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25. 22:08

사도행전 10장 17-33절 말씀 묵상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환상에서 성경으로)


지금은 성도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점진적으로 알아가지만 성경이 기록되지 않은 사도시대에는 성령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해주시지 않는다면 인간의 자의적 의지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불가능하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에, 성도가 성경을 보고 깨달은 것이 사도시대에 성령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 못지 않게 하나님 나라 확장으로 이어져야한다.


하지만 인간은 내재되어있는 죄성의 수동성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도는 적극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베드로가 본 환상 못지 않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삶의 현장에 적용해야한다.


성령께서는 오늘날 성도가 읽는 성경을 통해서 시기 적절하게 상황 가운데  인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이 완성된 시대에 더 이상 직접적인 환상을 통한 계시를 추구해서는 안된다.


관상기도를 통해서 신적 계시를 받으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보다 직접 경험를 통해서 계시를 받으려는 인간의 욕심과 죄성에서 나온 것이다.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하나님의 섬세하심)


상황 가운데 정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섬세하심과 깊으신 배려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커다란 그림과 잘 조화를 이룬다.


환상을 보지 않았고 성령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는 상당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고넬료쪽에서만의 환상으로는 베드로를 설득하지 못하였을텐데 양쪽의 상황 가운데 시공간을 넘나들며 간섭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창조주로서의 세밀함으로 보려주시고 있다.


성령께서는 상황뿐만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의 생각까지도 다 알고 계셨기에 베드로의 생각과 상황의 전개를 구체적으로 간섭하실 수가 있으셨다.


하나님은 크신 분이시면서도 세심하고 은밀한 깊은 생각까지도 다 아시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를 존중하시기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시지 않으실 뿐이다.


인간이 느끼는 평안이 하나님께서 나의 세심하고 깊은 것을 모르실 것이라는 안심에서 올 수도 있다.


안심과 평안은 구분되어야한다.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를 악용해서는 안된다.


심판 때에는 인간의 가장 깊은 것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결산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를 악용하는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조차도 보려고하지 않거나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신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살아간다.


고넬료와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에 전달된 하나님의 복음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이에게는 심판의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경계를 넘게하시는 하나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 사회 관습에 묶여있다.


가끔 이러한 관습이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만 하기에 성령의 강권적인 간섭하심이 필요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면서 동시에 복음이 어떻게 유대인의 배타적인 틀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전파될 수 있었는지를 전하고 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성령의 직접적이고 강권적인 말씀이 없이는 진행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금한 유대인의 법을 어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성령이 강권적인 간섭하심이 있었기에 이방인이 구원에 참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가두어 놓는 관습적인 틀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신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자손으로서 이기적 배타성을 가지고 있는 사회에 소속되어있기에 성도는 이러한 틀을 넘어서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5)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복음 전파의 매개체)


이방인인 고넬료가 유대 온 족속의 칭찬을 받았다고하는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연결될 수 있는 자연법적인 일반 은총의 영역이다.


특별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말씀이나 환상은 일반 은총을 기반 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베드로가 전하는 특별 은총으로서의 말씀은 일반 은총을 매개로 하여 전파되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 즉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나라와 특별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두 나라에 동시에 속하여 있는 백성이다.


잘못된 이원론적 개념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나라까지도 사단의 영역으로 배척하기도 한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자연법적인 상식과 일상을 배타적으로 생각하면서 상식과 자연법을 쉽게 무시하고 어긴다는 것이다.


이는 복음 전파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고넬료는 자연법과 상식을 존중하였기에 유대 온 족속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다.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방인과의 교제가 금지되어있었음에도 베드로 뿐만이 아니라 욥바에서 온 형제들도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강권적 역사와 더불어 일상에서 베드로가 신뢰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별한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증인들이 필요했다.


복음은 공동체적 구원을 지향하고 있기에, 분리적 관습을 틀을 넘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같이 도움이 될 수 있는 형제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고넬료가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이방인에게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다.


