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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15 :: 예레미야애가 2장 11-22절 말씀 묵상
  2. 2018.03.14 :: 예레미야애가 2장 1-10절 말씀 묵상
예레미야애가 2018. 3. 15. 19:27

예레미야애가 2장 11-22절 말씀 묵상


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선지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보여주고있다.

선지자의 고통은 자신의 육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타고난 공동체성을 가지고있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의 손상은 사람 간의 관계의 손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관계성의 파괴에서오는 극단적인 정신적 고통은 그만큼 불순종으로 인한 관계성의 파괴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일깨워준다 .


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어머니는 양육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지 못하는 어머니는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능력마져도 가질 수가 없었다.

자녀의 극단적인 굶주림 가운데서도 부모가 부모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히려 어린 자녀를 자신의 먹잇감으로 삼기도한다.

이는 땅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육신의 깨어진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의 결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누리는 평안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하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전에 하나님께 나아가야한다.



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딸이라는 위치는 시집가지 전까지는 아버지의 권위 아래에서, 아버지의 보호를 받아야한다.

선지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에 힘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이다.

선지자는 예루살렘과 시온에 대하여 진실된 말을 전하여야 하는데 이를 전할 수가 없다.

예루살렘과 시온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에 익숙하였기에 더 이상 참된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다.

이는 현 시대의 교회의 상황과 유사하다.

현시대에 교회의 설교에서 참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거의 들을 수가 없다.

설교의 대부분이 자신을 포장하거나 청중이 듣기 좋은 말로만 장식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온갖 철학적 사고로 포장되었기에, 참 진리가 선포되는 현장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선지자가 애통하는 것과같이 현실의 심각성이 제대로 선포되어야만 할 것이다.



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거짓 선지자는 대부분 사람들의 필요에 의하여 생겨난다.

사람들은 거짓된 경고와 위안을 믿고싶어서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참된 선지자는 스스로도 힘들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힘든 존재이지만, 모두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이다.

거짓된 선포는 적절한 구원의 기회를 놓치게 함으로서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윤리적이고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가르침은, 종교의 모양은 있지만 그 안에 진리가 없으며 거짓된 평안과 자기 만족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으로서, 선지자의 직책을 회복하셨듯이,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이 땅에서 참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것이다.



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마치 오늘날 교회가 사회의 조롱거리가 된 모습과 유사하다.

거짓 선지자로 유다가 멸망의 길로 들어섰듯이, 거짓된 목회자들로 인해서 교회가 사회의 조롱거리가 되고있다.

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세상은 교회에 대하여 그냥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는 원수로서 승리을 외치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에 대하여 선한 싸움을 싸워야한다.

유다의 멸망은 세상과의 싸움에서의 패망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이들이 되었다.

현재 교회가 사회의 조롱거리가 된 것은 교회가 세상보다도 더 세상같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특별법만을 가지고 세상의 상식인 자연법을 무시하고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연법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의 특별법인 복음으로 운영되어야한다.

세상에서는 상식이 통하여도 교회에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인 것을 알아도 교인들은 자신들이 죄인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

세상은 잘못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알지만, 교회는 잘못한 것에 대하여 책임의식 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왜곡된 복음은 죄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만든다.

왜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기들보다도 바리세인들을 더 질책하셨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유다의 재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라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렇게까지 고통 가운데 있게 하셔야했는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힘이든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정하실 수 밖에 없으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재앙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하고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 지를 드러내시는 과정이다.

이러한 재앙을 통해서 인간으로하여금 죄의 심각성을 알게 하실 수 밖에 없으셨고, 결국 모든 인간을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귀속시키기 위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일을 정하셨다고 이러한 불행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몰아가서는 안된다.

