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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0.08.09 :: 로마서 1장 10절 묵상
  4. 2020.08.05 :: 로마서 1장 9절 묵상
  5. 2020.08.01 :: 로마서 1장 8절 묵상
  6. 2020.07.29 :: 로마서 1장 7절 묵상
  7. 2020.07.26 :: 로마서 1장 6절 묵상
  8. 2020.07.24 :: 로마서 1장 5절 묵상
  9. 2020.07.21 :: 로마서 1장 4절 묵상
  10. 2020.07.19 :: 로마서 1장 3절 묵상
로마서 2020. 11. 22. 10:34

로마서 1장 12절 말씀 묵상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관계성의 회복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

바울과 로마의 성도를 연결시켜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

만남을 통하여 힘을 얻는 것은 인간의 지음받은 속성으로 인한 필연적 요구이면서 동시에 결과이다.

불신자들 조차도 서로의 만남을 통해서 서로 힘을 얻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성도의 만남은 하나님을 향하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 불신자들과 다른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방인을 만나서 그들 가운데 믿음의 열매를 보고서 힘을 얻는 것이 마땅한 의무이면서 동시에 당연한 결과이다.

바울과 로마의 성도가 서로 안위함을 얻는 것은 바울과 로마의 성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원리이다.

바울과 로마의 성도가 피차 안위함을 얻는 것은 서로의 인간적인 만남에서 오는 자신에 대한 정당성의 부여나 혹은 인간적인 파워의 증가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안식과 위로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앞두고 시작된 박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인간적인 일이 아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한 것이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신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서로 힘을 키우기 위해서 당을 지으려고 하지만, 바울이 로마의 성도를 만나서 안위함을 얻고자하는 것은 당을 지어 인간적인 세력을 키우고자하는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전에는 이방인이 서로의 만남을 통하여 서로가 격려를 받고 힘을 얻는 것은 인류 역사상 없었던 일이다.

처음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인간 관계는 급속히 파괴되었다.

타락 이후 부부 사이에 대한 원망으로부터 시작하여 형제 간에 살인,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살인을 넘어서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행위에 이르기 까지 관계성의 파괴는 점진적으로 증폭되었다.

인간의 수평적 관계의 손상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수직적 관계의 손상으로부터 초래된 것이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회복시키심으로서,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회복된 수직적 관계를 가지고있다.

바울과 로마 성도의 만남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회복된 수직적 관계의 수평적 확대인 것이다.

바울과 로마의 성도 간의 만남은 새로운 관계성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있다.

아합 왕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에 극심한 가뭄이 왔을 때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이고서 사환에게 주먹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날 때까지 일곱번을 확인하도록 보낸다.

주먹만한 작은 구름은 하늘이 캄캄해지기까지 뒤덮여 온 지면을 적신다.

바울과 로마 성도의 만남은 주먹만한 조그마한 것이었지만 이 시대에 성도의 교제와 만남은 온 지면을 뒤덮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있다.

하나님 나라는 관계성의 회복과 더불어 확장된다.

이방인 성도와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격려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는 민족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둘째 아담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었기에 성도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로 인해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관계가 된 것이다.

믿음을 통한 관계성의 회복은 인류 역사의 전환이 되는 사건으로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성도는 전혀 낯선 처음 만난 사람도 믿음 안에서는 서로 쉽게 가까워질 수 있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만남의 동력이 믿음이 되어야한다.


믿음에 근거한 관계성 회복

아담의 범죄 이후의 사람 간의 모든 관계성은 왜곡되고 변질되었다.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육신적 본능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이익에 의한 것이다.

혈연, 학연, 지연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대표적인 요인이었다.

이러한 요인에 의한 관계성은 배타성을 가지면서 외부에 대한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부정적인 면이 있다.

혈연, 학연, 지연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는 주요 수단이었지만, 이는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수평적 확장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오신 것이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 10:35)”라고 말씀하신다.

육신적인 인간관계는 어떤 면에서는 일반 은총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반 은총의 영역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의 영역 안에 있을 때 순기능을 할 수 있다.

아담에 의하여 파괴되고 왜곡된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인 회복을 보게된다.

바울과 로마에 있는 성도와의 관계는 일반 은총 위에 더하여지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믿음은 특별 은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와 만나 안위함을 얻고자하는 매개체는 바로 서로의 믿음이었다

바울과 로마인은 서로 이방인의 관계였지만 서로 안위함을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관계가 될 수있었던 것은 믿음의 결실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는 물론 사람간의 일그러진 관계를 바로 잡아준다.

성도가 세상에서 해야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믿음을 기반으로하는 관계성의 회복이다.

참된 관계성의 회복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천하여 제자삼는 사역의 실천은 바로 믿음을 통한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결실을 가져오게된다.

믿음을 통한 관계성의 회복으로 모인 무리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나아간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믿음이 근거가 되어야한다.

모든 만물의 구속이라는 우주적 교회론을 근거로한 선교적 교회론이나,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의 기독교 세계관을 근거로 한 문화변혁 개념 안에는 믿음에 의한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근거한 성령의 창조 사역의 결과물이다.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니다.

믿음은 문화와 달리 세상 사람과 공유될 수 없다.

구속의 근거는 믿음이 되어야한다.

성도가 문화활동을 하면서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이러한 활동의 근거가 만물의 구속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주적 교회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변혁 활동이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개혁주의 전가교리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모든 이들이나 모든 피조 세계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한 자와만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택한 자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오직 택한 자만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참된 개혁주의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믿음에 근거한 택한 자들 가운데 임한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바울과 로마의 성도들이 서로의 믿음으로 인하여 안위함을 받는 것은 오직 성도들 사이에서만 관계성의 회복이라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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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로마서 2020. 8. 16. 21:31

로마서 1장 11절 묵상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성도를 견고하게하는 신령한 은사


은사는 일차적으로 성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함이다.


새롭게 시작된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쉽지 않다.


내부적으로는 지식과 경험의 부족에서 오는 두려움과 확신의 부족이 있을 수 있고, 외부적으로는 강력한 방해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때에는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임으로서 왕되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으려고하였다.


이방 신자들의 탄생은 사탄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낼 때만해도 로마에서는 기독교인의 존재가 미미하였고 별다른 박해도 없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임할 박해를 예견하고있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고 그들을 양육시킨 후에 기독교인들이 증가하자 이들에 대한 엄청난 핍박이 다가왔다.


바울이 나눠주고자하는 성령의 은사는 이러한 핍박을 이길 힘을 주는 것이었다.


어떤 성도는 시체가 태워짐으로 로마의 밤거리를 밝히기도했으며, 어떤 성도들은 로마의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되어 목숨을 잃기도하였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핍박을 피해서 지하 무덤으로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기도하였다.


인간적으로 볼 때 바울은 로마에서의 혼란과 비극을 초래한 주범이었던 것이다.


기복 신앙에 익숙한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바울은 문제가 많은 전도자였을지도 모른다.


성도의 죽음은 이 땅에서 보면 불행한 일이지만, 천상의 세계에서는 신자의 처음 부활이며, 하나님과 천사들의 기쁨이 되는 존재로 탄생되는 과정인 것이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죽음을 새로운 희망으로 받아들임으로서 핍박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는, 그동안 자신의 영역으로 땅을 지배하고있었던 사탄이 쉽게 물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를 만나고자했던 것은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견고함을 주기 위함이었다.


당시에는 말씀도 정립되어있지 않았기에 사도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으며, 사도들이 전한 말씀으로 무장된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로 인하여 강건해 질 수 있었다.


지금은 성경으로 말씀이 정립되어 있기에, 사도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누구나 말씀을 접할 수 있으며, 상황도 초대 교회만큼이나 핍박은 있지 않다.


핍박의 양상은 초대 교회의 시대와는 많이 다르지만 현대인이 싸워나아가야할 대적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속이면서 다가오고있다.


초대 교회는 핍박이 수그러들면서 온갖 이단들과 영지주의자들을 상대하여야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도 이단의 거짓에 너무나도 많이 노출되어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가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함으로서 그들이 성령의 은사로 강건해질 수 있도록 하였듯이, 현대인들은 말씀을 통해서 성령의 도움을 받음으로서 혼탁한 인본주의적 이단사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성령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듯이 새로운 시작에서는 항상 직접적인 간섭하심을 통해서 신자를 인도하신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죄의문제가 해결되지 못했으며 거룩함에 참여하지 못하였기에 신령한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한 백성에게는 그 증거로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


성도는 바벨론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세상을 감당할 힘을 얻는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사도 시대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 정립된 시대를 살아가기에, 사람으로부터 신령한 은사를 부여받으려고하면 안되고 말씀과 더불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 4:12)


성도에게는 말씀이 곧 능력이 된다.