고넬료에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고넬료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귀감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고넬료의 행동은 복음이 유대인의 장벽을 넘어서 이방인에게 전파될 수 있었던 결정적 사건이었다.


공동체의 확장을 위해서는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매개체가 꼭 필요하다.


분열된 사회에서 분리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인물은  양쪽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이되어야 한다.


한쪽을 무시하는 인물은 복음 전파의 통로가 될 수 없다.


사회법을 무시하면서 그 위에 영적 제사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목사는 사회에 복음을 전파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성도는 사회에서 복음 전파에 대한 의무와 사명을 가져야하지만, 이는 사회법을 존중하면서 사회에서 존중받고 영향력을 끼칠 때 가능한 것이다.


사회에서 지탄받는 이들은 복음을 전파 할 수 없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자신들의 폐쇄된 세계 속에서 자기들끼리만 만족하는 교회의 현실이 답답하기만 하다.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엎드리어 절한 것은 베드로가 신적인 존재라는 것보다도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기에 너무도 반갑고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방인이고 로마의 군인으로서 유대인에게 절을 하는 것은 로마법에도 크게 위배되었을 수도 있으며, 로마인으로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신앙의 영역에서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넘어서야 한다.


사회적 지위와 능력이 신앙의 영역에서도  영향력을 미치는 경우 종종 신앙생활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목회자가 사회적 능력이 있는 성도에게 인간적인 기대를 할 때는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신앙의 영역에서의 성도의 교제는 목회자나 성도나 모두 사심과 욕심을 내려놓고 사회적 지위와 배경을 넘어설 때 진정한 열매가 맺혀지지만, 현실의 교회 생활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한다.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어떠한 이유에서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렸든 간에 서로에 대한 과도한 높임은 결국 성도의 교제에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특히 교회에서는 박사나 교수와 같은 사회적 칭호를 붙이며 서로를 높여주는 행동을 조심해야한다.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상식과 자연법을 넘어서야 할 때와 넘지말아야 할 때가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언급한 어떤 목사의 “사회법 위의 영적 제사법이 있다”는 주장은 전혀 적절하지 않은 독선이다.


사회법을 어기면서 건물을 지은 것도 문제이지만 건물을 크게 짓는 것은 영적 제사법에 전혀 적용될 수 없는 비상식이다.


성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외적인 건물이 제사를 드리는 건물이 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큰 건물은 욕심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 건물이 커야한다는 것은 일종의 우상 숭배의 수단이다.


베드로가 말하는 위법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것도 아니며 자연법도 아닌 폐쇄적인 민족적 관습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법은 자연법과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 관계이다.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


사도행전의 역사는 분명하게 성령의 새창조 역사이며 이방인을 향한 구원의 행보로서 하나님의 작정하심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주제는 양립이 불가능하면서도 양립하고 있는 것이기에,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게 지으신 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라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 인격체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생각과 행동이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인간은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성도 안에 상실되었던 인격이 회복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존중해 주신다.


성도의 기도는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구현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회복되었음을 증거해 주는 것이다.


가끔 보면, 하나님께서 다 예정하셨으니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인격체로 존재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기도는 성도의 인격적 표현이며,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성도를  인격체로 대해주신다는 하나님의 반응이다.


하나님 나라는 신인협력으로 확장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대한 인격적 신뢰이면서 또한 인격적 순종을 위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지만, 고넬료의 기도는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문을 연 중요한 통로가 된 것이다.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고넬료가 데리고 온 이들은 베드로 앞에 선 이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선 이들이다.


이들은 베드로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하여 듣고 싶어한다.


이는 이방인들이 모인 최초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모인 성도들의 무리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성도는 하나님에 관한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교회 모임에서 사회 문제에 대한 이야기나, 윤리에 관한 것이나, 교회 건축이나 행동 양식에 대한 것이 주요 주제가 될 때는 교회의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교회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도가 말씀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보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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