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9절 묵상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아들의 복음 안에서)
아들의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복음이다.
아들의 복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리에 초대해 주는 복음이다.
아들의 복음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알려주는 복음이다.
아들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아들의 복음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임을 선포한다.
아들의 복음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의를 외친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던 사울에게도 아들의 복음이 없었다.
아들의 복음을 배제하였던 사울의 열심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서 출발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들을 핍박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아들을 배제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은 교만을 드러낼 뿐이다.
아들을 거부하였던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무슬림도 마찬가지이다.
아들을 배제하는 종교와의 대화는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던 인간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아들의 자격이 박탈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아들의 자리를 거부한다.
모든 인간은 어떠한 행동을 하던 간에 이미 아담 안에서 아들의 자격이 박탈 당하였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기에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다가가야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아들이 없이는 교만과 자기 의로 결론 지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대표성을 가진 아담 안에서 결정되어지는 존재이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대표한다.
신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둘째 아담의 대표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존재이다.
거듭난 바울에게 하나님은 아들의 복음 안에서 심령으로 섬기는 아버지가 되신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아버지의 증거이다.
바울은 자신이 기도할 때 로마의 성도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고 있음을 아버지가 증인이 되신다고 말함으로서 자기를 증거한다.
이는 자신의 모든 행동 방식이 하나님에 의해서 검증되어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들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할 수가 없으며, 아버지를 증인으로 내세울 수가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로서, 아버지 안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다가가고있다.
아들의 복음 vs 하나님의 복음
바울은 1절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그리고 9절에서는 아들의 복음을 말하고있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복음은 아들의 복음과 동일하다.
바울에게 아들의 복음은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아들에 관한 복음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아들의 복음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출애굽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아들의 나라가 아니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의 모형과 그림자였지만 아들이 없었기에 실체로서의 하나님 나라가 될 수가 없었다.
아들이 없는 복음은 명령과 요구만와 자기 의만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택하신 자를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초대한다.
복음은 아들의 자리에 초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들은 복음의 실체이며, 복음의 몸통이다.
복음은 아들에 관한 것이며, 아들이 없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처음 아담 안에서 아들의 자격이 상실되었기에 둘째 아담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아들의 자격이 회복될 수 있다.
아들의 복음은 신자를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복귀시키는 복음이다.
아들의 복음만이 참된 복음인 것은 아들의 복음만이 은혜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또 다른 과제가 주어진다면 이는 아들의 복음이 아니며 은혜의 복음도 아니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본받아 공로적 삶을 요구하는 변질된 복음이다.
새관점에서의 주장은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또 다른 과제가 주어지기에 이는 아들의 복음도 아니며 은혜의 복음도 아니다.
톰 라이트는 새관점이 은혜를 말하고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말하는 은혜는 반쪽 짜리 은혜이다.
새관점에서는 이미 유대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은혜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기에 새관점은 은혜의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머물 수 있었지만 행동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행동 방식의 문제를 고쳐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적이고 혁명적인 행동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의 행동 방식에 의해서 최종적 구원이 결정된다는 펠라기우스적 행위 구원론의 범주에 속하여있다.
톰 라이트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 몸통이고 출애굽 이전과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와 꼬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예수는 구원자 아들이 아니라 교사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아들의 복음이 아니며,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아들의 나라가 아니다.
새관점에는 오직 백성의 개념만 존재한다.
하지만 그가 자주 말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나라 백성이 아니다.
그에게 신약의 교회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의 중심이 된 확장된 유대 이스라엘일 뿐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왜곡시킨 거짓된 복음일 뿐이다.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기도는 처음 창조 세계의 회복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창조 사역이다.
새생명의 탄생을 위해서는 사랑과 관심과 노력과 수고가 뒤따라야한다.
바울의 로마의 성도를 향한 열심은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의 노동자의 열심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부모의 열심만큼이나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간절함이 담겨있다.
사랑과 관심이 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불행한 존재일 뿐이다.
로마에 있는 성도는 단순한 새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생명체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새생명이 탄생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기도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다.
이는 처음 창조의 하나님의 기쁨의 회복이다.
참된 인간성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만 가능하다.
바울의 로마 성도를 향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은 창조시 인간 사이의 원래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바울의 이방 성도를 향한 간절함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희생적 사랑에는 처음 아담 안에서 타락한 택한 자를 향한 그리스도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바울의 로마의 성도들을 향한 간절함은 그리스도의 택한 자를 향한 간절함의 반향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면서 끊임없이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의 기도에는 택한 자를 향한 간절한 사랑이 담겨있었다.
바울의 이방인을 향한 간절한 기도에는 아담 안에서 타락한 택한 자를 향한 그리스도의 간절함이 담겨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는 논리적인 이론을 넘어서는 간절한 사랑이 담겨있으며, 바울의 기도에도 간절한 사랑이 담겨있다.
