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10절 묵상
10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뜻 안에서 구하는 기도
바울은 로마에 가고자하는 자신의 간절함이 자신의 마음 중심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자신의 뜻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종속시킨다.
바울의 기도와 원함은 순종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생각될지라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지않는 행동 방식은 불순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죄성이 끊임없이 작용하고있기에 기도는 인간적인 죄성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종속시키는 중요한 방법이다.
처음 아담과 달리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심으로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순종하심을 보여주셨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보다는 자신의 육신이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기도는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에 복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제어하는 방법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면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기까지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철저한 순종의 길을 걸으실 수 있으셨던 것이다.
기도가 없는 방법론적인 순종은 기계적인 행동이며 이는 불순종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행동이다.
기도는 형식적이고 자기 의를 이루는 공로적 순종을 제거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맺는 수단이며, 행함 이전에 함께함이라는 의미를 부여해준다.
만약에 자녀가 부모와 소통하지도 않으면서 알아서 부모가 기뻐하실 일을 한다면 부모로서는 기쁨보다는 섭섭함이 많을 것이다.
소통이 없는 행함은 일꾼도 할 수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로봇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를 만남으로서 서로의 믿음으로 안위함을 얻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힘을 얻고 안위함을 얻는 방법이다.
로마의 성도들을 위한 하나님과 바울과 로마의 성도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기도는 또한 일꾼이기 이전에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일꾼으로 부르시기 이전에 자녀로 부르셨다.
성도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순종시킴으로서 자녀의 조건이 되는 순종을 이룰 수 있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다.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름으로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가까이 하기에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평안 가운데 다가갈 수 있는 힘과 기쁨이 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된다.
바울에게 로마에 있는 성도는 바울의 마지막 과제이면서도 바울을 더욱 기도로 강건하게 무장해주는 대상이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의지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모든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일그러진 의지를 가지고있기에 자신의 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의 조화를 위해서는 기도하면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 안에 두려는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은 로봇과 같은 기계가 아닌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의지적 노력을 인격적으로 존중해주신다.
타락 이전의 자유 의지가 타락과 더불어 손상되었기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타락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예정이라는 관점으로 운명론적인 해석을 하려고하지만, 순종하는 자녀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인격적인 관점에서 순종하며 응답하여야한다.
거듭난 신자는 더 이상 처음 아담의 불순종의 권세 아래 있지 않기에 자유 의지를 행사하여야하지만, 아직 죄성을 입은 육신 안에서 살고 있기에 육신을 입고있는 동안에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불완전성 가운데 의지를 행사하여야한다.
기도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불완전함을 극복하며 자유 의지를 회복시키는 방법이다.
참된 자유 의지는 기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기도는 처음 아담 안에서의 불순종이라는 잘못된 습성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뜻 안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방법이다.
육신을 위한 행함은 자유 의지의 결과물이 아니다.
육신의 원함을 제어할 때 진정으로 자유 의지가 있는 것이다.
신자라 할지라도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인간적으로 연약하기에 육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자녀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복종시켜서 하나님의 뜻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에 가고자하는 자신의 계획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 의지의 결과물이 되기 위해서, 바울은 쉬지 않고 로마의 성도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전도 여행을 위해서 기도한 것이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 못지 않게 자신의 육적인 욕심에 묶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지혜와 능력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였을 것이다.
신자가 넘어서야할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아직도 자신을 얽어매어 육신의 소욕에 종속되도록하는 사단의 계괴를 극복하는 것이다.
기도가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한 것이 된다면, 이러한 기도는 자신을 더욱 육신의 노예가 되도록 얽어매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얻어야할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내기 이전에 자신의 죄성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한 기도가 되어야한다.
기도를 하였음에도 주어지는 난관은 자신의 인간적 죄성을 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도록 하나님께서 훈련을 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순탄하지 않은 상황을 허락하시는 것은 성도 안에 있는 인간적인 죄성을 다스리시고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바울은 감옥에서의 순탄하지않은 여정 가운데 자신의 죄성을 다스리면서 참 자유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수 있었다.
