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장'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1.11 :: 사도행전 5장 27-42절 말씀 묵상
  2. 2018.01.10 :: 사도행전 5장 12-26절 말씀 묵상
  3. 2018.01.09 :: 사도행전 4장 32-5장 11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18. 1. 11. 22:40

사도행전 5장 27-42절 말씀 묵상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이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다.

예수의 피를 자기들에게로 돌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다,.

문제의 해결은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유대 이스라엘도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여야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도될 수 있었듯이, 대제사장의 무리들도 자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을 인정하여야 해결책이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죄를 인정하길 원치 않는 속성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발전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발전은 결국 그리스도를 죽이는데까지 발전한다.


그리스도를 죽인 대제사장 무리들은 가룟 유다와 같이 스스로 양심의 가책에서 나오는 말을 하고있다.


사실 사도들은 정죄를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 것만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똑같은 상황도 마음이 강퍅한 이들에게는 부정적이 될 수 밖에 없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사로이 논쟁하는 것보다 원론적인 답변을 한다.


사도들의 원론적인 대답은 이 땅에 대한 사단의 지배권이 상실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성령의 새창조는 사단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기에 더 이상 사람의 관계성에 묶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성령의 새창조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의 순종과 아들되심의 선언을 근거로하는 활동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사람에 대한 사단의 지배권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동시에 더 이상 사단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선포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말하는 순종을 그리스도의 성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열매이다.


하나님 나라는 순종을 요구한다.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이 땅에서의 성부 하나님의 왕권이 선언되는 것이다.


사도들이 말하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사도들의 직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데는 나온 말이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림받기를 원하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서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진정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목회자나 성도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삼위 하나님의 영원 가운데 약속하신 구속 언약이라는 말씀을 근거로 육신이 되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택한 자를 대신하시는 순종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을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성도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오직 말씀을 근거로하는 순종이 동반되는 삶을 살아야만 할 것이다.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사도들이 “너희가”라고 지적했듯이 유대인들이 바로 예수를 죽인 자들임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순종은, 성부 하나님께서 창세 전 구속 언약을 통하여 약속하신 성자 예수님의 아들되심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들의 순종에 대한 아버지의 응답이었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한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었기에, 아담의 범죄는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었다.


자기 의를 세우려는 유대인의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하기 위한 하나님께 대한 대적 행위였다.


전적인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공로적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의로 포장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다.  


톰 라이트는 예수의 죽음이 로마와의 충돌 방식에 대한 한 가지라고 주장하지만, 예수를 나무에 달게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은 특정 세력으로서의 로마가 아니라,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유대인들이었으며, 유대인들의 대적은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사도들의 활동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하는 것이며, 사도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창세 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약속하신 순종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한 것이며,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성부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세워지는 것이다.


사도 시대에나 지금 시대에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은 한결 같으며, 이들은 하나같이 공로적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이들이다.


새관점주의자들과 같이, 이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왜곡시키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전가 교리를 부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이들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부 하나님의 성자 하나님의 아들되심에 대한 선언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택한 자의 죄를 전가받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순종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응답이시며, 택한 자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선언이다.


전가교리가 없는 새관점이 말하는 부활은, 인간 행위 방식의 정당성만을 제시해주는 자기 의를 위한 것일 뿐이다.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제사장의 무리들은 회개와 죄사함이라는 선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예수를 죽였음을 인정해야한다.


이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이 포장된 자신들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도 예수를 죽이지 읺았다는 이들의 주장을 옹호한다.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증인이었어도 성령이 간섭하심이 없었다면 목숨을 걸고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이 하는 증거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사로 잡힌 자들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위협적인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은 오직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만 가능하다.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이들의 분노는 인간의 죄성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이는 패배한 사단의 대리적 표현이다.


사단이 예수께 대한 태도와 마찬가지의 태도를 사도들에게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사단은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율법에 정통한 바울의 스승이었던 가말리엘의 모습은 율법이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울법은 자연법과 마찬가지로 구원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율법에 충실하였던 이들도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있어야지만 구원에 참여 될 수 있다.


하지만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자함으로서 율법을  특별 은총의 방식으로 사용한다.


이는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는 자연법을 통하여 구원을 얻고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서 지혜롭게 상황을 대처해나간다.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복음은 영원하지만 운동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유행을 따르는 것이다.


드다와 갈리리의 유다가 전하였던 것은 복음이 아니라 운동의 차원이었다.


복음과 운동은 구별되어야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과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구분되어야한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구속사 중심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인간의 새로운 행동방식에 관한 운동이다.