성령의 내주하심


나누어 준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있는 소유를 공유하는 것이다.


바울이 나누어주고자하는 신령한 은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신령한 은사와 성령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바울이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준다는 것은 바울 안에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거하고있다.


바울이 성령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성령의 소유물이 된 것이다.


성도 안에 성령이 내주 하신다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되었다는 증거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거룩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성전이었던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이 다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있는 성도를 만나서 나누어주고자하는 신령한 은사는 그들도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인치는 것이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주시는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케함으로서, 이 땅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



임파테이션


은사주의자들은 로마서 1장 11절의 말씀을 근거로 자신들의 임파테이션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현 시대에 유행하는 임파테이션이나 성령 운동은 종종 왜곡된 형태로 나타난다.


성령의 역사라기보다는 유사, 가짜 은사로서 사탄의 역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령한 은사는 신비를 경험을 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사도 시대에는 치열한 영적 전쟁이 있었다.


말씀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의 은사는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성도를 강건하게 해주었다.


신령한 은사는 성도에게 바벨론과 같은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최근의 임파테이션은 주로 신사도 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서 흔히 볼 수 있다.


현재 유행하는 임파테이션의 경우 그 결과들은 대부분 귀신들림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성도를 거룩하게 해주고 강건하게 해주며 평안으로 인도 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바울이 나눠주기를 원하는 신령한 은사는 환란 가운데 성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시대에 성도를 견고하게 해주는 것은 말씀이다.


말씀 안에 거할 때 성령께서 말씀과 더불어 지혜와 능력을 주신다.


신사도주의자들은 성경말씀보다는 직접계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 이시대에 나타나는 영적 전쟁은, 육체적 고통에 의한 핍박보다는 속이고 혼탁하게하면서 유혹에 빠뜨리는 양상으로 나타나고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세우시는 역할을 한다.


신사도주의자들의 임파테이션은 말씀을 허무는 일을 하고있다.


이러한 면에서도 신사도주의자들의 임파테이션은 분명 속이는 자들의 가짜 성령 운동이다.


지금은 사도 시대와 같은 육체적 핍박보다는 영을 혼탁하게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더 위협적이다.


이 시대에 신령한 은사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속이는 자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게하는 역할이 더 중요하다.


종말의 마지막을 살아가는 혼탁한 이 시대에 성령의 도움심과 더불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하나님을 만나야만한다.



만남의 중요성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의 모임을 귀하게 여기신다.


분리는 아담의 범죄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가장 가까워야할 형제 사이가 미움의 관계로 바뀌었다.


인류는 싸움을 종결지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만남 사이의 불협화음과 분열과 싸움은 인간이 사탄의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연합을 추구하여야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연합을 위한 희생적 사랑의 표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관계로 새로운 연합을 이루심으로서 새창조를 시작하셨다.


새로운 연합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고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작된 연합의 한 형태이다.


연합을 통한 새로운 창조는 성령의 역사이다.


신자는 성령의 대리인으로서 성령께서 하시고자하는 역할을 담당하게된다.


신령한 은사는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이 서로 모이기를 원하셨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모이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의 회복으로서 이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사탄과 싸울 수 없다.


바알의 제사장들과의 싸움에서 이긴 엘리야는 지쳐서 죽기를 간구했다.


성도들도 악과의 싸움에서는 지칠 수밖에 없다.


엘리야에게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신 하나님과 같이 성도에게는 말씀을 통하여 세미하게 다가오신다.


성도의 싸움은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싸움이다.


로마의 성도들에게 바울이 전한 신령한 은사는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말씀 가운데 새롭게 모임을 형성하는 능력과 지혜를 허락하신다.


비록 로마의 초대 교회가 카타콤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새로운 창조 세계의 시작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임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시킨다.


성령께서는 말씀 가운데 성도들에게 모임에 힘쓰도록 지혜와 능력을 허락하신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만남은 말씀과 더불어 성령이 함께하심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성도가 모이는 것의 중심에는 항상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여야만 참다운 교회로서의 만남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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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로마서 2020. 8. 9. 22:26

로마서 1장 10절 묵상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뜻 안에서 구하는 기도


바울은 로마에 가고자하는 자신의 간절함이 자신의 마음 중심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자신의 뜻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종속시킨다.


바울의 기도와 원함은 순종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생각될지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않는 행동 방식은 불순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죄성이 끊임없이 작용하고있기에 기도는 인간적인 죄성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종속시키는 중요한 방법이다.


처음 아담과 달리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심으로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순종하심을 보여주셨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보다는 자신의 육신이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제어하는 방법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면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기까지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철저한 순종의 길을 걸으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기도가 없는 방법론적인 순종은 기계적인 행동이며 이는 불순종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행동이다.


기도는 형식적이고 자기 의를 이루는 공로적 순종을 제거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는 수단이며, 행함 이전에 함께함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준다.


만약에 자녀가 부모와 소통하지도 않으면서 알아서 부모가 기뻐하실 일을 한다면 부모로서는 기쁨보다는 섭섭함이 많을 것이다.


소통이 없는 행함은 일꾼도 할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로봇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를 만남으로서 서로의 믿음으로 안위함을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힘을 얻고 안위함을 얻는 방법이다.


로마의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과 바울과 로마의 성도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기도는 또한 일꾼이기 이전에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일꾼으로 부르시기 이전에 자녀로 부르셨다.


성도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순종시킴으로서 자녀의 조건이 되는 순종을 이룰 수 있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다.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름으로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가까이 하기에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평안 가운데 다가갈 수 있는 힘과 기쁨이 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된다.


바울에게 로마에 있는 성도는 바울의 마지막 과제이면서도 바울을 더욱 기도로 강건하게 무장해주는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의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일그러진 의지를 가지고있기에 자신의 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의 조화를 위해서는 기도하면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안에 두려는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은 로봇과 같은 기계가 아닌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의지적 노력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신다.


타락 이전의 자유 의지가 타락과 더불어 손상되었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예정이라는 관점으로 운명론적인 해석을 하려고하지만, 순종하는 자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인격적인 관점에서 순종하며 응답하여야한다.


거듭난 신자는 더 이상 처음 아담의 불순종의 권세 아래 있지 않기에 자유 의지를 행사하여야하지만, 아직 죄성을 입은 육신 안에서 살고 있기에 육신을 입고있는 동안에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불완전성 가운데 의지를 행사하여야한다.


기도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불완전함을 극복하며 자유 의지를 회복시키는 방법이다.


참된 자유 의지는 기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기도는 처음 아담 안에서의 불순종이라는 잘못된 습성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뜻 안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방법이다.


육신을 위한 행함은 자유 의지의 결과물이 아니다.


육신의 원함을 제어할 때 진정으로 자유 의지가 있는 것이다.


신자라 할지라도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인간적으로 연약하기에 육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녀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복종시켜서 하나님의 뜻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에 가고자하는 자신의 계획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 의지의 결과물이 되기 위해서, 바울은 쉬지 않고 로마의 성도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전도 여행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 못지 않게 자신의 육적인 욕심에 묶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지혜와 능력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였을 것이다.


신자가 넘어서야할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아직도 자신을 얽어매어 육신의 소욕에 종속되도록하는 사단의 계괴를 극복하는 것이다.


기도가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한 것이 된다면, 이러한 기도는 자신을 더욱 육신의 노예가 되도록 얽어매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얻어야할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기 이전에 자신의 죄성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한 기도가 되어야한다.


기도를 하였음에도 주어지는 난관은 자신의 인간적 죄성을 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도록 하나님께서 훈련을 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순탄하지 않은 상황을 허락하시는 것은 성도 안에 있는 인간적인 죄성을 다스리시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바울은 감옥에서의 순탄하지않은 여정 가운데 자신의 죄성을 다스리면서 참 자유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었다.


성도의 의지가 하나님의 예정과 충돌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간절한 기도는, 자신 안에 있는 인간적 죄성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의 대립 관계는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기도는 이러한 대립 관계를 해결해주는 방편이 된다.


바울이 보여준 로마에 가고자하는 간절한 소망은 기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면서 참된 의지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좋은 길과 순탄한 길


바울은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순탄한 길이 아니어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갈 수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기를 원했다.


바울이 구했던 좋은 길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좋은 길은 인간 안에 내재한 죄성이 싹틀 수 있기에 결코 좋은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죄성을 억제하는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일 수가 없다.


