령께서 간섭하시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을 말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영역이 하나로 통합되어져야하는데 있어서, 이에 참여할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를 간구하고있다.

이는 자기 의지에 의한 도덕과 윤리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인의 미덕”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허드슨 강에 안전하게 비상 착륙한 조종사의 훈련으로 터득한 노련함과 같이, 끊임없이 반복된 훈련과 자기 개발로 좀 더 노련하고 기술적으로 고도화된 삶의 필요성을 말한다.

이는 인간의 사고에서 출발한 지극히 인본주의적 방식이다.

바울이 기도하는 속사람의 변화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창조 사역에 속한 부분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에 의한 것이다.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마음에 계시는 것은 복음의 가장 놀라운 비밀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의 모든 바탕에는 그리스도께서 성도의 마음 가운데 계셔야지만 가능하다.

엄마의 태에서 나온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가장 평안함을 느낀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가족으로 참여되는 영광을 누리면서 하나님의 가득한 것으로 가득 채워지는 유산을 상속받을 자이다.

이 모두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믿음은 축복의 원인이 아니며,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반응이지만, 이는 모든 축복의 출발이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소유된 사람이다.

엄마의 소유가 된 아이는 엄마의 품 안에서 엄마의 사랑을 받으며 가족의 일원으로 자라가듯이, 그리스도께 소유된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면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굳건한 터 위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세워져 간다.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께서 주시고자하는 풍성함은 이 세상의 어떠한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바울이 편지를 받을 에베소는 웅장한 항구도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하는 아르테미신전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들은 풍요를 상징하는 아르테메 여신을 섬기면서 굉장한 것에 심취되어있던 이들이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에게 전하는 하나님은 그곳의 신전에서는 생각해 볼 수 없는 표현을 한다,

너비 길이 높이 깊이는 하나의 단어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임을 나타낸다.

바울은 성도가, 뿌리를 내려야 할 나무로서, 지어져야 할 성전으로서 굳건한 터를 제공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서, 하나님의 가득한 것으로 가득 채워 지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을 보면 그렇게 충만하게 사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않고, 더군다나 본을 보여주어야 할 목회자들의 부족함을 보면서 별로 실감을 느끼지 못한다.

이는 육적인 관점에서만 굉장한 것을 느끼려는 인간의 본질적 죄성과 무관하지 않으며, 영적인 것에 굉장함을 느끼지 못하는 죄성을 가진 육체의 한계점이다.

바울이 전하는 이러한 충만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바울과 같이, 철저하게 영적이어야하고, 기도하면서 육체의 소욕을 다스릴 때, 진정 실질적으로 가득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부여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의 인격을 존중하시기에, 구하지도 않는데 일방적으로 부어주시지는 않는다.

성도는 구하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넘치게 부어주실 수 있도록 실질적 행동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모든 것이 준비되어있지만, 정작 준비가 안된 쪽은 성도들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기에, 성도에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간섭을 하시지 않으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실 충만한 것을 마음에 생각하고,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에 성도의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성도의 삶은 교회를 떠날 수가 없다.

현재 교회를 나가지 않는 이들 가운데는 교회 난민들이 많이있다.

난민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상황의 심각성으로 인하여, 떠돌아 다닐 수 밖에 없는 피해자들이다.

그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을 비난하기에 앞서, 현재의 유형적 교회들이 공동체적 책임감을 느끼면서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교회를 떠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는데 있어서 치명적인 어려움을 겪고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의 위치는 결코 가볍거나 추상적인 것이거나, 막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에 의해서 우리의 자격이나 위치, 혹은 하나님의 바라심이 바뀌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존재는 창세 전에 계획하셨고, 택하셨고, 자녀로 삼으셨고, 상속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하셨고, 모든 하나님의 가득한 것으로 채워질 것이 약속된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엄청난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육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육신의 방식으로 이를 이해하려고하며, 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자가 된 거지가, 거지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생각과 습관을 바꾸지 못함으로서 하나님의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비록 갇힌 상태에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풍요를 자신의 풍요로 누리면서,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바울을 닮기 위해서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기도와 간구로 천상의 삶을 살아갈 때 진정으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풍요를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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