톰 라이트는 사도들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면서 핍박을 받았다고 말한다.


톰 라이트는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하늘과 땅이 겹쳐서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새창조로서, 유대교의 전통에 매우 충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교의 전통은 행함의 방식으로서 사도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통에 충실한 새로운 방식의 행동 방식으로 규정하고있다.


하지만 복음은 행함의 방식 이전에 생명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복음은 아담 안에서 아담의 범죄로 죽었던 인간이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았다는 새생명에 관한 것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아담 안에서 죽어있는 전적으로 부패된 인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인간이 율법을 행하는 윤리적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생명을 살리는 구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핍박은 성도의 거룩함에 대한 증거다.


거룩함은 분리로 인한 깨끗함을 말하며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말한다.


현재의 한국교회가 핍박을 받지 않는 것은 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거룩함이 상실된 한국 교회는 핍박이 아니라 비난과 조롱만 받을 뿐이다.


비난과 조롱은 핍박이 아니기에 사도들과 같이 기뻐할 수 없다.


상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무 감각없이 지나칠 뿐이다.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오직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였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교회는 그리스도가 사라졌고, 윤리의 모델이 되는 왜곡된 그리스도만 남아있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10. 23:03

사도행전 5장 12-26절 말씀 묵상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으로서 믿는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의 확장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마지막 때에는 사랑이 식어진다.


사랑이 식어졌다는 것은 은혜가 사라졌다는 것이고 성령께서 좀처럼 사도시대와 같이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신사도 운동에서 하는 이들은 사도시대의 성령의 역사를 재현해보려고 하지만 이들이 하는 이상한 행동들은 거의 귀신이 발광하는 모습이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를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물론 사도 시대는 정경이 정립되기 이전의 특수성이 있지만 지금 시대는


기독교의 세속화로 인한 순수성이 심각하게 결여되어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성도가 성도로 보이기보다는 유물론적 효용 가치로 보이는 시대이다.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떠나서 인간적 개념의 신론 중심의 신학이 되어버렸다.


신학의 기독론에서 신론으로의 중심 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왜곡된 결과를 가져왔다.


윤리를 앞세우는 인본주의적 기독교는 오히려 사람의 죄성이 가득하여 사랑이 없는 정죄를 하기에 바쁘다.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머리만 커진 현대 기독교는 성령의 능력이 상실된 하나의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부흥을 가져온다.


현재의 믿는 자의 감소는 일단 현재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쇠퇴하고있음을 보여준다.


성령 사역의 감소는 일단 준비되어있지 않은 교회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일차적으로는 인간적인 필요에 의한 만남이 있더라도  이차적인 열매로서의 믿는 자들이 생기게된다.


교회가 사회의 칭송의 받으면 사람들은 교회로 오게되어있고 이차적으로 이들을 거룩한 성도로 양성을 시켜야한다.


세상에서는 처음부터 액면 그대로의 복음 전파를 기대할 수는 없다.


전도를 위해서 길에서 외치기보다는 삶의 현장에서의 만남을 통한 성령의 간섭하심을 간구해야한다.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다 나음을 받을 정도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사도 시대의 성도의 순수성과 열심을 볼 수도 있겠지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초창기의 하나님의 강력한 특별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험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성도는 힘든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더욱 크신 특별 은혜로 간섭하시기를 간구해야한다.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시기와 질투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인간의 높아지고자하는 욕망이 죄절된데서 나온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사단과 같이 높아지고자하는 욕망이 내면에 깔려있기에, 시기하고 질투하는데서 자유할 수가 없다.


시기와 질투는 인간이 사단의 종노릇하는 통로가 된다.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대제사장이 사도를 옥에 가둘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면, 대제사장은 이미 막강한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정치적 권력과 믿음이 아무 문제없이 공존되는 역사가 거의 없어기에, 대제사장들의 권력 남용은 신정정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중지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 시대에는 복음 전파가 없는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결코 원하시지 않는다.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전적으로 순전한 것이다.

제대로된 복음 전파는 순수성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이 시대 복음의 왜곡은 순수성이 결여됨으로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고있다.


순수성을 가진 복음이라 하더라도 신학이 왜곡된 순수성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사도들이 경험했던 기적들과 비슷한 일이 “하늘에 속한 사람”의 저자 윈형제에게도 일어났다고 하지만 상황이 목적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윈형제의 목적은 백투예루살렘이라는 세대주의적 행동방식을 위한 간증으로서 신학적 근거가 결핍된 간증이기에 그 위험성을 분별하여야한다.