좋은 길은 사탄이 싫어하는 길이며 사탄의 방해는 필연적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탄 조차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세상적인 신자라면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는 것을 조롱하였을 것이다.


아마 하나님께 벌받아서 죄수의 신분이 되어 로마까지 끌려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로마에 죄수의 신분으로 가는 길이 수치스러운 길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여정은 인간적인 순탄한 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방식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이들의 모습은 세상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장로가되며 세상적인 까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목회자가 대접받는 커다란 교회당에서 자신을 성공한 모습으로 포장하려는 이들은 교만의 길에서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낮아짐의 자리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어내며 하나님의 좋은 길을 걸어가는 신자는 비록 신앙의 여정이 순탄하지 않아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는 귀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순탄한 길이 좋은 길이라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일 뿐이다.



길이 막히는 상황에서의 자신의 욕심과 하나님의 뜻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의 욕심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던 신앙의 여정이 길이 열리지 않거나 엄청난 방해로 좌절하게되는 경우 종종 혼란에 빠지게된다.


자신이 영적 전쟁에서 패배를 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길인지 분별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시험이 따르게된다.


에덴에서의 시험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진입하기 위한 시험의 과정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시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던 것도 아담과 이스라엘의 상황을 재연한 면이 있다.


이와 달리 이미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여정 또한 종종 시험과 역경을 마주한다.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로마로의 여정을 죄수의 신분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 만났던 풍랑은 그를 더욱 힘들게하였다.


신자는 믿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죄성을 가진 육신으로 살아가기에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쉽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신의 존재까지 변해있는 것은 아니다.


죄성을 가진 육신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자는 더욱 깨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면서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야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부딪히는 난관과 역경들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면 사탄의 방해냐에 앞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이 있다.


마귀와의 싸움은 자칫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수도있다.


마귀를 내어쫒거나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교만이다.


신자라도 종종 상황을 불평하거나 자신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강변하기도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난관이 겸손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기 이전에 자신의 목이 곧음을 생각해보아야한다.


겸손하지 못한 인간은 끊임없이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역경을 통해서 자신의 목이 곧은 성격이 다듬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고 성령이 앞서나가 일을 이루신다.


실패와 좌절이 없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교만해질 것이다.


인간이 교만한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는 한에는 시험과 역경은 필연적이다.


부딪히는 시험과 역경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면서 사랑의 채찍이다.


인간은 자신이 왜 채찍을 맞아야하는지, 왜 자신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지만 인간은 잘못을 행함 이전에 본질적으로 죄성을 가진 존재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에게 고난과 역경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역경을 통해서 겸손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무한히 자기의 뜻을 펼칠 것이고 필연적으로 파괴될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고자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바울의 기도는, 자신이 아직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죄의 성품을 가지고있기에,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여야만했고,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좋은 길을 주시기 위해서 역경을 허락하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열심이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더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켰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마음의 중심을 아신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인간적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도 있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신다고 낙담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녀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며 이는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라고 최상의 기도 응답일 수가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아직 이 땅에서 죄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미와 아직의 긴장 가운데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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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로마서 2020. 8. 5. 21:34

로마서 1장 9절 묵상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아들의 복음 안에서)


아들의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복음이다.


아들의 복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리에 초대해 주는 복음이다.


아들의 복음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알려주는 복음이다.


아들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아들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임을 선포한다.


아들의 복음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의를 외친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던 사울에게도 아들의 복음이 없었다.


아들의 복음을 배제하였던 사울의 열심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들을 핍박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아들을 배제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교만을 드러낼 뿐이다.


아들을 거부하였던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무슬림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을 배제하는 종교와의 대화는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던 인간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아들의 자격이 박탈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아들의 자리를 거부한다.


모든 인간은 어떠한 행동을 하던 간에 이미 아담 안에서 아들의 자격이 박탈 당하였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기에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다가가야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아들이 없이는 교만과 자기 의로  결론 지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대표성을 가진 아담 안에서 결정되어지는 존재이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대표한다.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둘째 아담의 대표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존재이다.


거듭난 바울에게 하나님은 아들의 복음 안에서 심령으로 섬기는 아버지가 되신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아버지의 증거이다.


바울은 자신이 기도할 때 로마의 성도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있음을 아버지가 증인이 되신다고 말함으로서 자기를 증거한다.


이는 자신의 모든 행동 방식이 하나님에 의해서 검증되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들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할 수가 없으며, 아버지를 증인으로 내세울 수가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로서, 아버지 안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가가고있다.



아들의 복음 vs 하나님의 복음


바울은 1절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그리고 9절에서는 아들의 복음을 말하고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복음은 아들의 복음과 동일하다.


바울에게 아들의 복음은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아들에 관한 복음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아들의 복음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출애굽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아들의 나라가 아니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과 그림자였지만 아들이 없었기에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될 수가 없었다.


아들이 없는 복음은 명령과 요구만와 자기 의만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택하신 자를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초대한다.


복음은 아들의 자리에 초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들은 복음의 실체이며, 복음의 몸통이다.


복음은 아들에 관한 것이며, 아들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처음 아담 안에서 아들의 자격이 상실되었기에 둘째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아들의 자격이 회복될 수 있다.


아들의 복음은 신자를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복귀시키는 복음이다.


아들의 복음만이 참된 복음인 것은 아들의 복음만이 은혜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또 다른 과제가 주어진다면 이는 아들의 복음이 아니며 은혜의 복음도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본받아 공로적 삶을 요구하는 변질된 복음이다.


새관점에서의 주장은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또 다른 과제가 주어지기에 이는 아들의 복음도 아니며 은혜의 복음도 아니다. 


톰 라이트는 새관점이 은혜를 말하고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말하는 은혜는 반쪽 짜리 은혜이다.


새관점에서는 이미 유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기에 새관점은 은혜의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머물 수 있었지만 행동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행동 방식의 문제를 고쳐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적이고 혁명적인 행동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의 행동 방식에 의해서 최종적 구원이 결정된다는 펠라기우스적 행위 구원론의 범주에 속하여있다.


톰 라이트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몸통이고 출애굽 이전과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와 꼬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예수는 구원자 아들이 아니라 교사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아들의 복음이 아니며,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아들의 나라가 아니다.


새관점에는 오직 백성의 개념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자주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이 아니다.


그에게 신약의 교회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중심이 된 확장된 유대 이스라엘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왜곡시킨 거짓된 복음일 뿐이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기도는 처음 창조 세계의 회복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창조 사역이다.


새생명의 탄생을 위해서는 사랑과 관심과 노력과 수고가 뒤따라야한다.


바울의 로마의 성도를 향한 열심은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의 열심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부모의 열심만큼이나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간절함이 담겨있다.


사랑과 관심이 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불행한 존재일 뿐이다.


로마에 있는 성도는 단순한 새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생명체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새생명이 탄생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기도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이는 처음 창조의 하나님의 기쁨의 회복이다.


참된 인간성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만 가능하다.


바울의 로마 성도를 향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은 창조시 인간 사이의 원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바울의 이방 성도를 향한 간절함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희생적 사랑에는 처음 아담 안에서 타락한 택한 자를 향한 그리스도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바울의 로마의 성도들을 향한 간절함은 그리스도의 택한 자를 향한 간절함의 반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면서 끊임없이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의 기도에는 택한 자를 향한 간절한 사랑이 담겨있었다.


바울의 이방인을 향한 간절한 기도에는 아담 안에서 타락한 택한 자를 향한 그리스도의 간절함이 담겨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는 논리적인 이론을 넘어서는 간절한 사랑이 담겨있으며, 바울의 기도에도 간절한 사랑이 담겨있다.


간절한 사랑을 기반으로하는 끊임없는 기도는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오직 서로를 향한 간절한 기도와 사랑만이 진정한 창조 세계의 회복이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바울


로마에 있는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였기에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에 있는 자들이었다.


이미 예정된 이들을 위해서 왜 바울은 쉬지 않고 로마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여야했을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예정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기도가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


바울이 로마에 가기 위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다른 이들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실 수도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쉬지 않고 로마의 성도를 말하면서 로마에 가기 위한 좋은 길 얻기를 구했을까?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바울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을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손해보시는 것일까?


왜 바울은 기도를 했어야만 했을까?


어짜피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이들을 위해서 바울은 너무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은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는 사람이기에 자신의 사역의 열매를 위해서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수고가 꼭 필요함을 알고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만큼 새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힘든 영적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인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영적인 존재이다.


성도의 삶은 끊임없는 영적 전쟁 한 가운데서의 삶이다.