불행에 대해서는 아담에게도 경고하셨고, 이스라엘에게도 경고하셨지만, 경고를 무시하고 굽은 길로 간 것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죽이기로 작정된 자이지만, 그나마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과정 가운데 이러한 상황들을 허락하실 수 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이러한 불행이 아니고서는 인간은 불순종의 심각성을 깨달을 수가 없고, 아담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인간은 한 인간이기 이전에 공동체적 책임감을 가져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오직 이러한 불행한 상황 가운데 자숙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야만 한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여러가지 불행들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은혜의 방편이기에, 인간은 불행 자체를 가지고 하나님께 불평해서는 안된다.

영원한 것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순간의 것과 비교될 수가 없는 것이다.


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재앙은 상황을 직시하게 만든다.

재앙의 과정이 없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달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재앙의 상황은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재앙은 상황을 직시하게 만듬으로써 죄를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께 올바른 간구를 하게한다.

일반적 상황에서는 대부분의 기도가 욕심의 기도이지만, 재앙의 상황에서는 통회하는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게된다.

절망의 원인에 대한 제대로된 인식만이 희망을가져온다.

절망 가운데 간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의 요구를 하시지 않으시며 은혜 가운데로 죄인을 인도하신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극단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주 앞에 펼쳐놓아 아뢴다.

마치 죽음을 펼쳐놓는 것과 같다.

더 이상의 비극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한 죄 용서가 아니라 우리가 감당했어야할 이러한 비극을 직접 담당하셨던 것이다.



(나가는 말- 하나님은 실패하셨는가?)

구약의 역사는 진멸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자녀의 성공은 부모의 명예와 직결된다.


자녀 교육이라는 관점에서만 본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모습이 힘겨워만 보인다.

노아 홍수로 인간들을 쓸어버리셔야했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을 끝까지 설득하는데 실패하셨으며,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은 종말을 고해야만 했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설득하여 올바른 길로 갈수 있도록 하시는데 실패하셨는가?

아니면 인간은 말로서 설득될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하시기 위한 것인가?

서구 사회에서는 자녀에게 매를 들 경우 부모가 법적인 책임을 져야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많은 인간들을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참하게 죽음으로 몰아가신다.

인간이 어떠한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도 힘들게 인간을 재앙의 한 가운데로 몰아가셔야만 하셨는가.

안될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시작을 하시지 말았어야했는데, 그런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설득시켜서 좋은 세상을 만드시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발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인간을 재앙 가운데 몰아가시는 것은 제대로된 사람을 만들기 위한 극단적인 자녀 교육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문제가 있으시다고 할 수가 없다.

자녀 교육에 대한 비유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이며, 인간적으로 성공한 자녀교육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성공한 자녀 교육은 없을 것이다.

교육을 시킨다고하더라도 인간에게서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이들에게 기대한다는 것은 100% 실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죄에 대한 고발은 가나안에만 제한 된 것이 아니다.

자연법 아래있는 모든 사회는 결국 고발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사회를 기독교화하려는 노력들이 있지만 이는 인간의 죄성을 간과한 것이다.

한 개인이 변화되는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데, 그리스도인이라고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도 불신자들에게는 실패(?)를 하셨는데, 그리스도인이라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사회에서 중생된 자는 소수에 불과하며, 설령 다수가 중생되었다고 하더라도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성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법과 일반 은혜에 의한 것이다.

결국 복음을 거부하는 모든 인간은 유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문화변혁을 위한 문화명령을 대위임령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인식하게된다면,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대위임령(마 28:19-20)을 실행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예레미야애가 2018. 3. 14. 20:13

예레미야애가 2장 1-10절 말씀 묵상



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다는 표현을 한 정도로 사랑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마땅히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이 진노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믿었던 이로부터의 배신은 증오를 불러일으키겠지만, 하나님으로부터의 징계는 배신이 아니라 스스로 화를 자초한 일이기에 하나님께 항의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정은, 기대하였던 자녀에게 배신당하는 부모의 심정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라고 성전이라는 발판까지 만들어 주시고 아름다움으로 입히셨는데,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기보다는 아담의 후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먼저 하나님을 소외시켰던 것이다.

