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장 34-48절 말씀 묵상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생각의 경계를 넘어선 베드로)
베드로는 누구보다도 열정이 있었던 제자였는데 아마도 그의 열정은 예수를 유대 민족의 해방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직접 지상명령(마 28:19-20)을 말씀 하신 것으로 인하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생각은 이를 넘어서지 못했다.
베드로의 열심과 열정은 이스라엘 민족 안에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열심은 민족적이고 폐쇄적인 집단 이기주의로 발전 될 수도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집단 이기주의 안에서 폐쇄되려는 속성이 있다.
이는 인간이 가지는 열심과 열정의 한계점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집단의 폐쇄성을 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인간에게서 이러한 열심이 나올 수가 없다.
이제 베드로에게는 자신에게 임한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열심을 넘어서 하나님 중심적인 열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온 것이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외형보다는 중심을 보신다는 생각의 전환을 가질 수가 있었다.
고넬료에게는 유대적 외형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서,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라는 생각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이방인 고넬료와의 만남은 베드로의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열심에 대한 전환점을 제공해준다.
성도는 자신의 가족이나 자신의 교회만을 위한 사람이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이 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화평의 복음)
고넬료의 집에 모인 무리들을 본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이스라엘만의 주가 아니라 모든 민족의 주이신 것을 세삼 깨닫고서 화평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넘어서 모든 민족과의 화평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닭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복음은 과연 모든 이들과의 화평을 주시는 말씀일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화평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규명해준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늘과 땅의 화평이며, 이를 근거로 성도들 안에서의 화평이 확대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53)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한 화평은 세상과의 분쟁을 초래할 수도 있다.
복음은 세상과 화평을 말하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평화의 메세지는 로마에 대한 민족적 무장 반란이라는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로마라는 세상 정부에 대하여 어떻게 희생되어야하는지 본을 보여준 것이며, 예수는 유대인이 아닌 로마에 의하여 처형된 것이라고 보는 유대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메세지는 그의 속죄 사역과 관련되어야 한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던 하늘과 땅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화평의 물꼬를 튼 것이다.
인간은 얼마든지 평화를 외칠 수 있지만 그리스도가 배제된 평화는 바벨탑만 쌓을 뿐이다.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기름 부으심)
예수께서 기름 부으심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대한 왕권을 선포하시는 것이었다.
톰 라이트는 예수가 기름부음 받았다는 것에 대하여, 예수가 폭력에 반대하는 메세지를 선포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이라는 정치적 해석을 한다.
예수에 대한 정치적 해석은 해방신학자들이 선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자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이들의 전유물이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의 왕권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땅을 모두 다 하나님 나라로 변혁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 적용되는 구속 영역과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적용되는 통치 영역으로 구분하여 접근하여야 한다.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톰 라이트는 예수가 로마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처형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저주하면서 죽였다는 것을 증언하고있다.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수가 로마에 대하여 항거하는 방식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지만 이는 지극히 유대주의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이다.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사십일을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다.
사십이라는 충만한 숫자만큼이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될 수 있었다.
예수께서 불신자들에게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신 것은 그들에게 증거하는 일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아무 한테나 증거되어서는 안된다.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재판장이신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불신자에게는 심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을 전하는 것이다.
죄와 심판에서 자유 할 수 없는 신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죄사함은 그리스도를 믿음에서 나온다.
루터가 말한 이신칭의는 종교개혁자들 뿐만이 아니라 성경을 대하는 모든 이들이 깨닫는 진리이다.
종교개혁자 루터를 싫어하는 톰 라이트는 특이한 해석을 한다.
라이트는, 이스라엘은 잘못된 행동 방식 때문에 포로 생활을 하였으며,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을 종식시키는 만찬이었으며, 예수의 십자가는 포로생활에서의 해방이 선언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공한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행동방식, 즉 세상을 대변하는 로마와 싸우는 방식으로서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희생적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믿음은 여기를 참조하라)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가 결단을 요구하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만으로 성령이 임하셨다.
성령 강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에 대한 증거이다.
전도나 설교는 인간적인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결단을 촉구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며 성령의 강권적 역사에 의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만이 이 땅에서 증거되고 선포되기를 원하신다.
오히려 많은 지식과 철학이 성령의 사역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들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사역을 증거했던 이들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었던 것과 같이 할례받은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성령을 받은 것에 대한 증인이었듯이, 말씀을 받은 우리들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들이 되어야한다.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방언은 인간의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표현이다.
방언은 연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받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외적인 응답으로서의 세례)
고넬료의 집에 모인 무리들이 모두 다 성령 세례를 받고서 이에 대한 응답으로 베드로가 세례를 주었던 것은, 세례는 외적인 교회 구성원의 일원이 되었다는 승인의 개념으로서 시행된 것이었다.
세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응답이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할례를 행하였듯이 할례와 세례는 같은 면과 다른 면이 공존한다.
할례는 율법과 같이 언약에 대한 응답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기 위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할례를 받았다고 모두 다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성도의 응답으로,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징표로 받는 것이지만 세례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외적인 교회가 전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라면 세례는 외적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조건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조건이 될 수도 있겠지만, 외적인 교회와 구원을 동일시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물세례와 구원을 동일시 할 수는 없다.
로마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페더럴 비전은 외적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지만 구원에 참여될 수 잇다.
비록 우리나라에는 아직 조직이 안되어있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페더럴 비전Federal Vision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법 규모가 큰 집단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 교수(1968-1983)였던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의 후예들로 구성되어 2003년 어번 에버뉴 장로교회Auburn Avenue Presbyterian Church에서 시작된 페더럴 비전은 구원의 조건으로 로마 카톨릭과 마찬가지로 성례로서의 세례를 들고 있다.
페더럴 비전은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매우 유사하며, 새관점이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여야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으로 혼탁한 현 시대에 외형적 교회를 대하는 성도에게는 어느 시대보다도 성도의 정체성에 대한 정립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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