세상 나라의 전쟁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그만큼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루어야한다.


성도는 결코 혼자 영적 전쟁을 치러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도가 아니고는 결코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는 일에 승리할 수가 없다.


초대 교회에 가해진 핍박만큼이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핍박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다.


맑스의 유물론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한 결과물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외형적인 형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은  마치 태어난 아이가 부모를 닮는 것을 넘어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는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담아낸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접근은 기도와 눈물을 흘리는 사랑이 없이는 어떠한 결실도 맺을 수가 없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들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한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면서도 사단의 종으로서 사단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단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인간은 압살롬과 같이 아버지를 대적하는 자가 되었다.


인간은 인간이 얼마나 심오한 존재인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인간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은 충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로마에 있는 성도는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쉬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만나기를 소원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며, 또한 그렇게 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수고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있는 존재로서 사랑과 기도가 아니고서는 표면적으로 밖에는 접근할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은 이미 사단에 의해서 점령당한 존재로서 인간적으로는 변화를 시킬 수 없는 견고하게 무장되어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단순히 도덕이나 윤리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점령하고있는 사단의 세력은 쉽게 기득권을 포기할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적으로 반격을 가하기도한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자하는 일은 사단에게 선전포고를 하고서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물리치셨고 사단이 패배를 하였지만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결코 쉽게 물러서지는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사단은 이미 이 땅에서 패배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아담의 죄성을 가진 인간들 사이에 기거하면서 끝까지 반항하는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는 영적 전쟁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단순히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기도와 눈물로 이루어가는 고난의 여정이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말하며 끊임없이 시도하였던 것은 사단과의 전쟁이 결코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성도들과의 교제한 후에 맞이했던 상황은 바로 로마의 화재와 네로 황제의 핍박이었다.


바울도 이로 인하여 목숨을 잃어야했으며 수많은 성도가 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어 죽어가기도하였다.


바울의 기도에는 이러한 모든 핍박을 이겨낼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을 구하였던 것이다.




변화 되어야할 인간 사이의 관계성 


인간은 인간을 가장 두려워한다.


인간은 인간을 해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존재를 없애야만 하는 경우도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다.


그나마 인간은 육신의 자녀를 통해서 자신 안에 남아있는 사랑의 본능을 발견하게된다.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귀한 존재이다.


이 땅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림자이다.


인간에게 타락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 안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랑을 나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감 가운데 존재한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은 핍박하여야할 대상이었지만 이제 사랑하여야할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바울은 이제 자신은 핍박을 받으며 성도를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다.


바울은 육신으로는 감옥에 있었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삶을 살고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긴장 사이에서 사랑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시키고있다.


성도는 서로 사랑하면서 왜곡되고 일그러진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시키는 일원이 되어야할 것이다.



기도와 성령의 창조 사역


복음 전파는 하나님이신 성령의 창조 사역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 사역은 성도와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이루어나아가는 수단이다.


기도가 없이는 인격적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기도는, 어떠한 일을 앞두고 그 일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바울의 기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보여준다.


바울이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바울의 기도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비록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손상되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으로서, 성도에게 기도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울의 기도는 로마의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성령의 창조 사역의 한 가지였음을 보여준다.


성령은 성도의 기도와 함께 움직이시지만, 성도가 먼저 앞장서게 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보다도 앞서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인간이 앞서서나가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바울의 기도는 바울이 로마에서 사역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로마에서 사역하시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기도는 하나님을 앞세우면서, 뒤따라가는 방법이다.


기도없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뒤에 계시게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앞서는 공로적 행동이다.


기도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은 성령의 역사이기에 성도에게 공로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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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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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20. 8. 1. 13:27

로마서 1장 8절 묵상


8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먼저)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방인의 구원은 바울의 가장 큰 관심사였기에 그 결실에 대하여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는 바울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의 구원이 가능하게 된 것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방인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전에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기에 이는 인류 역사상 처음있는 놀라운 사건인 것이다.


특히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바울 자신이 바로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새생명의 탄생


바울이 드린 감사는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감사였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믿음은 구원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것이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은 유대인들의 한계를 벗어난 모든 나라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서 창조세계를 보시고 기뻐하셨듯이, 바울은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보고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이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새생명들이다.


새 생명의 탄생은 보는 모든 이들에게 기쁨을 준다.


이러한 새생명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알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주는 놀라운 사건이었기에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여러가지로 손상되었고, 땅은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있는 피를 삼킬 수밖에 없는 저주 받는 곳이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종교의역사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범죄한 이후에 끊임없이 서로를 죽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죄악을 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구속하시고자 이 땅을 바로 멸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시며 일반 은혜를 베푸셨으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믿는 자의 나타남은 하나님의 구속의 특별 은혜가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처음 아담에게 주어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육신의 것으로 변질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신자의 출현은 처음 아담이 실패한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의 자손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28:19-20)을 실행하며 이 땅에 충만해질 것이다.


대위임령은 유대인들의 한계를 넘어서 땅에서 사는 모든 이들을 향한 것이다. 


모든 이들을 향한 대위임령이 가능한 것은 공로적 순종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거부하였던 바울은 이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있다.


이방에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믿음을 주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막힌 담을 무너뜨리신 분이시다.


인간의 폐쇄성은 어느 민족에서나 볼 수 있고 개인 또한 마찬가지이다.


민족주의적인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이방인의 구원이 용납될 수가 없기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사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였던 것도 민족주의적 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강하게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그만큼 획기적 전환점이 필요하다.


보수적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그리스도를 주시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다메색 도상에서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외부의 강압적인 사건이 아니고는 인간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것은 바울의 유대주의적 자아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말한다.


율법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없다.


율법은 인간이 얼마나 자아 중심적이고 자기 성취적인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율법은 인간의 부패성을 알게해준다.


율법과 마찬가지로 자연법도 모든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를 알게해준다.


그리스도께를  주로 고백하기 위해서 인간은 바울이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실패와 좌절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의 온갖 부정적인 상황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 초대하는 하나님의 싸인이 될 수 있다.


바울과 같이 무너짐을 통해서 삶의 방향이 전환될 때 바울과 같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을 것이다.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로마는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이 최종적으로 가고자하였던 곳인데 자신이 방문하기 전에 이미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 로마에 성도가 전혀 없었더라면 죄인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야만 하는 바울로서는 자신을 통한 결실을 맺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비되어지고 준비되어진 이들은 사역에 있어서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바울이 이제껏 로마에 가는 일이 막혔던 것도 어찌보면 성령께서 미리 준비하시는 동안 바울로하여금 기다리게끔 하셨다는 생각도 해보게된다.


성령께서는 상황을 준비하시고 예비하신다.


열매맺는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성도는 쓰임을 받을 뿐이다.


성령의 예비하심으로 인해서 사람은 겸손해지게된다.


예비하심이 없이 자신이 일을 해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 인간은 교만해지게된다.


사람이 결실을 맺는 삶을 사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의 믿음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초자연적으로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바울이 로마에서 믿음의 주역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이미 로마에는 자체적으로 믿는 자들의 무리가 형성되어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이다.


바울이 제1,2차 전도 여행에서 로마까지 바로 갔더라면 로마의 성도들이 거의 바울로 말미암은 결실들이었을 것이지만 그 결과는 지금보다도 나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 가는 것이 지체된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이 있으셨다.


태초에 천지 창조부터 종말의 새생명의 탄생까지 성령은 주체적으로 창조 사역을 진행하신다.


사도행전의 핵심에는 성령의 사역이 있다.


사람이 사는 목적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사람이 자신의 일을 계획할지라도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신다. 


복잡한 역사적 상황에서 조차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간섭하시며 상황을 운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 상황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파하신다.


로마라는 상황은 유대 이스라엘에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모든 민족에서 전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통로였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후의 종말론적 세계 역사에는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한 성령의 간섭하심이 있다.


세상의 어떠한 상황도 복음과 관계없는 세상만의 상황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상황을 주관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세상 나라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하나님의 구속을 위한 수단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 동시에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특별은총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두 나라 백성으로서 일상의 삶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손길을 보아야한다.


바울은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로마나 세상 나라와 투쟁하지 않았다.


바울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상황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바울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로마의 식민지배하에 있었으면서도, 그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결실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있다.



구원의 근거가되는 믿음과 이를 거부하는 새관점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 것은 그들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또한 이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부패된 존재였기에 행위로서는 구원의 희망이 없으며 오직 절망 뿐이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절망뿐이었던 세계에 희망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율법은 행위를 요구하기보다는 죄를 깨닫게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해서 구원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 행위에서 믿음으로 바뀐 것이다.


