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장 1-16절 말씀 묵상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넬료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역적으로 유대 이스라엘에 가까이 있으면서 하나님을 경험 할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넬료로서는 자신이 로마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사랴에 근무를 했었기에 복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주어진 환경이 비록 고향과는 먼 곳이었지만 이곳이 고넬료에게는 축복의 기회였다.
삶의 환경 가운데 종종 이방의 지역에 있거나 낯선 곳에 사는 것이 복된 환경이 될 수도 있음을 보게된다.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는 비록 자신이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었지만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지만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넬료가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불의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고넬료와 같이 전략적 요충지인 가이사랴에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이나 백부장이 되기까지는 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인간의 잔혹함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부정적 모습보다는 긍정적 모습을 기쁘게 여겨서 고넬료를 복음 전파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셨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백 가지 의를 행하여도 한 가지 불의를 행하면 죄인이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죄인일 수 밖에 없다.
아마 고넬료 옆에서 고넬료를 잘 아는 사람은 고넬료의 이중적인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정적인 것을 문제 삼으시지 않으신다.
가장 부정적인 것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서로의 부족한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밖에 없지만 성도는 이러한 것에 묶이기보다는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할례받지 않은 경건한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것은 할례받은 유대인 중심적인 사고에서 크게 벗어난 사건이다.
할례받은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상식을 파괴하는 고넬료의 사건은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의 새창조로 인하여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더 이상 유대적 이스라엘에 제한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지금도 할례받은 유대 민족주의 중심의 메시아 사상에 깊이 빠져있는 유대적 시오니즘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사고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했던 것으로 보아서 고넬료가 경험한 환상은 매우 구체적인 환상으로서 천상의 세계upper-register에 있는 천사가 이땅에 나타난 것이다.
이 땅은 비록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천상의 영역과 분리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새창조로 인하여 다시 이 땅이 천상의 영역과 구체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본다.
이는 마지막 심판 때, 즉 그리스도의 재림 때 하늘과 땅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서 구현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하나님께서는 능력있는 자는 그 능력에 맞게 사용하신다.
고넬료가 사회적 능력과 영향력이 없었다면 이와같이 사용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신앙생활에서 막연히 가진 자에 대한 반감이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이들에 대한 적대감은 옳지만은 않은 것이다.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베드로가 드리는 기도와 상황은 베드로의 상황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상황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작 자신이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하는 지를 알 수가 없었다.
시간과 상황이 하나님 안에서 적절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주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하심은 사람의 생각과 상황 위에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행동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든지 사단의 종이든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이다.
베드로도 사도 시대의 특수한 상황을 살아가면서도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방식에 대하여 몰랐듯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께서 종말을 어떠한 방식으로 마무리해 가실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의의 길로, 사단의 종은 사단의 종노릇하면서 멸망의 길로 가게되어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삶과 행동 방식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기도는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이 온전하게 실현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며,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드리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지 몰랐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베드로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시는 것과 같이 신자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자신 가운데 이루고자하시는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자세로 기도에 임해야 한다.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베드로에게 속되다고 생각하였던 것들을 접아먹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배타적인 장벽을 무너뜨리라는 말씀이다.
네 발 가진 짐승과 공중에 나는 것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분명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기는 것으로는 뱀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봐도 잡아 먹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단순한 거부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큰 보자기 안에 있는 짐승들은 모세 율법에 부정한 것들이었다.
유대인으로서의 베드로에게 부정한 것에 대한 거부는 베드로가 아직 모세 율법에서 자유하지 못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대 민족은 거룩이라는 구별을 통해서 성별된 공동체였던 것이다.
부정한 동물을 잡아 먹으라는 하늘에서의 소리는 모세 율법의 가장 중요한 부분 가운데 하나인 음식법을 넘어설 것에 대한 요구였다.
특히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던 베드로에게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것은 베드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해야 할 베드로가 넘어서야할 장벽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의 형태를 띤 모세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은혜 언약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되듯이,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오듯이, 모세 율법과 복음은 배타적이거나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위해서 자신들이 이전에 가졌던 유대주의적인 사고를 복음 안에서 완성시키는 자세를 가져야한다.
세상에 대하여 속되다고하는 배타성은 알 속에 머물기 원하는 정신이며, 엄마 뱃속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다.
비록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생명체는 스스로 독자적인 길을 걸어야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아담의 후손으로서 가지는 죄성 가운데 한 가지는 스스로의 세계 안에 머물면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것이다.
