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장'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1.26 :: 사도행전 10장 34-48절 말씀 묵상
  2. 2018.01.25 :: 사도행전 10장 17-33절 말씀 묵상
  3. 2018.01.24 :: 사도행전 10장 1-16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18. 1. 26. 19:00

사도행전 10장 34-48절 말씀 묵상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생각의 경계를 넘어선 베드로)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열정이 있었던 제자였는데 아마도 그의 열정은 예수를 유대 민족의 해방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직접 지상명령(마 28:19-20)을 말씀 하신 것으로 인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생각은 이를 넘어서지 못했다.

베드로의 열심과 열정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열심은 민족적이고 폐쇄적인 집단 이기주의로 발전 될 수도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집단 이기주의 안에서 폐쇄되려는 속성이 있다.

이는 인간이 가지는 열심과 열정의 한계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집단의 폐쇄성을 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인간에게서 이러한 열심이 나올 수가 없다.

이제 베드로에게는 자신에게 임한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열심을 넘어서 하나님 중심적인 열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온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외형보다는 중심을 보신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질 수가 있었다.

고넬료에게는 유대적 외형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는 생각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이방인 고넬료와의 만남은 베드로의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열심에 대한 전환점을 제공해준다.

성도는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의 교회만을 위한 사람이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화평의 복음)

고넬료의 집에 모인 무리들을 본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이스라엘만의 주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주이신 것을 세삼 깨닫고서 화평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넘어서 모든 민족과의 화평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닭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과연 모든 이들과의 화평을 주시는 말씀일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화평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규명해준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늘과 땅의 화평이며, 이를 근거로 성도들 안에서의 화평이 확대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53)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화평은 세상과의 분쟁을 초래할 수도 있다.

복음은 세상과 화평을 말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평화의 메세지는 로마에 대한 민족적 무장 반란이라는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로마라는 세상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희생되어야하는지 본을 보여준 것이며, 예수는 유대인이 아닌 로마에 의하여 처형된 것이라고 보는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메세지는 그의 속죄 사역과 관련되어야 한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던 하늘과 땅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화평의 물꼬를 튼 것이다.


인간은 얼마든지 평화를 외칠 수 있지만 그리스도가 배제된 평화는 바벨탑만 쌓을 뿐이다.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기름 부으심)

예수께서 기름 부으심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대한 왕권을 선포하시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가 폭력에 반대하는 메세지를 선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라는 정치적 해석을 한다.


예수에 대한 정치적 해석은 해방신학자들이 선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이들의 전유물이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의 왕권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땅을 모두 다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 적용되는 구속 영역과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적용되는 통치 영역으로 구분하여 접근하여야 한다.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톰 라이트는 예수가 로마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처형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저주하면서 죽였다는 것을 증언하고있다.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수가 로마에 대하여 항거하는 방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이는 지극히 유대주의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이다.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사십이라는 충만한 숫자만큼이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 불신자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신 것은 그들에게 증거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아무 한테나 증거되어서는 안된다.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재판장이신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불신자에게는 심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을 전하는 것이다.

죄와 심판에서 자유 할 수 없는 신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죄사함은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나온다.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는 종교개혁자들 뿐만이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모든 이들이 깨닫는 진리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를 싫어하는 톰 라이트는 특이한 해석을 한다.

라이트는, 이스라엘은 잘못된 행동 방식 때문에 포로 생활을 하였으며,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을 종식시키는 만찬이었으며, 예수의 십자가는 포로생활에서의 해방이 선언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한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행동방식, 즉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와 싸우는 방식으로서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희생적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여기를 참조하라)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가 결단을 요구하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만으로 성령이 임하셨다.

성령 강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에 대한 증거이다.

전도나 설교는 인간적인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결단을 촉구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며 성령의 강권적 역사에 의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만이 이 땅에서 증거되고 선포되기를 원하신다.

오히려 많은 지식과 철학이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들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사역을 증거했던 이들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었던 것과 같이 할례받은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한 증인이었듯이, 말씀을 받은 우리들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어야한다.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방언은 인간의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표현이다.