바울이 감사하였던 것은 바로 이 “믿음”에 대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는 약속이 이 땅에 이루어진 것을 본 것이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구현된 것이다.


믿음은 육적인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는 기준이 되며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근거가 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명령에 대한 순종이 요구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요구되는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하나님 나라가 인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증거한다.


톰 라이트는 아브라함 언약이 유대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 땅에 구현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이 땅에 구현된 하나님 나라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다는 것이고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에있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것에 관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것은 믿음을 통하여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바울이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다는 사실은 자신이 율법의 수호자로서 믿는 자를 박해하였던 자였음을 생각해 볼 때 놀라운 변화인 것이다.


행위에 의한 구원의 길을 포기하는 것은 죄성을 가진 인간에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만큼 율법주의는 믿음을 요구하는 그리스도를 대적할 수밖에 없다.


율법주의는 인간이 구원의 주체가 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주체이이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없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근거는 그리스도이시며 여기에 인간의 공로는 전혀 근거가 되지 못한다.


새관점은 그리스도를 부차적인 존재로 격하시키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었으며,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생각해볼 수 없는 일이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었던 인간의 부패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이방인들 가운데에서의 구원의 믿음은, 온 세계에 대한 희망의 시작이었으며, 온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출애굽의 역사를 통하여 시작된 가나안에서의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없는 과정일 뿐이다.


바울의 이방인에 대한 사역은 예수로 말미암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비로서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이었다.


바울이 전하고자하는 복음은, 이제 열매를 맺기 시작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더욱 강건하게 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전파될 복음이 더욱 견고하게 정립된 가운데 전파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이 감사하였던 것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대한 것이었다.


메튜 베이츠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그들은 충성을 보여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톰 라이트가 말하는 것과 같이 많은 연습과 노력으로 삶의 모습을 개선시킨 것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 전파된 것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이나 삶의 본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전파된 것이다.



언약적 신율주의에서의 구원의 근거


율법주의자들은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거부하지만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또 다른 형태를 언약적 신율주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언약적 신율주의에서는 그리스도를 수용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리스도를 거부하고있다.


언약적 신율주의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일 뿐이다.


언약적 신율주의는 행위에 의해서 구원에 이르려는 또 다른 형태이다.


언약적 신율주의는 신인협력적 사고에서 나온 구원론이다. 


샌더스, 제임스 던, 톰 라이트로 대변되는 새관점주의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미 가나안 땅에 임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르고자 율법을 지켰다는 언약적 신율주의를 주장한다.


새관점에서는, 이미 출애굽시에 이스라엘에 구원의 은혜가 임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스도의 사역 이전에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새관점에서의 그리스도는 구원의 은혜에 머무르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하며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일 뿐이다.


새관점에서의 예수는 구원을 얻기 위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임한 구원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따름의 대상일 뿐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의 로마에 저항하는 혁명적이고 희생적인 방법이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셨기에 예수의 방법론이 신뢰를 받을만한 방법이기에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말하는 로마 성도들의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는 다른 것이다.


구원을 받기위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요구된다는 개혁주의의 입장과는 달리, 새관점에서는 이미 이른 구원 안에 머무르고자 행함이 요구된다는 주장을 하고있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볼 때 새관점의 주장은 분명 다른 복음에 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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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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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20. 7. 29. 07:54

로마서 1장 7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로 칭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사용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전의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의 독점적인 하나님이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유대인들만 독점하였던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였고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인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선언하고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간의 획기적인 전환을 선언하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인류 역사의 전환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차도 사용되어질 수 없었던 표현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부르는 호칭으로사용하고였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유대인을 넘어서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복음이다.


로마서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복음으로의 초대를 구체화하고있다.


복음이 들어가기 전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어둠 가운데 있던 이들이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 한 가운데 있었던 아브라함을 부르셨듯이, 이제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모든 이들을 성도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서도 생각할 수 없었던 사건이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 조차도 은혜 가운데 있기보다는 심판 가운데 멸망을 당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조차도 쉽게 임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은혜를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시킨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방인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바울의 표현은 무척이나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유대인들에게서 핍박을 받으면서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전할 수가 있었다.


바울이 전하는 은혜와 평강은 이미 자신이 경험하였던 것이었기에,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함께 경험하며 환란을 이겨나가게끔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은혜)


은혜는 마땅히 누릴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바울이 전하는 은혜는 그저 삶을 순탄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바울이 전하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이전부터 있어왔던 일반 은혜와는 다른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은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는 자에게  세상을 이기고 구원을 온전하게 이루게하는 환경을 제공해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전하는 복음은 육적인 풍요를 위한 것도 아니며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과 가치관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성도는 더 많은 난관에 부딪히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허락하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깨달아 알 수없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이 보내는 서신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며,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상황이나 환경을 바꾸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상황을 이겨낼 수있는 지혜와 능력을 허락하기도한다.


은혜 안에있는 성도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초자연적인 상황을 경험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기도한다.


부정적 상황은 인간적으로는 힘들지만 은혜 가운데 이를 이겨낼 때 영적인 진보를 이루게된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일반 은혜와는 구분되는 특별 은혜의 성격을 가진 은혜이다.


바울이 전하는 은혜는 구원을 온전하게 이루기 위한 것이며, 자연법적인 은혜를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은혜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수반되는 여러가지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은혜이다.


바울이 전하는 은혜는 성도로서 감당해야만 하는 핍박과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은혜이며, 시험에 들지 않게하는 은혜이다.


성도는 끊임없이 사단으로부터 공략을 당한다.


불신자들 가운데 역사하는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필요하다.



(평강)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면서 제자들은 죽게되었다고 배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질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셨기에 물결이 요동치는 가운데에서도 평안 가운데 주무실 수 있었다.


바울이 전하는 평강은 불안정한 상황 가운데 취하는 안정적인 쉼의 상태이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평강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만이 누릴 수있는 하나님의 권세이다.


성도에게 주어지는 불안정하고 위협적인 상황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을 취할 수있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은 항상 불안 가운데 긴장하였지만, 창조주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성도는 세상의 환란 가운데서도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이는 인간적인 노력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강은 오직 안식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요구를 다 이루셨기에, 성도는 요동치는 환란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평강을 누릴 수 있다.


성도가 경험하는 은혜와 평강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될 완전한 은혜와 평강의 그림자와 모형으로서,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도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이를 경험함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의 환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원하노라-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은혜와 평강을 누리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단지 바울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녀로서 누릴 수있는 특권이면서 권리이지만, 이미와 아직이라는 불완전함 가운데 당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자녀의 신분이 되었음을 말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자로서의 신분을 말하지만, 이 땅에서 신분의 변화에 따른 결과물들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사이에 있다.


신분의 변화에 따른 환경의 완전한 변화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이다.


성도에게는 신분의 변화로 인한 성화의 과정이 요구된다.


환란은 성화의 과정에 필수적인 환경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종종 어둠을 통과하여야하며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는 과정을 경험하기도한다.


이는 믿고 구원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아직 하나님을 온전하게 경험하기에는 준비되어야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기도하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영적인 성숙을 위한 것이며 이러한 성숙의 과정을 거칠 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더욱 깊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은 구속 사건 이전에는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개념이었지만 그렇다고 믿는 자가 요구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도 아니다.


은혜와 평강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믿는 자는 변화에 따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여야만 한다.


성도에게 허락되어지는 환란은 힘들지만 필요하기에 허락하시는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상황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 안에 있다.


은혜와 평강은 육적인 것을 넘어서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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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20. 7. 26. 22:29

로마서 1장 6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6  너희도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자기 백성들에 대한 주권을 선포하셨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왕은 백성들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있다.


왕국 백성은 왕에게 자신의 소유권을 위임한 백성들이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그리스도의 소유권을 선포한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죄의 종이었던 신분에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신분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된 이들은 더 이상 종으로서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법을 배우게된다.


자유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아야 한다.


로마서는 모든 이들을 위한 윤리적 지침서가 아니다.


로마서는 진리 안에서 자유케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기록한 서신서이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 뿐만이 아니라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필요로하는 모든 이방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방 그리스도인에게도 꼭 필요한 서신서이다.


바울이 로마에 보내는 서신을 통하여 전하고자하는 복음의 처음은 하나님의 왕권의 선언이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소유권이 있는 왕국 백성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왕 되심은 처음 아담이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일에 실패한 것에 대한 반전이다.


이 땅이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있지는 않지만 성도는 최종 심판 때까지 죄의 권세와 더불어 살아가야한다.