신앙인은 자신이 소속된 가정과 집단과 민족의 틀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 교회의 일원으로서 화합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나아가야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서,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배타적인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를 지향해야한다.
베드로가 본 환상은 모세 율법의 틀 안에 머물고 있던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선포되어지는 틀을 수용해야 할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을 감싸고 있던 육적인 틀, 즉 혈연 학연 지연, 그리고 민족적 틀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넘어서야할 장벽들이다.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있던 막힌 담을 허무시는 것은 이제는 새언약의 시대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의 마지못한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움직임은 베드로의 생각이 아직 완성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베드로가 할례받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였던 것은(갈 2:12) 이방인이 깨끗하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유대민족의 폐쇄성과 배타성은 모세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세워지는 과정에서 가나안 족속에 대한 배타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소유한 성별된 민족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환상은 전혀 화합될 수가 없는 두 진영이 동시에 움직이게끔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었다.
어느 한쪽만의 움직임으로는 쉽지 않지만 양쪽 모두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의한 과정을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즉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녀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이스라엘을 넘어서 이방인에게까지 확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확신시켜주신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유대인을 넘어서는 인류 모두에게 향하여있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것이다.
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서로에 대한 미움과 공격으로, 나라와 민족이 서로 분열되는역사 가운데 있다.
나라와 민족이 서로 화합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글로벌 시대여도 이웃 민족과 친해지는 것은 쉽지가 않다.
공동체의 회복은 외적인 국가간의 화합이 아니라 신자들을 중심으로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한다.
공동체의 원형인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성령의 새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제것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에서 공동체적 회복을 통하여 하나의 하나님 나라로 시작된 것이다.
구원은 개인적일 수도 있겠지만 구원의 본질은 공동체성의 회복이며, 이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으로 말미암은 관계성이 이 땅에서도 구현되는 것이다.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이 땅에서 공동체성을 구현한다는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공동체성의 회복이라는 의미가 없다면,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서의 의미도 없으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성도들 간의 코이노니아로 구현될 필요도 없다.
아간의 범죄나 다윗의 인구조사로 말미암은 공동체적 희생은 인류를 대표하는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공동체적으로 회복되어야 할 과제를 안겨 주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이 땅에서 성령의 새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공동체적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 사건이다.
속된 것과 깨끗한 것의 구분의 폐지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경험한 베드로의 환상은, 홍수 전 정결과 부정의 구분이 노아 홍수 이후에 없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 입성때 구분되었던 정결과 부정의 구분이 폐지 되었으며, 또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폐지됨으로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 파괴라는 결과가 생기게 된 것이다.
로마 군인인 고넬료 이전에 베드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을 받게한다.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을 들은 사도들은 이를 확인하고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안수함으로서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게하였지만 이방인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되었다는 사실은 베드로가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던 것이다.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지 않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즉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데서 자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방인을 속되다고 생각했던 베드로는 이방인을 만나는 일에 자유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가 환상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로마 군인인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하여 베드로로 하여금 고넬료의 초청에 응할 준비를 하게 하신다.
환상 가운데 깨끗하지 아니한 속된 것은 거룩하고 성결된 유대인들과 구분되는, 이방인에 대한 것이었다.
이방인도 구원에 참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베드로에게는 아직 이방인이 깨끗하지 못한 속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구분은 이제 베드로만의 생각이었고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유대인들만 성별된 민족으로 여기시지 않으시고 이방인들도 깨끗하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신정 왕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의 종료를 선언하시는 것이다.
로마 군인들에 의한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신정왕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의 종료에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모세 율법을 통하여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함으로서 부정한 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
이는 깨끗하지 않은 이방인과 구분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별된 거룩성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인 노아 방주에서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홍수 전에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여 방주에 들어가게하신다.
하지만 노아 홍수 이후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대한 구별이 없이 음식 섭취를 허용하신다.
이는 다시 모세 율법이 있기까지 허락된 것이다.
방주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의 폐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일반 은혜의 나라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창세기 3장 16-19절과 홍수 후의 노아 언약에서 약속하신 일반 은혜의 나라이다.
다시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하시기까지 이 땅은 속된 것과 거룩한 것에 대한 구분을 하지 말아야한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 가운데 임하였지만, 성도는 거룩하지 못한 이 땅을 살아가야한다.
이는 성령이 임하심을 경험하면서도 속된 것에 대한 배타심을 버려야하는 베드로와 같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배타심을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속되고 교회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의 배타적 삶의 태도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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