방언은 연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받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외적인 응답으로서의 세례)

고넬료의 집에 모인 무리들이 모두 다 성령 세례를 받고서 이에 대한 응답으로 베드로가 세례를 주었던 것은, 세례는 외적인 교회 구성원의 일원이 되었다는 승인의 개념으로서 시행된 것이었다.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응답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할례를 행하였듯이 할례와 세례는 같은 면과 다른 면이 공존한다.

할례는 율법과 같이 언약에 대한 응답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기 위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할례를 받았다고 모두 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성도의 응답으로,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징표로 받는 것이지만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적인 교회가 전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라면 세례는 외적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조건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조건이 될 수도 있겠지만, 외적인 교회와 구원을 동일시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물세례와 구원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로마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페더럴 비전은 외적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지만 구원에 참여될 수 잇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아직 조직이 안되어있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법 규모가 큰 집단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 교수(1968-1983)였던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의 후예들로 구성되어 2003년 어번 에버뉴 장로교회Auburn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시작된 페더럴 비전은 구원의 조건으로 로마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성례로서의 세례를 들고 있다.

페더럴 비전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매우 유사하며, 새관점이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여야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으로 혼탁한 현 시대에 외형적 교회를 대하는 성도에게는 어느 시대보다도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정립이 필요한 때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25. 22:08

사도행전 10장 17-33절 말씀 묵상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환상에서 성경으로)


지금은 성도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점진적으로 알아가지만 성경이 기록되지 않은 사도시대에는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의적 의지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불가능하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에, 성도가 성경을 보고 깨달은 것이 사도시대에 성령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 못지 않게 하나님 나라 확장으로 이어져야한다.


하지만 인간은 내재되어있는 죄성의 수동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도는 적극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베드로가 본 환상 못지 않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삶의 현장에 적용해야한다.


성령께서는 오늘날 성도가 읽는 성경을 통해서 시기 적절하게 상황 가운데  인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이 완성된 시대에 더 이상 직접적인 환상을 통한 계시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신적 계시를 받으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 직접 경험를 통해서 계시를 받으려는 인간의 욕심과 죄성에서 나온 것이다.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하나님의 섬세하심)


상황 가운데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하심과 깊으신 배려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커다란 그림과 잘 조화를 이룬다.


환상을 보지 않았고 성령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상당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고넬료쪽에서만의 환상으로는 베드로를 설득하지 못하였을텐데 양쪽의 상황 가운데 시공간을 넘나들며 간섭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창조주로서의 세밀함으로 보려주시고 있다.


성령께서는 상황뿐만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셨기에 베드로의 생각과 상황의 전개를 구체적으로 간섭하실 수가 있으셨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면서도 세심하고 은밀한 깊은 생각까지도 다 아시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를 존중하시기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시지 않으실 뿐이다.


인간이 느끼는 평안이 하나님께서 나의 세심하고 깊은 것을 모르실 것이라는 안심에서 올 수도 있다.


안심과 평안은 구분되어야한다.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를 악용해서는 안된다.


심판 때에는 인간의 가장 깊은 것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결산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를 악용하는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조차도 보려고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살아간다.


고넬료와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에 전달된 하나님의 복음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에게는 심판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경계를 넘게하시는 하나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사회 관습에 묶여있다.


가끔 이러한 관습이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만 하기에 성령의 강권적인 간섭하심이 필요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면서 동시에 복음이 어떻게 유대인의 배타적인 틀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전파될 수 있었는지를 전하고 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성령의 직접적이고 강권적인 말씀이 없이는 진행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금한 유대인의 법을 어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령이 강권적인 간섭하심이 있었기에 이방인이 구원에 참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가두어 놓는 관습적인 틀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자손으로서 이기적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에 소속되어있기에 성도는 이러한 틀을 넘어서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5)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복음 전파의 매개체)


이방인인 고넬료가 유대 온 족속의 칭찬을 받았다고하는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연결될 수 있는 자연법적인 일반 은총의 영역이다.


특별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말씀이나 환상은 일반 은총을 기반 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베드로가 전하는 특별 은총으로서의 말씀은 일반 은총을 매개로 하여 전파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 즉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나라와 특별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두 나라에 동시에 속하여 있는 백성이다.