죄의 권세가 최종적인 심판을 받았다면 이 땅은 그리스도의 나라, 즉 크리스텐덤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언하였지만 이는 육에 속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콘스탄틴대제로부터 시작된 로마카톨릭의 크리스텐덤은 육에 속한 것이었다.


흔히들 로마카톨릭의 시대, 그리고 이어지는 신정체재하의 기독교 국가들을 크리스텐덤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사실상 크리스텐덤이 아닌 모양만의 크리스텐덤인 세상 나라였을 뿐이다.


외형적 크리스텐덤의 실패는 하나님 나라 백성을 외형적으로 이해한데서 기인된 필연적인 것이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로 한정된다.


참된 그리스도의 백성은 이 땅에서 크리스텐덤이 아닌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데 힘써야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포스트크리스텐덤 문화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육적인 크리스텐덤에서의 문화를 거부하는 문화다.


크리스텐덤으로의 복귀를 위한 포스트크리스텐덤에서의 노력은 육적인 결과물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크리스텐덤으로의 복귀를 시도하는 선교적 교회론도 교회를 교회답게하기보다는 교회를 해체하고 대신에 하나님 나라를 외형적으로 보편화시키려는 시도이기에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참된 크리스텐덤은 그리스도가 피값으로 사신 백성들로만 구성되어야하기에 이 땅에서 보편화 될 수는 없다.


참된 크리스텐덤은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로서 하나님의 통치의 나라인 일반은혜의 세상 나라와 구분되어야한다.


선교적 교회론(미셔널 처치)은 우주적 교회론을 가지고 모든 피조세계를 구속의 영역으로 본다.


선교적 교회론에서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다.


선교적 교회론에서는 일반 은총의 나라와 특별 은총의 나라를 구분하지 않는다.


일반 은총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서 자연법을 근거로하고있으며 특별 은총의 나라는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으로서 성경의 법을 근거로하고있다.


선교적 교회론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이론을 근거로 하기에,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되었다는 만인구원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개혁주의 전가교리의 세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처음 죄를 모든 인간에게 전가시키셨다.


두번째, 택한 자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의 죄를 그리스도께 전가시키셨다.


세번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 혹은 그의 순종하심을 택한 자에게 전가시키셨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이들, 혹은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택한 자에게 제한되어있다.


참된 크리스텐덤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고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신자들로에게만 적용되는 무형의 하나님 나라이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선언하는 것은 로마의 성도들도 이방 나라 성도들 가운데 일부라고 선언하는 것이지 로마의 성도들이 세상 모든 나라 백성들 가운데 일부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아담의 실패로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었지만 둘째 아담의 순종의 의는 오직 택한 자들에게만 전가된 것이기에 이 땅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은 제한적 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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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20. 7. 24. 22:08

로마서 1장 5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은혜를 받은 바울


바울은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이력을 생각할 때마다 은혜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바울이 사울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을 때 자신은 분명 하나님께 올바른 일을 하고있다고 생각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까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가 없다.


바울이 입은 은혜는 바울만의 자랑이 아니다.


바울은 철저한 유대인이었으며, 이스라엘은 아담을 내포하고있으며,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기에, 바울의 고백은 모든 신자들의 고백이 되어야한다.


바울 자신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믿는 자들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기까지 불순종하였던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에서의 좌절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좌절과 한 가지였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듯이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모든 신자는 낙담과 좌절 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은혜를 경험하게된다.


인생은 언제까지나 순탄하기만 할 수 없다.


순탄하기만한 인생은 독이 될 수 있다.


세상의 많은 불행들은 종종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통로가 되고있다.


세상은 이미 죄악 가운데 있기에 세상에서의 부귀 영화는 불행을 자초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세상은 모두 성공과 자아성취에 관심을 가지지만 그리스도인은 정작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사도의 직분을 받은 바울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을 전하여야만 하는 직분을 받았음을 설명하고있다.


직분이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았지만 은혜를 받지 않고는 사역에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바울이 받은 은혜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였으며, 바울이 받은 사도의 직분은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함께하는 직분이었다.


바울이 받은 사도의 직분은 일반 은총의 영역이 아니라 특별 은총의 영역이다.


특별 은총은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일반 은총의 영역은 자연법을 근거로하지만 특별 은총의 영역은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특별 은총은 일종의 수동성을 가지고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르심의 자리에 서야했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성령께서 주체가 되시기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동 방식은 자칫 인간의 일이 될 수가 있다.


바울의 사도직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는 오직 값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의 본능적이고 능동적인 생각과 행동은 자칫 복음의 이름으로 성령을 거역하는 일을 할 수도있다.


인간은 원래 본능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때 가장 편하고 자연스럽다.


복음을 말하고 생각하고 전하는 일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출발된다면, 엄청난 에너지가 요구되고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따르게되며 여러가지 부작용을 낳게 되기도한다.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은혜로말미암지는 부르심을 받지 않고는 복음의 영역에 접근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과거의 자신의인간적인이고 능동적인 열심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음을 은혜를 경험하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모세는 40세에 나름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인간적인 열심을 내었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모세는 자신의 의지적 노력이 완전히 상실된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자신의 공로와 능력은 복음을 전하는 근거나 동력이 될 수가 없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아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문제들은 대부분 교회가 인간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있기 때문에 생기게된다.


참된 목회는 바울과 같이 은혜 가운데 수동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 직분을 받은 자만 하여야하지만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홍수에 마실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이 교회는 차고 넘쳐나지만 정작 은혜를 경험하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가 않다.


인간의 능동적인 행동 방식은 자칫 특별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어야 할 교회를 일반 은총에 속한 기관으로 변질시켜버린다.


사람들의 욕심은 신학교를 제도적 교육기관의 한 가지로 추락시켜버렸다.


누구나 자신이 원한다면 부르심에 관계없이 신학 교육을 이수하고 목회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성령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학교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제도적 기관이지만 제도적 기관이라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기관인 것은 아니다.


바울과 같이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고백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있어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


5절의 문장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었다.


나름 대로 5절을 좀 더 쉽게 다시 번역해서 이해해 보고자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으니, 이로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위해서,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믿음으로부터 오는 순종에 이르는 자들이 생기도록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의 순종을 위해서 자신이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요구되었던 율법에 대한 순종과는 다른 믿음의 순종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이다.


믿음으로부터 말미암는 순종에 대한 번역들이 번역서마다 조금씩 달리 표현되어있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믿음의 순종the obedience of faith:ESV

•믿음으로부터 오는 순종the obedience that comes from faith: NIV)

•믿고 순종하도록; 현대인의 성경

•믿고 순종하게; 새번역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이미 믿음의 순종을 전하고자하는 결론을 말하고있다.


바울이 말하고자하는 내용은, 구원이 유대인에게 한정되어 율법의 행위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행위가 아닌 믿음의 순종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복음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 즉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얻을 수 있는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토록 어려웠던 구원에 이르는 길이 믿음이라는 너무나도 쉬운 방법으로 대체되어 제시된 것이다.


율법을 힘들게 지키며 애쓰는 이들에게는 황당한 말로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껏 구원은 율법을 맡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방인들에게도 문이 열렸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며, 더군다나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은 과히 혁명적인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복음은 놀라운 것이지만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구원 자체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믿고 의지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돈과 과학기술이며, 발달된 정보 통신은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서 하나님을 외면하게 만드는 거짓 것들이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결코 에덴의 발전이 아니라 인류를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유혹일 뿐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데후 2:11-12)"



이방인에게도 요구되는 순종


"모든 이방인 중에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이를 좀 더 쉽게 해석해보면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의 이름을 위힌 믿음의 순종…"


이를 나름대로 의역을 해보면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이제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자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이…."


이를 풀어서 묵상해 보면 궁극적으로 아담 안에서 불순종하였던 모든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을 성취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야한다는 것이다.


순종에 관하여는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귀결된다.


이방인인 로마에 있는 성도는 믿음의 순종, 즉 그리스도의 순종을 소유한 이들이다.


이방 성도에게 순종이 요구되었던 순종은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공로적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 믿음의 순종이었다.


믿음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의 순종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를 왕으로삼는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말해준다.


순종의 의미에는 종속 관계가 내포되어있다.


종속 관계는 궁극적으로 왕국의 성립에 있으며, 순종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왕에 대한 종속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순종이며 이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 요소인 왕과 백성을 연결시켜주는 접착제와도 같은 것이다.


이방 그리스도인에게도 순종이 요구됨으로서 모든 나라에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됨으로 인해서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고있다.


