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5장'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8.03.23 :: 예레미야애가 5장 11-22절 말씀 묵상 1
  2. 2018.03.22 :: 예레미야애가 5장 1-10절 말씀 묵상
예레미야애가 2018. 3. 23. 15:54

예레미야애가 5장 11-22절 말씀 묵상


11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12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13  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14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총체적 재앙)

부녀자, 처녀, 지도자, 장로, 청년, 아이, 노인이라고하면 사실상 유다 백성의 전부를 가리킨다.

선지자는 유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구성원들의 총체적 재앙을 말하고있다.

사실 유다 공동체의 구성은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이러한 불행은 모든 공급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에 나타난 결과들이다.

불순종은 단순히 관계를 유지하면서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반역으로서 관계성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은 단순한 인간 성품의 경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반역인 것이다.

인간의 죄성의 심각성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공동체는,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을 기초로하는 것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순리적인 반응으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 받으면서도 부모와의 관계성을 거부하는 것은 가족 공동체의 유지에 치명적이다.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부모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듯이,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임시적인 것이다.

인간의 죄성의 본질은 공급받는 것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을 거부하며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이기에, 유다 백성들과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단절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성품에 담겨있는 공동체성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순종이 동반되지 않는 공동체는 유다 백성들과 같이, 파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5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기쁨과 춤은 여호와를 즐거워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다윗은 언약궤가 들어오는 날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을 추었지만, 이를 조롱하였던 미갈은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이 사는 동안에 기뻐 뛰노는 모습은 원래부터 순수하였지만, 어느덧 인간은 타락한 죄성으로 말미암아 음란으로 이어지는 문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16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인간에게 부여되었던 면류관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왕권의 표현이었다.

아담과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들이 누렸던 왕권은 불순종이라는 범죄 때문이었다.

현재의 인간들의 삶이 사단의 좀비 인생이 된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바가 아니었음을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된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하여 왕으로서의 직책이 회복된 자들이기에, 더 이상 이 세상에 종속된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17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상실되어 어둠 가운데 헤맬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안식에 참여된 성도는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빛 가운데 걸어가는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18  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하나님이 거하실 곳이 사단에게 내어준바되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에덴에서의 산인 거룩한 시온 산에서 사단이 하나님께 도전하도록 기회를 주었으며, 거룩한 예루살렘은 여우들의 거처가 됨으로서, 참 예루살렘 되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사단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에 동참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없다.



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불순종한 인간은 파멸될 수 밖에 없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을 소망 할 수 밖에 없다.


20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선지자의 탄식을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는 기도다.

이 땅을 나그네와 같이 살아가는 신자는, 항상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야한다.



21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구속redemption은 회복redeem의 의미가 담겨있어서 옛적의 상태로 돌이키는 것을 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단순히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에덴은 안식을 위한 과제가 성취되지 않은 곳이기에,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에덴에서의 과제를 성취하셔서 이루신, 영원한 생명과 축복이 보장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구원받은 성도는 범죄하기 이전의 에덴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기에,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문화명령을 다시 실행하여야한다고 주장하며, 문화명령을 대위임령보다 상위에 두려고하지만, 이는 에덴과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오해한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은 문화명령이나 창조명령의 개념이 아니라, 아담에게 부여된 직책을 표현하는 통치명령이나 대위임령으로 보는 것이 옳바르다.

아담은 에덴에서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부여받았지만, 아담의 불순종은 이러한 직책의 상실을 의미했다.

유다의 실패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의 실패였으며, 선지자가 간구하는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는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제선지자의 희망 사항 이상의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아담이 에덴에서 실패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회복하셨기에, 에덴에서 주어졌던 통치명령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된 것이다.

성도가 받은 구속은 에덴으로 돌아가 다시 아담의 직책을 수행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완성하신 에덴에서의 과제를 통하여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도는 일주일의 첫날인 주일을 안식일로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안식을 기반으로 한주를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2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상태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이지만, 현재 누리는 축복은 오직 영원한 구속을 위해서 주어지는 임시적 은혜일 뿐이다.

주어진 임시적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감사드릴 일들은 오직 그리스도께 향하는 일들로 귀결되어야만 할 것이다.


예레미야애가 묵상을 마치면서

불순종한 유다와 멸망당한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이 처하여있는 보편적 상태를 묘사하고있다.

에덴은 성전이었기에, 아담은 성전에서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패망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불순종이 재연된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율법 아래 있었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과 마찬가지로, 자연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놓여있다.

불순종한 유다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인간 스스로가 주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

새관점이나 신정통주의와 같은 현대 신학에서는 아담의 죄를 애써 무시하거나 축소시키려고하지만,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율법 아래서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이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시고는 우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으시다.

유다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는 불순종으로 인한 것이며, 이는 아담의 후손인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며, 아담의 불순종이 재연된 것이었다.

인간은 불순종의 심각성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중요성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심각한 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인지에 대한 의식이 없는 이들일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하며, 선함을 통하여 자신들의 의를 증거하려는 이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이다.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선함이나 선행을 증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스스로 의롭다하는 바리세인의 심각성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선행을 증거하려는 이들을 가리켜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스스로 의롭다하며 세상에서 선하게 살려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세리와 창기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 나올 수가 있었다.

불행한 환경은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드러내면서,  복된 환경이 될 수도 있다.

유다의 총체적 불행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해석될 때,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다.

현재의 삶의 환경 가운데 경험하는 부정적 상황들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재앙이지만 구원받을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복된 환경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본다.

posted by Wonho Kim
:
예레미야애가 2018. 3. 22. 21:47

예레미야애가 5장 1-10절 말씀 묵상



1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범죄한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하신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하소연 할 수 있는 대상이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만약에 하나님께 하소연 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힌다면 이는 지옥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상태에서 선지자가 하나님께 하소연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완전한 지옥에 이른 상태가 아님을 보여준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인한 유다 백성을 상태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이는 인간이 범죄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아직 완전한 지옥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길 마저도 막힌다면 인간은 완전한 지옥에 이른 것이다.