잘못된 이원론적 개념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나라까지도 사단의 영역으로 배척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자연법적인 상식과 일상을 배타적으로 생각하면서 상식과 자연법을 쉽게 무시하고 어긴다는 것이다.


이는 복음 전파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고넬료는 자연법과 상식을 존중하였기에 유대 온 족속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다.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방인과의 교제가 금지되어있었음에도 베드로 뿐만이 아니라 욥바에서 온 형제들도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강권적 역사와 더불어 일상에서 베드로가 신뢰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별한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증인들이 필요했다.


복음은 공동체적 구원을 지향하고 있기에, 분리적 관습을 틀을 넘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같이 도움이 될 수 있는 형제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고넬료가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이방인에게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다.


고넬료에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고넬료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고넬료의 행동은 복음이 유대인의 장벽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이었다.


공동체의 확장을 위해서는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매개체가 꼭 필요하다.


분열된 사회에서 분리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인물은  양쪽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이되어야 한다.


한쪽을 무시하는 인물은 복음 전파의 통로가 될 수 없다.


사회법을 무시하면서 그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목사는 사회에 복음을 전파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성도는 사회에서 복음 전파에 대한 의무와 사명을 가져야하지만, 이는 사회법을 존중하면서 사회에서 존중받고 영향력을 끼칠 때 가능한 것이다.


사회에서 지탄받는 이들은 복음을 전파 할 수 없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자신들의 폐쇄된 세계 속에서 자기들끼리만 만족하는 교회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엎드리어 절한 것은 베드로가 신적인 존재라는 것보다도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기에 너무도 반갑고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방인이고 로마의 군인으로서 유대인에게 절을 하는 것은 로마법에도 크게 위배되었을 수도 있으며, 로마인으로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넘어서야 한다.


사회적 지위와 능력이 신앙의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미치는 경우 종종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목회자가 사회적 능력이 있는 성도에게 인간적인 기대를 할 때는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신앙의 영역에서의 성도의 교제는 목회자나 성도나 모두 사심과 욕심을 내려놓고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넘어설 때 진정한 열매가 맺혀지지만, 현실의 교회 생활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어떠한 이유에서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렸든 간에 서로에 대한 과도한 높임은 결국 성도의 교제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특히 교회에서는 박사나 교수와 같은 사회적 칭호를 붙이며 서로를 높여주는 행동을 조심해야한다.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상식과 자연법을 넘어서야 할 때와 넘지말아야 할 때가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언급한 어떤 목사의 “사회법 위의 영적 제사법이 있다”는 주장은 전혀 적절하지 않은 독선이다.


사회법을 어기면서 건물을 지은 것도 문제이지만 건물을 크게 짓는 것은 영적 제사법에 전혀 적용될 수 없는 비상식이다.


성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외적인 건물이 제사를 드리는 건물이 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큰 건물은 욕심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건물이 커야한다는 것은 일종의 우상 숭배의 수단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위법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것도 아니며 자연법도 아닌 폐쇄적인 민족적 관습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법은 자연법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 관계이다.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


사도행전의 역사는 분명하게 성령의 새창조 역사이며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행보로서 하나님의 작정하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주제는 양립이 불가능하면서도 양립하고 있는 것이기에,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게 지으신 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라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 인격체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인간은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 안에 상실되었던 인격이 회복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존중해 주신다.


성도의 기도는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구현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회복되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가끔 보면, 하나님께서 다 예정하셨으니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인격체로 존재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기도는 성도의 인격적 표현이며,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성도를  인격체로 대해주신다는 하나님의 반응이다.


하나님 나라는 신인협력으로 확장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대한 인격적 신뢰이면서 또한 인격적 순종을 위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지만, 고넬료의 기도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문을 연 중요한 통로가 된 것이다.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가 데리고 온 이들은 베드로 앞에 선 이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선 이들이다.


