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21. 20:08

사도행전 9장 10-19절 말씀 묵상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이 땅이 아직 천상의 영역과는 분리되었음을 말한다.

이 땅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였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는 과정 가운데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구속이며, 궁극적인 우주적 구속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임할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선교적 교회론으로서의 우주적 교회는 현재의 이 땅에 대한 구속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택한 자들에 대한 제한을 넘어서 이 땅에 대한 현재적 구속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의 백성들에게 말씀 하실 때 환상 가운데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는 자연적 방법으로 말씀 하셨을 것이다.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G. Kline은 마지막 심판 때의 구속 사건은 천상의 상위 구조upper-register와 이 땅의 하위 구조lower-register가 만나 하나님과 천사가 있는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과 인간이 거하는 땅이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 완전한 구속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현재의 땅의 구조에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적 하나님 나라이며, 그가 말하는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 유대적 하나님 나라로서 개혁주의에서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다른 뜻을 지닌 같은 용어일 뿐이다.

환상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만나시는 통로가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신적 존재를 경험하고자 행하는 관상기도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직접 만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이 땅에서의 새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아시고 직접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머리로는 그 크기를 알 수가 없다.

모든 이들로부터 칭찬받는 아나니아를 택하시고 모든 거리의 명칭과 상황을 아시고 직접 지시하시는 하나님은 분명 제한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문명의 발전과 컴퓨터 기술을 통해서 놀라운 방법으로 정보를 얻어내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첨단 컴퓨터보다도 더 뛰어나신 분이 아니라 제한limit이라는 자체가 없으신 분이시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생각부터 시작해서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다 아시고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아나니아를 부르실 때 사울이 기도하는 것을 알고 계셨듯이, 우리가 골방에서 조용히 속싹이는 기도까지도 정확하게 다 들으시고 함께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완전히 알게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에 놀라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살아갈 능력을 상실하게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숨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침묵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고난 가운데 얼굴을 감추시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참된 안식은 우리의 문제를 다 덮으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의탁 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하나님께서 직접 눈을 뜨게 하실 수도 있지만 성도들 가운데 역사가 일어나길 원하신다.

에덴을 세우시고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서 아담으로하여금 에덴을 다스리게 하신 것은 아담을 통하여 에덴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아나니아를 부르신 것은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하나님의 자녀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것이다.

이제 아나니아를 부르시고 사울을 준비시켜서 아나니아로 하여금 안수하게 하심으로 이 땅에 대한 새창조로서, 실패하였던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안식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는 성령의 창조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참여하여야한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왜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사울을 택하셨을까?

유대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사용하셔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듯이, 민족주의자인 사울을 택하셔서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어떠한 항변도 할 수가 없었으며,  자신에게서 나오는 어떠한 자신감도 가질 수가 없다.

철저한 유대적 민족주의자였던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자신의 뿌리와 재능을 전부 박탈당한 것이다.

사용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자들은 그동안 자신이 쌓은 수고에 대한 보답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고, 자신의 공로를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어떠한 공로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들은 자신이 공들인 것에 대하여 보상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아시기에 철저하게 무너진 사울을 선택하심으로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일꾼으로 삼으신 것이다.

종종 교회의 가장 큰 장애 가운데 한 가지는, 오랫동안 교회에 공들이면서 교회의 장로가 된 이들 가운데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분열을 부축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들은 교회에서 어떠한 기득권도 주장해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울은 많은 교회를 세우고도 자신이 어떠한 자였는지를 알고있었기에 어떠한 기득권도 주장하지 않았다.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는데도 이미 다메섹에는 사울에 관한 이야기가 퍼져있었다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마 다메섹의 성도들은 사울의 위협을 피하고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구원을 위해서 간절하게 부르짖었을 것이다.

대제사장 무리들과 사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박해하려고 기세등등하게 작전을 실행하고 있었겠지만, 다메섹 성도들의 기도로 인하여, 긴장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간섭 하심은 긴박하게 전개된다.

모든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갈 때 상황의 긴박성 만큼이나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준비해야한다.

대한민국의 현재의 상황은 모든 것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다.

대제사장과 사울의 박해 만큼이나 북한과 미국의 긴장감 가운데, 다메섹의 성도들과 같이, 대한민국이 위기로 치닫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셨듯이, 이 긴박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 하심으로 북핵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그 어느 때보다도 성도의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은 이미 창세 전에 준비되었던 것으로서 인간의 생각의 한계를 넘어선다.

분명히 잘못한 것은 현재인데, 잘못한 결과에 대한 징계는 이미 잘못을 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을 잘못한 이후에 알게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간섭하시는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것이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자신의 생각의 틀에 집어넣고 해석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박해하였던 사람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될지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성도에게 현재는 단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진행되는 것을 경험하는 시간일 뿐이며 앞으로의 일은 알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하심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뜻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상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현재가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기도로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재를 살아가야 할 뿐이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무조건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세상적인 축복의 개념을 성도들에게 적용시켜서 복음을 왜곡시키고있다.

성도가 누리는 축복과 평안은 세상적인 풍요와 만족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진정한 축복은 고난 가운데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이다.

고난이 없이는 깨끗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께 사용받는 자는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깨끗함으로 준비되어야한다.

깨끗함은 우선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없애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가득했던 모세는 40년의 세월을 허무하게 보내었지만, 그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고난받는 시간은 가장 무익한 시간 같지만, 실상은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인간이 보기에 가장 비실용적이고, 가장 손실이 있는 시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 가장 유익하고 귀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유물론적 사고에 물들어 있어서 실용주의적 방식을 신앙에 적용시키기도한다.

성도는 삶의 여정 가운데 경험하는 실패와 손실과 낙담과 좌절의 시간들을 절망적이고 손해본 시간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가장 위험한 상황은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 만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안수는 자신이 가지고있는 것을 전달하고 위임하는 방법이다.

사도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을 생각할 때 사울이 사도도 아닌 단순한 제자 한 사람으로부터 안수를 받았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사울의 성령 충만은 아나니아의 성령 충만함이 안수를 통해서 전달된 것이다.

성령은 아나니아의 소유가 아니기에 안수하는 이는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성도를 새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시다.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진 것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동시에 시작 되었다.

사울이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은 성령과 더불어 시작 되었다.

성도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내주하시는 성령과 더불어서 이루어져야한다.

성령의 렌즈로 보는 세계는 인간의 관점에서보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관을 형성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성도로하여금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불행히도 많은 기독교 세계관들이 둘 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고있다.

대표적인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알버트 월터스Alv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는 둘 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담을 오실자, 즉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설명하면서 둘 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있다.

기독교세계관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활동하는 교회 개혁이 윤리적 교훈에 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변화될 수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텐리 그랜츠는 성령의 사역을 주로 회개할 수 있는 역할로 제한 시킨다.

회개는 성령을 받은 이들의 열매 가운데 한 가지 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교회에서는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회개를 말하지만 회개는 변화의 조건이 아니라 변화의 열매이다.

회개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 되었기에 회개하는 것이다.

새관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한 회개를 강조하지만 ,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열매일 뿐이다.

바울은 성령을 받았기에 일어나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지 세례를 받았기에 변화된 것은 아니었다.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음식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다.

초자연적인 신앙생활도 자연적인 삶의 법칙 가운데 진행되어야한다.

금식도 금식 자체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금식은 경건의 방법 가운데 한 가지이며, 진정한 금식은 인간적 혈기를 제어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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