딸 시온과 이스라엘에 대한 진노는, 기대하시고 원하셨던 것에 대한 실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발판을 만들어 주셨지만, 유다가 이를 원치 않았기에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허락하신 것과 같이, 에덴에서도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성전으로서의 발판을 저버린 아담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에덴에서 추방 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발판을 허락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다가 보여준 모습은,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더 이상 하늘과 땅의 연합이 불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현재의 상황은 그리스도없이는 하늘과 땅의 연합을 바라볼 수가 없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하늘 문이 열린 곳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유대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보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거부하는 사단이 좋아하는 이론일 뿐이다.

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이기 이전에 이들이 아담의 자손임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2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야곱은 이스라엘로서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인간의 본능적으로 육체를 위해 살기에,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마련해주셔도 인간은 이를 육체의 기회로 사용할 뿐이다.

야곱의 모든 거처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할지라도 인간에게 이것은 스스로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될 수가 없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파괴되도록 허락하심으로서, 야곱의 모든 거처,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육체적 후손에게서 기대하셨던 제사장 나라로서의 기능을 소멸시키신 것이다.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의 방편은 하나님께 귀결되지 않고는 소멸될 수 밖에 없다.


3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

하나님의 진노가 맹렬하시다는 것은 불순종의 심각성의 한 단면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심으로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할 수 없을 뿐더러, 대적들 앞에서 무력하게 당해야만 했다.


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이들의 최후의 모습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을 배제하는데 있어서 어느 시대보다도 탁월하다.

첨단 기술이 하나님을 대체하였고, 물질과 돈이 하나님보다도 더 의지할 뿔이 되었으며,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제하고있다.

마지막 때의 마지막은 환경 재앙이나 갖가지 난관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도 없으며, 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제하는 인간의 죄성에 심각성이 있다.

하나님을 배제하면서 다가올 재앙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이들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4  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하나님께서 원수가 되셨다는 사실은 그냥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불순종은 단순히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이방인인 우리는 얼마나 순종하는가?

율법을 받지 않았다고 무책임 할 수 있는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 놓여있다.

자연법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주어졌듯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와 책임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삶의 목적은 분명하게 있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외면은 유다의 종말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5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원수같이 되심을 통해서 불순종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신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라도, 순종의 문제는 하나님께 매우 중요한 주제인 것이다.

율법이 아니라 자연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는데도 인간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외면하지만, 그 종국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지는 가운데 비참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6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유다에 임한 파괴는 그동안 하나님께 나아가는 발판들에 대한 것이었다.

초막이 헐리고 절기가 폐하여졌음은 경고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라는 결론의 차원이다.

더 이상 인간에게 주어진 수단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없어졌을 뿐만이 아니라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이기 이전에 아담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이는 아담의 후손인 인류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율법을 통하여 주어졌던 안식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에, 오직 안식의 주인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 참여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7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

예루살렘의 모든 기능이 상실되었다.

하지만 제3성전에 집착하는 현재의 상황은 인간이 얼마나 자신들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제3성전에 대한 집착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방식으로 의를 세우려는 것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통해서 인간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시지 않으신다.

오직 그리스도께 의지하며 두 손들고 나아가야만 될 것이다.


8  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인간을 통해서 세워지는 눈에 보이는 성전은 파괴될 수 밖에 없다.

제2성전의 파괴와 마찬가지로 솔로몬 성전도 파괴될 수 밖에 없었다.

아담이 오실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과 같이 예루살렘 성전은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일 뿐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9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보호받지 못하는 예루살렘은 바벨론 유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과 교통 할 수 없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 있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상태가 사단의 종노릇 할 뿐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발전과 노력을 통하여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평안은 근본적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


10  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이들은 자신들이 절망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고있기에 그나마 희망이 있다.

이러한 절망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에게는 희망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 땅에서의 고통은 절망적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과 현재의 상태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 되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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