성도의 의지가 하나님의 예정과 충돌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는 하나님의 사람의 간절한 기도는, 자신 안에 있는 인간적 죄성을 다스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의 대립 관계는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기도는 이러한 대립 관계를 해결해주는 방편이 된다.
바울이 보여준 로마에 가고자하는 간절한 소망은 기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면서 참된 의지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좋은 길과 순탄한 길
바울은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순탄한 길이 아니어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갈 수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기를 원했다.
바울이 구했던 좋은 길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좋은 길은 인간 안에 내재한 죄성이 싹틀 수 있기에 결코 좋은 길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죄성을 억제하는 길은 결코 순탄한 길일 수가 없다.
좋은 길은 사탄이 싫어하는 길이며 사탄의 방해는 필연적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탄 조차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세상적인 신자라면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는 것을 조롱하였을 것이다.
아마 하나님께 벌받아서 죄수의 신분이 되어 로마까지 끌려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찌보면 로마에 죄수의 신분으로 가는 길이 수치스러운 길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여정은 인간적인 순탄한 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식은 인간의 방식과 다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이들의 모습은 세상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장로가되며 세상적인 까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목회자가 대접받는 커다란 교회당에서 자신을 성공한 모습으로 포장하려는 이들은 교만의 길에서 벗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낮아짐의 자리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어내며 하나님의 좋은 길을 걸어가는 신자는 비록 신앙의 여정이 순탄하지 않아도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취하시는 귀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순탄한 길이 좋은 길이라는 생각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일 뿐이다.
길이 막히는 상황에서의 자신의 욕심과 하나님의 뜻
신앙의 여정에서 가장 힘든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자신의 욕심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던 신앙의 여정이 길이 열리지 않거나 엄청난 방해로 좌절하게되는 경우 종종 혼란에 빠지게된다.
자신이 영적 전쟁에서 패배를 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길인지 분별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시험이 따르게된다.
에덴에서의 시험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진입하기 위한 시험의 과정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시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던 것도 아담과 이스라엘의 상황을 재연한 면이 있다.
이와 달리 이미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여정 또한 종종 시험과 역경을 마주한다.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로마로의 여정을 죄수의 신분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 만났던 풍랑은 그를 더욱 힘들게하였다.
신자는 믿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죄성을 가진 육신으로 살아가기에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쉽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자신의 존재까지 변해있는 것은 아니다.
죄성을 가진 육신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신자는 더욱 깨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면서 난관을 극복해 나아가야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부딪히는 난관과 역경들은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면 사탄의 방해냐에 앞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이 있다.
마귀와의 싸움은 자칫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수도있다.
마귀를 내어쫒거나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교만이다.
신자라도 종종 상황을 불평하거나 자신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강변하기도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난관이 겸손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기 이전에 자신의 목이 곧음을 생각해보아야한다.
겸손하지 못한 인간은 끊임없이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역경을 통해서 자신의 목이 곧은 성격이 다듬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고 성령이 앞서나가 일을 이루신다.
실패와 좌절이 없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교만해질 것이다.
인간이 교만한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고 있는 한에는 시험과 역경은 필연적이다.
부딪히는 시험과 역경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면서 사랑의 채찍이다.
인간은 자신이 왜 채찍을 맞아야하는지, 왜 자신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지만 인간은 잘못을 행함 이전에 본질적으로 죄성을 가진 존재이다.
죄성을 가진 인간에게 고난과 역경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역경을 통해서 겸손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무한히 자기의 뜻을 펼칠 것이고 필연적으로 파괴될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가고자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바울의 기도는, 자신이 아직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죄의 성품을 가지고있기에,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여야만했고,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좋은 길을 주시기 위해서 역경을 허락하신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열심이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더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켰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마음의 중심을 아신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인간적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도 있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신다고 낙담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자녀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며 이는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라고 최상의 기도 응답일 수가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아직 이 땅에서 죄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미와 아직의 긴장 가운데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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