이들은 베드로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하여 듣고 싶어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모인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모인 성도들의 무리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성도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교회 모임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나, 윤리에 관한 것이나, 교회 건축이나 행동 양식에 대한 것이 주요 주제가 될 때는 교회의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회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도가 말씀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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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018. 1. 24. 19:00

사도행전 10장 1-16절 말씀 묵상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넬료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역적으로 유대 이스라엘에 가까이 있으면서 하나님을 경험 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넬료로서는 자신이 로마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사랴에 근무를 했었기에 복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주어진 환경이 비록 고향과는 먼 곳이었지만 이곳이 고넬료에게는 축복의 기회였다.

삶의 환경 가운데 종종 이방의 지역에 있거나 낯선 곳에 사는 것이 복된 환경이 될 수도 있음을 보게된다.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는 비록 자신이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었지만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지만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넬료가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불의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넬료와 같이 전략적 요충지인 가이사랴에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이나 백부장이 되기까지는 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인간의 잔혹함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부정적 모습보다는 긍정적 모습을 기쁘게 여겨서 고넬료를 복음 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백 가지 의를 행하여도 한 가지 불의를 행하면 죄인이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아마 고넬료 옆에서 고넬료를 잘 아는 사람은 고넬료의 이중적인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정적인 것을 문제 삼으시지 않으신다.

가장 부정적인 것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서로의 부족한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밖에 없지만 성도는 이러한 것에 묶이기보다는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할례받지 않은 경건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것은 할례받은 유대인 중심적인 사고에서 크게 벗어난 사건이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상식을 파괴하는 고넬료의 사건은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새창조로 인하여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더 이상 유대적 이스라엘에 제한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지금도 할례받은 유대 민족주의 중심의 메시아 사상에 깊이 빠져있는 유대적 시오니즘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사고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아서 고넬료가 경험한 환상은 매우 구체적인 환상으로서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에 있는 천사가 이땅에 나타난 것이다.

이 땅은 비록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천상의 영역과 분리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새창조로 인하여 다시 이 땅이 천상의 영역과 구체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본다.

이는 마지막 심판 때, 즉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늘과 땅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서 구현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하나님께서는 능력있는 자는 그 능력에 맞게 사용하신다.

고넬료가 사회적 능력과 영향력이 없었다면 이와같이 사용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막연히 가진 자에 대한 반감이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에 대한 적대감은 옳지만은 않은 것이다.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베드로가 드리는 기도와 상황은 베드로의 상황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상황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작 자신이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하는 지를 알 수가 없었다.

시간과 상황이 하나님 안에서 적절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주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하심은 사람의 생각과 상황 위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행동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든지 사단의 종이든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이다.

베드로도 사도 시대의 특수한 상황을 살아가면서도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방식에 대하여 몰랐듯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께서 종말을 어떠한 방식으로 마무리해 가실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의의 길로, 사단의 종은 사단의 종노릇하면서 멸망의 길로 가게되어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삶과 행동 방식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이 온전하게 실현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며,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드리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지 몰랐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베드로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것과 같이 신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자신 가운데 이루고자하시는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자세로 기도에 임해야 한다.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에게 속되다고 생각하였던 것들을 접아먹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배타적인 장벽을 무너뜨리라는 말씀이다.

네 발 가진 짐승과 공중에 나는 것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분명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기는 것으로는 뱀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봐도 잡아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단순한 거부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큰 보자기 안에 있는 짐승들은 모세 율법에 부정한 것들이었다.

유대인으로서의 베드로에게 부정한 것에 대한 거부는 베드로가 아직 모세 율법에서 자유하지 못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대 민족은 거룩이라는 구별을 통해서 성별된 공동체였던 것이다.

부정한 동물을 잡아 먹으라는 하늘에서의 소리는 모세 율법의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음식법을 넘어설 것에 대한 요구였다.

특히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던 베드로에게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것은 베드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할 베드로가 넘어서야할 장벽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의 형태를 띤 모세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은혜 언약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되듯이,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듯이, 모세 율법과 복음은 배타적이거나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위해서 자신들이 이전에 가졌던 유대주의적인 사고를 복음 안에서 완성시키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세상에 대하여 속되다고하는 배타성은 알 속에 머물기 원하는 정신이며, 엄마 뱃속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비록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생명체는 스스로 독자적인 길을 걸어야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가지는 죄성 가운데 한 가지는 스스로의 세계 안에 머물면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이다. 