이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을 통하여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를 성취하셨으며, 이는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소위 문화명령이라 부르는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주어졌던 하나님의 통치 명령이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통치명령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됨으로서 믿음의 순종을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또 다시 요구되지 않는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을 위한 조건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를 성취하심으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은 이미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을 약속한 것이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종말을 살아가지만 아직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극치consumation의 시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믿음의 순종에 의지한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인으로 인정받았기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성취된 것으로 인정된 것이다.


성도는 비록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의인으로 인정되어도 사는 동안에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하듯이,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여야한다.


통치 명령은 이미 성취는 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통치 명령의 성취와 완성 사이에는 대위임령만 있을 뿐이다.


통치 명령의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실행하여야할 과제가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명령을 위한 문화변혁이라고 주장하지만 바울은 로마에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는 차원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고있는 것이다.



믿음의 순종으로 말미암는 의와 의의 전가


순종은 의를 얻기 위한 요구 조건이다.


순종이라는 용어 자체가 내포하는 행위의 요구로 인해서 인간은 자기 공로적인 행위를 통하여 의를 얻으려고한다.


하지만 믿음의 순종은 인간의 공로가 배제된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순종을 받아들이는 행위로서 일종의 전가 개념이다.


믿음의 순종으로부터 말미암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는 의의 전가를 근거로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순종의 행위는 공로와는 무관하다.


바울이 받은 소명은, 모든 이방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순종에 참여하여 예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도록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쓴 편지는 이러한 소망을 로마의 그리스도인과 공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소명이 무엇인지 밝힘으로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이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있다.


바울은 자신이 은혜로 받은 소명이 로마에 있는 신자들이 받은 소명과 동일함을 설명하고있다.


바울의 바램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이방 나라 가운데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어 신자들이 믿음의 순종에 이르도록 하는데 동참하길 원하는 것이었다.


비록 신자는 사도가 아니지만, 신자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은 은혜와 직분을 이어나아가야한다.


소명이 자신의 능력에 근거한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인간은 교만해질 수 밖에 없다.


바울은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로를 위한 소명은,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께 인정받아야만 하기에, 필연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게 할 수 밖에 없다.


능력에 근거를 둔 이들은 공로적 개념을 가지게되며, 믿음의 순종이 아니라 공로적 순종을 강요한다.


이들은 믿음보다는 자신의 행위가 동력이 되어,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한다.


성도는 이미 전적으로 부패하여 자신에게 근거를 둘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오직 믿음에 의지한 순종, 즉 믿음의 순종에 의지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을 감당하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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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4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성결의 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은 성결의 영, 즉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사망의 권세로 죽으신 그리스도를 다시 일으키심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지속하신다.


성령은 처음 창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새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여하신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죽음에 생명을 부여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이 세상의 처음 창조의 주체이시며, 창조된 세계가 완성되기까지 주체가 되신다.


창조 세계의 완성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임하게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심으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죽음의 땅 위를 운행하시면서 처음 창조 사역을 진행하셨다.


홍수의 물을 마르게하셨고, 홍해의 물을 가르셨고,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품으셨으며, 참 이스라엘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다.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있던 세상을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능력으로 일으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신다.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극치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성령은 신자를 거듭나게하신다.


신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한다.


거듭난 신자는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있지않은 새로운 창조물이다.


신자의 변화는 표면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원적인 변화다.


존 머레이는 이를 결정적 성화라고 표현한다.


결정적 성화로 거듭난 성도는 성령의 지속적인 간섭하심을 통하여 점진적 성화의 과정을 거치게된다.


변화시키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는 삶을 멀리하여야한다.


교회 안에서 세상의 축복을  추구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을 거역하는 것이다.


기복신앙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모양만의 신자들의 모습이다.


교회가 사회로부터 받는 비난은 대부분 거듭나지 않은 모양만의 신자들이 육신의 소욕을 쫓아감으로 인한 것이다.


성도는 성결의 영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심판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한 부활체의 모습으로 부활될 것을 소망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야할 것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이 죽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인간의 죽음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이들에게 임하는 마땅한 결과이지만,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가 아닌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에게 육신의 죽음은 마땅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시지 않으셨다면 이 땅에서 영생하실 자격이 있으신 존재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 다음은 심판이 있게된다.


이미 육신이 죽은 인간도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택함받은 자에게 가해질 정죄를 짊어지시며 최후의 심판을 대신 담당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은 육신이 살아있는 성도뿐만이 아니라 믿음 가운데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에게까지도 최후의 심판에서 구원해주시는 능력이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성도에게는 더 이상의 정죄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힘이었다.


아담은 범죄한 날에 죽었다.


바빙크는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수백년을 더 살았다고 말하지만 이는 단지 육신만 살은 것이었을 뿐이며, 실상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로 산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은 육신이 살아있다고하더라도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존재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택하신 자를 대신하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며, 그리스도의 살아나심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될 성도들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성도는 비록 육신은 죽을 것이지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순종의 공로를 전가받음으로서, 완전하게 순종한 자로 여김을 받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할 것을 약속받았다.



(부활하사)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혼돈에서 질서로, 무에서 유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능력이시다.


성령의 창조 사역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순종을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을 성취하셨다.


완전한 순종을 이룬 자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상급을 누리게하기 위해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케하신다.


성도의 죽음은 단지 육신의 죽음 뿐이다.


성도의 이 땅에서의 육신의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의 세계에서는 성도의 처음 부활이다.


성도의 두번째 부활은 하늘과 땅이 연합되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이루어질 것이다.


성도에게 육신의 죽음은 이 땅의 관점에서는 슬픔과 이별이지만 하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처음 부활인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아담 안에서의 정죄에 대한 죽으심이기에 성도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나무가 되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신자에게 부활을 허락하신 것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완전한 순종을 하였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으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순종으로 생명나무에 이르는 차단되었던 길을 다시 열어주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나무의 첫 열매로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육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더 이상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게될 것이다.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에는 성령의 함께하심이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심으소서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을 함께 하셨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은 성령의 함께 하심의 결과였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순종은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행위 언약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미 범죄한 아담은 더 이상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시기에,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순종의 요구를 이룰 능력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연약한 몸으로 오셨기에 성령의 도우심과 위로하심이 있으셨다.


그리스도께는 처음 아담보다도 더 많은 요구가 있었다.


처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문제까지도 담당하셨던 것이다.


두번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순종은 처음 아담에서와 달리 두 가지로 성격이 구분지어져야했다.


하나는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 즉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능동적 순종과, 처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 즉 십자가에서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이루신 수동적 순종으로 나뉘어야한다.


죽은 자는 스스로 부활할 수 없다.


스스로 부활할 능력이 있다면 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완전한 순종에는 처음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영원한 생명과 축복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의 공로에 대한 상급을 누리게하는 성령의 역사였다.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언약을 행위 언약으로 보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하게 행위 언약이었다.


영생은 행위 언약에 대한 상급이었기에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도 장차 누리게될 하나님의 축복이다.


처음 아담의 대표성 만큼이나 둘째 아담은 성도를 대표한다.


처음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저주를 받았고 모든 인류가 죽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취득하심으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누리는 영생의 복을 누릴 것이다.


영생을 얻으신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의 결과물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은 성도는 성령의 능력에 의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한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성화의 삶을 사는 성도는 주변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됨)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은 완전한 순종을 성취하신 다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아들이 되기 위한 조건은 순종이었으며 이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뿐만이 아니라 처음 아담에게도 요구되었던 것이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마치 아들이 아빠를 닮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이는 조건적인 것이었다.


순종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유지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순종이 없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유지될 수가 없기에, 아들로서의 아담에게는 당연히 순종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조건은 아담과 맺어진 행위 언약에 담겨있었다.


행위 언약의 조건을 수행하지 못한 아담은 아들의 자격을 박탈당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아들의 자격은 순종을 전제로한 한시적인 것이었으며,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영생에 이르러야만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들로 부르셨지만(출 4:22), 그들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에 아들이 될 수 없었다.


참 이스라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들로 부르심을 받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 아들로 선포 되셨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아들로 선포되신 것은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달리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창조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은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신자의 거듭남은 성령의 창조 능력의 결과물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맏형이 되시기에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마찬가지로 부활에 참여하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능동적 순종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는 하나님의 순종에 대한 요구가 다 충족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처음 아담과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심을 받았다.


아들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선포된 아들은 아니었다.


아들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들로 선포되지는 못하였다.


아들로 선포되기 위해서는 순종이라는 요구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했다.