2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선택과는 관계없이 기업을 얻을 자이며, 거할 집이 주어진다.


이는 인간의 죄성과 죄인으로서의 위치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미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자신은 조상의 죄와는 관계없다고 선언할 수는 없다.

죄의 문제는 행위론적 문제이기보다는 존재론적인 문제인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죄인임을 보여주려는데 반하여, 인간은 자신들이 행위론적으로만 죄인임을 말하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세인의 죄를 심각하게 보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행위를 넘어서 존재에 대한 것이기에, 복음은 윤리적으로 접근해서는 않된다.

기독교 윤리는 행위를 넘어서 존재론적인 바탕 위에서 정립되어야하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의 환경은 이미 존재론적인 상황에서 기업이 외인에게, 집들이 이방인에게 돌아간 상태이지만, 인간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항변하며 이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론적인 죄인이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에덴과 같은 환경에서 주어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파괴된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접하게되는 에덴의 동쪽은 험난하기만 하다.

신자는 이러한 험난한 환경이, 공동체적 책임을 져야하는 죄인에게 주어진 환경임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3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

아담의 범죄의 결과는 아버지의 상실이었다.

아담은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누가는 예수님의 계보가 아담을 거쳐서 하나님까지 올라가고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의 아버지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을 주신다.

범죄한 유다는 아버지가 없는 고아였으며, 범죄한 아담은 아버지가 없는 고아가 되었으며, 아담의 후손은 모두가 진정한 아버지가 상실된 고아의 상태이다.

육신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림자일 뿐이다.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영적인 자손이 참 이스라엘이듯이, 하나님의 자손인 신자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 아버지가 되신다.

세상일이 고달파도 참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아뢸 때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참 아들은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한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표상으로서, 아담이 하와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신부된 교회와 한 몸을 이루실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성전을 상실한 유다는 타락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신랑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기까지는 실질적 과부나 마찬가지이다.



4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에덴과 같다.

불순종하여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로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을 수가 있다.

아담의 후손인 인간의 삶은 유다와 마찬가지로, 값을 치루지 않고 공급을 받을 수가 없는, 은혜가 상실된 세상을 살아가고있다.


5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나이다

죄의 종노릇하는 인간들은 누구나 수고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종속될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은, 오직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상실 말고는 해석할 길이 없다.



6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인간이 서로 악수하면서 서로를 돕는 것은 대부분 서로의 이익을 전제로하는 것이다.

원래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은 인간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거래하도록 지음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익을 전제로한 거래 관계는 타락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타락 이후의 인간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된 후의 유다가 대적이었던 애굽과 앗수르에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손을 벌려야만 했던 것과 같이, 이익을 위해서 공존한다.

이러한 상황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인식한 선지자는, 현재의 처지를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서, 하나님만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실 수 있으신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성전의 파괴로 인하여 처참한 상태에 있었으며, 비록 이러한 상황이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손상에서 온 것이지만, 결국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의 인간이 서로의 이익을 전제로 거래를 하는 상태가 죄악으로 인하여 생긴 불합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선지자는 말하고있다.

경제라는 사슬에 얽매여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은, 현재의 상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께 하소연하면서, 상황을 극복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익을 전제로 움직이는 상황은 결국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갈 뿐이다.

비록 이러한 상황이 조상들의 범죄로 인한 것이고, 우리가 그들의 죄악을 담당한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간구하며 살아가야한다.

이익이 있는 곳에는 부정한 요구가 따르기에 어느 누구도 부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은 부정적 상황에서 살면서 자녀들에게도 부정적 상황을 물려줄 뿐이다.

죄가 전가되는 총체적 상황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악을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않고는 깨끗하여질 수가 없다.

인간은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궁극적으로 누구나 다 죽음을 직면하여야만 하며,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인간은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함으로서 오히려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가 있다.



8  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다스려야할 자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상황)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지면서 주변의 이방 나라들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여호와를 경배하여야했으며,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부강하게되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통치명령(창 1:28), 즉 흔히들 문화명령이라 부르는 지배명령을 말씀하셨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다스릴 대상에는 생물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창세기 3장 1절의 들짐승의 짐승은 생물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들짐승인 뱀도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에 포함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이 다스려야할 대상으로부터 유혹을 받아 다스림을 받게 된 것과 같이, 유다는 주변 이방 나라의 우상을 받아들임으로서, 이방 나라의 다스림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의 인간의 삶이 죄의 종노릇하면서, 죄에 종속된 것은 본래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서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는, 그 이전에 다스려야 할 대상을 다스리지 않은 일차적 불순종에 의한 결과적 불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하는 사단을 꾸짖으심으로서 사단을 다스리셨다.

현재의 성도의 삶은 세상에 종속되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단을 꾸짖으신 것과 같이, 세상의 다스림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적인 머리를 써서 인간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은 또 다시 하나님의 거룩한 곳을 세상의 다스림에 종속시키는 어리석은 행위이지만, 현재의 교회의 실상이 이러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세상적 욕심으로 세상에 다스림받은 것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9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타락한 아담은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로 인하여 고생을 하여야만 했듯이, 타락한 유다는 광야에서 칼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세상의 험악한 상황들을 직면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10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인간의 얼굴은 환경에 따라 변화되기 마련이다.

사람의 변화된 모습은 인간의 삶의 환경이 어떠한 지를 보여준다.

낡아질 헌옷을 입은 인생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옷을 입는 날을 소망하며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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