사도시대의 간증은 정경이 정립되기 이전의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서, 성경이 정립된 현재에는 성경에 대립되는 유사 간증을 분별해 낼 필요가 있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작정하신 일을 막을 수가 없다.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성전맡은 자, 제사장들….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데 주축이 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직자들이다.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와 신학은 오직 전문가들이 독점하고서 비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 현실이다.


25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성전맡은 자에게 부하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이들이 권력자의 대열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이상적인 신정체제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나마 어느 정도 순수성을 지켰던 칼빈마저도 사람들은 마녀 사냥하기에 바빴다.


칼빈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그를 방해했던 세르베투스가 처형을 당하였던 것은 제네바라는 신정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에 대한 처형이 시의회의 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칼빈이 사람을 처형했다고 칼빈에 대하여 마녀사냥하기에 바쁘다.


중세 로마카톨릭의 악행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형집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실을 왜곡시킴으로서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볼때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9. 23:41

사도행전 4장 32-5장 11절 말씀 묵상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다 성령에 사로잡힌바되어 자신의 뜻이 아닌 성령의 뜻대로 하나가 되었다는 증거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하나로 나타나듯이, 성령의 역사는 성도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 시킴으로서 처음 아담에게 심겨졌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공동체성이 이 땅에서 다시 구현되고있는 것이다.


하나되는 공동체성은 성령의 새창조의 특성이다.


이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 다짐으로 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이들이 행하는 공동체적 삶의 형태는 종국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도 시대 이후에 이 땅에서 이상적인 삶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은 마치 가나안에 들어갔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증명해 주고있는 것이다.


현재의 교회 공동체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 이전의 부패한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성결의 개념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나안 생활과 같이 성령의 강권적 역사로 시작된 사도시대의 교회공동체가,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부패와 마찬가지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환경적으로 많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도 핍박받는 지역에서 성령의 큰 권능을 경험 할 수 있는 것은 환경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흔히들 복받았다고 간증하는 세상적 축복들은 오히려 타락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현시대 교회 타락은 환경적 풍요와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의 부패는 콘스탄티노플에 의한 기독교의 국교화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볼 때 핍박이 없는 교회는 부패될 수 밖에 없음을 보게된다.


교회에 대한 핍박이 없는 현재의 환경은 한국교회의 부패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큰 은혜는 오직 어려운 환경에서만 가능할뿐이다.


34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중국이 문화대혁명 기간에 하였던 일 가운데 한 가지는 부유한 자들의 집을 압수하고서 그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였던 것이다.


아마 성경을 피상적으로 적용하였던 것 같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이론도 많은 부분 성경을 근거로 하고있다.


하지만 이들이 실패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인간의 죄성을 간과하였기 때문이다.


사도시대에 재산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인간의 죄성을 압도하는 성령의 강권적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개인에게 사도 시대에서의 일들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개인은 파산될 수 밖에 없다.


가끔 이단들이 재산을 공유하지만 이들의 공유된 재산은 잘못 사용되어질 뿐이다.


M교회와 같이 대형 교회들이 교회의 재정을 잘못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내부적으로 잘못된 이단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문제는 인간의 죄성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성령의 공동체적 역사가 없이는 개인이 이를 실행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 시대의 문제는 사도 시대와같은 성령의 초자연적 공동체적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처음의 시작과 다른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습과 유사하다.


부흥은 부흥을 추구한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흥을 추구하면서 일어나는 부흥의 역사들은 부흥주의의 한 현상일 뿐이다.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던 레위족이 재산을 처분하여 사도들에게 가져간 것은 하나님의 법에서 떠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법이 다시 살아 역사하고있다는 증거이다.


사도행전에서의 바나바의 선교사역은 죽었던 이스라엘 가운데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었으며, 바나바를 통한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는 사도행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서 온전하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헌신된 자들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든 명예에 대한 욕심이든 인간적 욕심을 내려놓아야지만 성령께서 크게 사용하실 수 있음을 본다.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반을 바쳤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한 것에 문제가 있었다.


거짓은 누룩과 같이 공동체 전체에 쉽게 퍼진다.


사도시대의 초기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구별된 공동체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이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거룩이 유지되어야만 했다.


아간의 범죄가 심각하게 다루어졌던 것은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로 오염시킬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시날산 물건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더불어 새롭게 시작된 성결된 교회공동체에 거짓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교회에 들어온 죄는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킨다.


현대 교회가 공동체성을 상실한 것은 이미 심각하게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심각하게 오염된 교회공동체는 심각하게 부패했던 이스라엘과 유사하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았듯이 심각하게 오염된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심판을 받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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