처음 아담과 이스라엘, 그리고 둘째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의 요구는 다 같지가 않았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 요구되었던 순종은 이스라엘과 달리 죄가 없으셨기에 불가능한 순종은 아니었지만, 처음 아담과 달리 죽음을 요구하는 최악의 순종이었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아담에게 선택의 능력이 있었던 자유 의지가 있었던 상태였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자유 의지와 순종의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누군가 자유 의지와 능력이 있는 구원자의 필요성을 깨닫게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지를 깨닫지 않고는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은 자신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거부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처음 아담과 달리 대적자들을 상대하시면서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초래된 죽음의 문제까지 총체적으로 담당하셔야만 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는 택하신 자를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수동적 순종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한 율법의 요구를 모두 다 충족시킨 능동적 순종도 담겨있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수동적 순종만을 전가받는다면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도 없다.


어떤 이들(대표적으로 페더럴 비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동적 순종의 개념에서만 이해하고 능동적 순종의 의미가 담겨있음을 부정한다.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거부하는 이들은 성경의 어느 곳에도 예수가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기록이 없다며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거부한다.


십자가에는 죄의 형벌인 수동적 순종 뿐만이 아니라 죄인을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능동적 순종이 담겨있다.


능동적 순종의 개념은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언약이 행위 언약이었음을 전제로 한다.


능동적 순종은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율법이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이 재연된 것임을 전제로한다.


물론 율법에는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이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 재연된 것이다.


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고 기록하고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신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택하신 자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심으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율법은 사랑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 앞에서 더 이상의 어떠한 것도 요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은 율법의 기능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기에 율법을 다 지키면서 율법의 기능을 계속하게하는 것보다도 더 차원이 높은 것이다.


울법이 살아있어 기능을 계속하는 한에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사람이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그 역할을 다 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정하는 것이며, 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서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인간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형벌의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신자에게는 더 이상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다.



새관점은 아들의 신앙이 아니다


새관점은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을 인정하지 않는다.


새관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고 택한 자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거부한다.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인정하지 않기에 신자에게 최종적 구원을 위한 윤리적 행위를 요구한다.


새관점에서는 산상수훈을 또 하나의 윤리적 규범으로 적용함으로서 신약에서의 율법의 역할을 하게한다.


새관점에서는 아들의 신앙을 거부하며 오직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요구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이다.


새관점에서 그리스도는 신자에게 또 하나의 행함의 과제를 주는 분이며,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일 뿐이다.


톰 라이트는 분명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전하려는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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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로마서 2020. 7. 19. 22:21

로마서 1장 3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것은 아담으로 인하여 상실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하였어야했는데 아담은 범죄함으로서 그 역할을 상실하였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왕권을 지상적으로 표현함으로서 이 땅에 왕으로 오실 둘째 아담을 예비하였다.



다윗, 하나님의 왕권의 회복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다윗을 거쳐서 아담으로, 그리고 하나님까지 올라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것의 의미는 다윗의 왕권이 이 땅에 표현된 하나님의 왕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예비하신 모형과 그림자다.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다윗왕은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들과 왕이신 그리스도로 구현된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이 온전하게 실현되었다는데 의미가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왕이었다.


비록 다윗은 하나님의 왕권을 가나안 지역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한적으로 표현하였지만, 왕이신 그리스도는 참이스라엘 백성인 모든 신자들의 왕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 분이시다.


다윗의 왕권은 하늘과 땅의 연합을 궁극적인 목적으로한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혈통으로 이어지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육신으로 구현하였다.


다윗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왕권에는 항상 하나님의 왕권이 함께하였다.



아담으로 인하여 상실된 하나님의 왕권


아담에서 다윗 이전까지의 계보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권이 표현되지 않았던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아담에 의하여 상실되었던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이다.


다윗의 왕권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될 이 땅에서의 왕권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다윗의 왕권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대표하는 왕이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로 표현되는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인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왕이 되신 것의 모형이었다.


다윗은 성전을 짓기 이전에 시온에 왕궁을 지었다.


시온에 세워진 다윗성은 하나님의 통치의 표현이었다.


다윗이 도성으로 정한 시온성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시온에서의 통치를 이 땅에 모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시온성은 에덴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졌던 하나님의 산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이 땅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다윗의 시온성에서의 통치는 이미 출애굽한 이스라엘 가운데 좌정하시어 시내산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예비적으로 준비되었다.


처음 창조시에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는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산에서 실행되었다.


다윗의 시온에서의 통치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의 재현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육신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육신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의 모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육신은 원래 하나님의 영과 대립되었던 관계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연합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통로였다.


육신과 영이 대립적 관계가 된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다.


육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모습으로서, 이 땅에서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상실되었던 하나님의 왕권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회복된다.


왕국의 3가지 구성 요소는 왕과 백성과 영토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 다윗 왕과 이스라엘 백성과 가나안 땅이라는 3가지 요소로 왕국이 이루어졌다.


육신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아담의 범죄에서 자유할 수 없었기에 죄로 인하여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모형으로서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실체로서의 하나님나라가 임함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게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심으로서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극복되고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왕으로서의 다윗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가 모형적으로 이 땅에 표현된 것으로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유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유대 이스라엘을 이 땅에 완성시키시는 분이 되어야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다.


톰 라이트는 교회가 이스라엘의 확장이라고 말하지만 유대 이스라엘과 교회는 연속선상에 있지않다.


이는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이 연속선상에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육적인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육적인 이스라엘의 완성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아니라 실체가 오면 없어질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아담의 범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땅에서의 이스라엘과 가나안은 아담과 에덴, 그리고 신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하지만 아담의 범죄가 해결되지 않는 연속은 있을 수가 없다.


톰 라이트는 아담의 범죄가 아브라함 언약에서 암묵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함으로서 육적인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의 범주에 넣으려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 오신 것은 아담의 죄성을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인류 가운데 자리잡은 아담의 죄성을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다윗 왕은 아담의 죄 안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였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다윗의 철저한 회개 위에 오신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다윗과 왕으로서의 다윗


다윗은 처음 아담의 후손이었으며 동시에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야하는 하나님의 왕권을 표현하는 왕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다윗에게 범죄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였다.


다윗이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윤리적인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범죄의 고통이었다.


다윗의 간절한 간구는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을 넘어서 인간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근거한 근원적인 구원을 위한 간구였다.


다윗은 자신 가운데 드러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죄악된 모습에 고통스러워하면서 끊임없이 구원자를 간절히 구하였다.


다윗의 간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것이었으며, 다윗에게 있어서 이는 행위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문제였다.


다윗의 간구는 더 이상 행위에 대한 요구보다는, 행위를 넘어서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은혜를 위한 간구였다.


간구는 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애굽에서 고통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였지만 자신들 가운데 있었던 근원적인 죄를 직면하지는 않았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존재의 문제 이전에 행위의 문제와 씨름하였고 존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서 멸망이 이를 수밖에 없었다.


유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톰 라이트의 근원적인 문제도 그의 주장이 행위론적 구원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합당한 행동의 요구를 감당할 능력이 없음이 증명되었으며,  다윗은 이를 깨닫고 좀 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구원을 위해 간구하였던 것이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인간의 죄악된 본질 자체를 위한 것이었다.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그리스도는 행위론적으로 본을 보여주신 분이기 이전에 존재론적으로 인간의 죄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다.


바울이 전하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는 표면적인 행위를 넘어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것이기에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접근방식은 절제되어야한다.


다윗 왕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했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으로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반만 인간이며, 반만 신이라면, 온전하게 인간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할 수 없다.


혹은 그리스도가 가현적인 존재라면, 그리스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실 수도 없으시며, 그리스도의 속죄는 실제적으로 인간에게 적용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사람이시면서, 완전한 하나님이시기에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하나님 앞에 설 수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연합을 이루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하늘과 땅, 즉 비가시적 천상의 세계와 가시적인 이 땅을 창조하셨다.


에덴은 하늘과 땅,즉 비가시적 세계와 가시적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됨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이 연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아담은 범죄함으로서 이 땅이 하늘과 단절되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존재하는 하늘을 경험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거룩함에도 참여할 수도 없게된  것이다.


구원의 최종적 종착지는 하늘과 땅의 연합을 이루는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실현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시고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심으로서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께 이 땅을 귀속시키신 것이다.


가나안을 다스렸던 다윗의 왕권은 이 땅을 다스릴 그리스도의 왕권은 예표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다윗의 혈통에서 나셔서 아담이 실패하였던 순종을 완성하시고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심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의 토대를 마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땅의 문화변혁보다는 소망 가운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실천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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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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