신앙인은 자신이 소속된 가정과 집단과 민족의 틀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교회의 일원으로서 화합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나아가야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서,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배타적인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해야한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모세 율법의 틀 안에 머물고 있던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선포되어지는 틀을 수용해야 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육적인 틀, 즉 혈연 학연 지연, 그리고 민족적 틀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서야할 장벽들이다.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있던 막힌 담을 허무시는 것은 이제는 새언약의 시대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의 마지못한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움직임은 베드로의 생각이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할례받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던 것은(갈 2:12) 이방인이 깨끗하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유대민족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모세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세워지는 과정에서 가나안 족속에 대한 배타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소유한 성별된 민족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은 전혀 화합될 수가 없는 두 진영이 동시에 움직이게끔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었다.

어느 한쪽만의 움직임으로는 쉽지 않지만 양쪽 모두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의한 과정을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즉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녀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방인에게까지 확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확신시켜주신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유대인을 넘어서는 인류 모두에게 향하여있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것이다.

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서로에 대한 미움과 공격으로, 나라와 민족이 서로 분열되는역사 가운데 있다.

나라와 민족이 서로 화합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글로벌 시대여도 이웃 민족과 친해지는 것은 쉽지가 않다.

공동체의 회복은 외적인 국가간의 화합이 아니라 신자들을 중심으로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한다.

공동체의 원형인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새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것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에서 공동체적 회복을 통하여 하나의 하나님 나라로 시작된 것이다.

구원은 개인적일 수도 있겠지만 구원의 본질은 공동체성의 회복이며, 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으로 말미암은 관계성이 이 땅에서도 구현되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이 땅에서 공동체성을 구현한다는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공동체성의 회복이라는 의미가 없다면,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의 의미도 없으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성도들 간의 코이노니아로 구현될 필요도 없다.

아간의 범죄나 다윗의 인구조사로 말미암은 공동체적 희생은 인류를 대표하는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공동체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과제를 안겨 주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성령의 새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공동체적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 사건이다.

 

속된 것과 깨끗한 것의 구분의 폐지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경험한 베드로의 환상은, 홍수 전 정결과 부정의 구분이 노아 홍수 이후에 없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 입성때 구분되었던 정결과 부정의 구분이 폐지 되었으며,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폐지됨으로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라는 결과가 생기게 된 것이다.

로마 군인인 고넬료 이전에 베드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을 받게한다.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을 들은 사도들은 이를 확인하고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게하였지만 이방인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되었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던 것이다.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지 않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즉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데서 자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방인을 속되다고 생각했던 베드로는 이방인을 만나는 일에 자유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가 환상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로마 군인인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하여 베드로로 하여금 고넬료의 초청에 응할 준비를 하게 하신다.

환상 가운데 깨끗하지 아니한 속된 것은 거룩하고 성결된 유대인들과 구분되는, 이방인에 대한 것이었다.

이방인도 구원에 참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베드로에게는 아직 이방인이 깨끗하지 못한 속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구분은 이제 베드로만의 생각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유대인들만 성별된 민족으로 여기시지 않으시고 이방인들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신정 왕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의 종료를 선언하시는 것이다.

로마 군인들에 의한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신정왕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의 종료에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모세 율법을 통하여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함으로서 부정한 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는 깨끗하지 않은 이방인과 구분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별된 거룩성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노아 방주에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홍수 전에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여 방주에 들어가게하신다.

하지만 노아 홍수 이후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구별이 없이 음식 섭취를 허용하신다.

이는 다시 모세 율법이 있기까지 허락된 것이다.

방주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폐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일반 은혜의 나라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창세기 3장 16-19절과 홍수 후의 노아 언약에서 약속하신 일반 은혜의 나라이다.

다시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하시기까지 이 땅은 속된 것과 거룩한 것에 대한 구분을 하지 말아야한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 가운데 임하였지만, 성도는 거룩하지 못한 이 땅을 살아가야한다.

이는 성령이 임하심을 경험하면서도 속된 것에 대한 배타심을 버려야하는 베드로와 같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배타심을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속되고 교회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의 배타적 삶의 태도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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