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말씀 묵상
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는 금으로 장식되어있었다.
성전의 지성소가 그 기능을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금은 더 이상의 기능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곳에서는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 될 수 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성소가 파괴된 것은, 타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보여준 것이며, 궁극적으로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몸은 십자가에서 헐리심으로 참된 영적인 성전을 세우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 성전은 처음 아담 안에서 파괴되었던 성전이었다.
처음 성전은 행위를 요구하였으나, 마지막 성전은 은혜에 참여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처음 성전을 마지막 성전으로 이끄는 것이었으며, 행위의 요구에서 은혜의 베푸심으로 자리바꿈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아담과 같이 처음 성전, 즉 행위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자리에서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이를 원론적으로 다시 말한다면, 처음 아담은 둘째 아담의 모형이었듯이, 에덴은 그리스도의 성전되심을 예표하는 장소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에덴의 재현이었으며,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장소였다.
아담의 불순종은 유다의 불순종으로 재연되었으며, 행위 언약으로서의 모세 언약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아담 언약이 재현된 것이었다.
아담 언약에는 오직 행위 언약만이 있었지만, 모세 언약에는 표면적인 행위 언약의 밑바탕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본질적으로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선지자의 탄식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파괴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야 될 존재들의 속성이 어떠하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던 유다는, 처음 언약 안에 있었던 에덴에서의 아담과 비교될 수 있다.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던 인간은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인간이었다.
불순종으로 질항아리같이 되어 포로로 잡혀간 유다는, 마치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같았다.
이는 현재의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타락 한 후의 인간의 속성은 순금이 질항아리로 변질된 만큼이나 변질되었다.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상실된 백성은, 그 상실된 만큼이나 자신의 자녀들과의 관계가 상실되었다.
인간이 짐승만도 못한 것은, 짐승은 하나님의 자연법을 거스르지 않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마져도 거스리면서, 심지어는 환경을 파과하면서 살아간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나, 불순종한 유다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인간은 외부적 환경을 탓하기 이전에 인간이 어떠한 존재로 변질되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젖먹이는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젖먹이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함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떠난 까닭이다.
현재의 풍요는 우리의 잘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근거로한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생활을 하여야한다.
5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유다 백성들의 변화된 처지는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마찬가지다.
가나안에서 바벨론으로의 변화는 확연하였지만, 가나안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에덴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류는 현재의 처지를 당연한듯이 살아가지만, 원래 하나님의 현상을 입고 에덴에서 살았던 존재인 인간의 존귀함을 알았다면, 현재의 삶의 심각성을 생각할 것이다.
희망을 상실한 인간들은 돈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려고하지만, 이러한 노력으로는 원래 인간이 누려야할 창조 목적에는 도달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에덴과 하늘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를 설명하고있다.
복음을 접한 인간은 바벨론과 같은 현재의 문화를 변화시키기보다는, 현재의 삶을 발판으로 더욱 더 아름다운 하늘 나라를 소망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낡아질 헌옷을 갈아입을 새옷을 준비 하셨기에, 새옷을 입기에 합당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사람에 의하여 무너진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무너뜨린 것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의 환경 가운데 경험하는 여러가지 부정적 상황 가운데에는 직접적인든, 간접적이든, 아니면 나의 죄로 인한 것이든 타인의 죄로 인한 것이든,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야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기를 원하시는 죄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다의 모습이 예루살렘에서의 유다의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가 지음받은 아담의 상태와 비교하여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지자의 탄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이며, 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역을 통하여 회복시킬 성도의 모습이 어떠하여야하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두는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입은 자이기에 성도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행위가 될 것이다.
목회자나 신학자, 혹은 성도들의 추잡한 모습들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욕되게 하는 것인지 인식을 하여야 할 것이다.
성도는 자신의 변화될 위치를 분명히 인식하고서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심판보다도 심판받는 과정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 지를 말해준다.
이는 이 세상을 고통 가운데 탄식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의 고달픔을 말해준다.
건강하게 살다가 짧은 기간에 세상을 떠나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일 것이다.
현대 의학의 발달은 인간을 자연스럽게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현대 의학은 인간을 건강하게 살도록 해주기도하지만, 약에 의존하면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게도한다.
거의 식물 인간이 되기까지 살려놓고서 고생하게 만들기도하는 것이 현대 의학의 부정적인 모습이기도하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으로 은혜를 누리기도하지만, 지나침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들어가게도한다.
이는 의학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문명의 속성이기도하다.
인간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문명의 발전은 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심판을 자초하기도한다.
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자녀를 삶아 먹는 모습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이러한 속성은 삶 가운데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한다.
많은 이들이 자녀 교육에 목을 매지만, 자녀교육의 실상은 대부분이 자녀를 위한 것이 라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길들여진 자녀들은 표면적으로는 성공하는 것과 같아도 그들은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도 않도록 만들어지며, 내적인 능력도 상실되도록 만들어진다.
참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살아가는 인간이 되어야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하나님을 직면하여야한다.
자녀로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을 경외하게하는 것만이 자녀를 살리는 행동이다.
부모의 과도한 개입은 자칫 자녀를 하나님 앞에서 가리우는 행동이며, 자녀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자녀를 죽이는 행동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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