간절한 사랑을 기반으로하는 끊임없는 기도는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오직 서로를 향한 간절한 기도와 사랑만이 진정한 창조 세계의 회복이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바울
로마에 있는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였기에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에 있는 자들이었다.
이미 예정된 이들을 위해서 왜 바울은 쉬지 않고 로마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여야했을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예정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기도가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
바울이 로마에 가기 위해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다른 이들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실 수도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쉬지 않고 로마의 성도를 말하면서 로마에 가기 위한 좋은 길 얻기를 구했을까?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바울을 사용하시지 않으셨을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손해보시는 것일까?
왜 바울은 기도를 했어야만 했을까?
어짜피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이들을 위해서 바울은 너무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은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는 사람이기에 자신의 사역의 열매를 위해서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수고가 꼭 필요함을 알고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그만큼 새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힘든 영적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인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영적인 존재이다.
성도의 삶은 끊임없는 영적 전쟁 한 가운데서의 삶이다.
세상 나라의 전쟁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그만큼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루어야한다.
성도는 결코 혼자 영적 전쟁을 치러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도가 아니고는 결코 하나님을 심령으로 섬기는 일에 승리할 수가 없다.
초대 교회에 가해진 핍박만큼이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인을 향한 핍박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다.
맑스의 유물론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한 결과물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단순한 외형적인 형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은 마치 태어난 아이가 부모를 닮는 것을 넘어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는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서 하나님의 속성을 담아낸 존재이다.
이러한 존재들에 대한 접근은 기도와 눈물을 흘리는 사랑이 없이는 어떠한 결실도 맺을 수가 없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들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한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면서도 사단의 종으로서 사단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단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인간은 압살롬과 같이 아버지를 대적하는 자가 되었다.
인간은 인간이 얼마나 심오한 존재인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인간은 인간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감각이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은 충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바울이 생각하는 로마에 있는 성도는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쉬지 않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만나기를 소원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며, 또한 그렇게 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수고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있는 존재로서 사랑과 기도가 아니고서는 표면적으로 밖에는 접근할 수밖에 없다.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은 이미 사단에 의해서 점령당한 존재로서 인간적으로는 변화를 시킬 수 없는 견고하게 무장되어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단순히 도덕이나 윤리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을 점령하고있는 사단의 세력은 쉽게 기득권을 포기할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적으로 반격을 가하기도한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자하는 일은 사단에게 선전포고를 하고서 전쟁을 치르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물리치셨고 사단이 패배를 하였지만 최후의 심판 때까지는 결코 쉽게 물러서지는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사단은 이미 이 땅에서 패배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아담의 죄성을 가진 인간들 사이에 기거하면서 끝까지 반항하는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는 영적 전쟁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단순히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기도와 눈물로 이루어가는 고난의 여정이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말하며 끊임없이 시도하였던 것은 사단과의 전쟁이 결코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여 성도들과의 교제한 후에 맞이했던 상황은 바로 로마의 화재와 네로 황제의 핍박이었다.
바울도 이로 인하여 목숨을 잃어야했으며 수많은 성도가 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되어 죽어가기도하였다.
바울의 기도에는 이러한 모든 핍박을 이겨낼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을 구하였던 것이다.
변화 되어야할 인간 사이의 관계성
인간은 인간을 가장 두려워한다.
인간은 인간을 해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존재를 없애야만 하는 경우도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경쟁하면서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는다.
그나마 인간은 육신의 자녀를 통해서 자신 안에 남아있는 사랑의 본능을 발견하게된다.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귀한 존재이다.
이 땅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림자이다.
인간에게 타락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랑을 나누는 공동체 안에서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랑을 나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긴장감 가운데 존재한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은 핍박하여야할 대상이었지만 이제 사랑하여야할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바울은 이제 자신은 핍박을 받으며 성도를 사랑하는 존재가 되었다.
바울은 육신으로는 감옥에 있었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삶을 살고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긴장 사이에서 사랑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시키고있다.
성도는 서로 사랑하면서 왜곡되고 일그러진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회복시키는 일원이 되어야할 것이다.
기도와 성령의 창조 사역
복음 전파는 하나님이신 성령의 창조 사역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 사역은 성도와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이루어나아가는 수단이다.
기도가 없이는 인격적 관계가 성립될 수 없다.
기도는, 어떠한 일을 앞두고 그 일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바울의 기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보여준다.
바울이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바울의 기도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비록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손상되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으로서, 성도에게 기도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바울의 기도는 로마의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성령의 창조 사역의 한 가지였음을 보여준다.
성령은 성도의 기도와 함께 움직이시지만, 성도가 먼저 앞장서게 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보다도 앞서 나아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다.
인간이 앞서서나가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바울의 기도는 바울이 로마에서 사역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로마에서 사역하시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기도는 하나님을 앞세우면서, 뒤따라가는 방법이다.
기도없이 하는 일은, 하나님을 뒤에 계시게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앞서는 공로적 행동이다.
기도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은 성령의 역사이기에 성도에게 공로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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