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2018. 3. 12. 21:25

예레미야애가 1장 1-11절 말씀 묵상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이스라엘의 풍요에서 빈곤으로의 추락은 풍요로웠던 에덴에서 추방되었던 아담을 연상시킨다.

예루살렘에서의 추방과 솔로몬 성전의 파괴는 성전으로서의 에덴의 종식과 유형적 유사성을 갖는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의 기능과 절대적으로 연관되어있었던 것과 같이, 에덴도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으며,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에덴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의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였으며, 제사장의 나라였으며,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했어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아담의 불순종과 마찬가지로, 불순종으로 인하여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아담의 불순종과 성격을 같이 하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성전의 기능이 상실된 것과 같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에덴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의 모습과 유사하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와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 유수의 상황은 표면적으로는 대적에 의한 것이지만, 근원적인 원인은 외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이라는 내부적 원인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는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현재의 삶의 모습을 대변해준다.

현 시대의 상황적 어려움은 아담이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외부적 문제가 아니라 내부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처한 상황의 어려움은 인간은 누구나 불순종한 아담의 자손임을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에덴이나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과 같이 풍요를 누리도록 지음받은 존재였으며, 마땅히 풍요를 누릴 자격이 있었지만, 불순종으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여야만 하는 이스라엘과 같이, 죄의 종노릇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레미아애가의 탄식은 비단 2500여년 전의 탄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 대한 현재적 탄식으로서,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야만 하는 당위성을 제공해준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파괴된 공동체)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 구원의 소망 가운데 이브를 하와라고 칭했듯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서도 구원의 소망을 담아낼 수가 없었다.

타락한 인간의 삶은, 관계성의 파괴로 인하여, 슬픔과 눈물이 뺨에 흐를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다.

순종은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기에, 불순종으로 인한 공동체의 파괴는 모든 관계성의 파괴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입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현상이 심도깊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인간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수가 없었다.

타락 후의 인간의 삶의 환경에서, 사람은 본질적으로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가 없게되었다.

시람에게서 받는 위로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이며, 인간에게는 근원적으로 눈물을 씻어줄 수 있는 능력까지는 없다.

인간이 삶 가운데 흘리는 눈물은 근원적으로 돌아가야할 에덴, 더 나아가서는 눈물을 영원히 씻을 수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담겨있다.



3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불순종의 결과는 환란과 많은 고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환란과 많은 고난은 불순종을 향한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 지를 보여준다.

유다 백성은 사로잡혀가기까지 순종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다.

이는 아담의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본능적으로 사단의 종노릇을 하면서 환란과 고난 가운데 거할 수 밖에 없다.

궁지에 몰린 인간은  그 죄성으로 인하여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쉴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이미 궁지에 몰린 인생이기에, 인생은 아무리 수고를 하여도 근본적으로 뒤따라오는 어려움, 즉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4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하여 있는 시온의 도로들은, 유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으며, 더 이상 생명에 이르는 길이 차단되었기에, 제사장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차단된 것과 같은 상황이다.

예레미야의 탄식 가운데에는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도 있다.

희망의 출발은 상황에 대한 인식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들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한 것은 궁극적으로 오실 구원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실패를 되새길 때 희망이 있는 것이다.

시온의 도로는 궁극적으로 생명나무되신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로서, 더 이상 율법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5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된다.

악한 사람이 형통하고 의로운 자가 불행해지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어떤 때는 아무 잘못이 없이 억울하게 당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악한 이들과 불의한 자들에 대한 규정도 인간적이며, 모든 상황, 심지어는 인간의 근원적인 상황까지 생각할때 사람의 판단은 단편적이거나 부분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표면적인 죄와 근원적인 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객관적이지 못하며, 하나님의 섭리조차도 알 수가 없다.

이 땅에서의 삶의 형통과 불행이 전부가 아니기에 이를 가지고 불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것이다.

유다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한 것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유다의 죄악에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이 모두 범죄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불순종의 자녀들이기에 모든 인간에게는 이와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은 의롭기에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삶에서의 불공평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부터 풀어나아가야한다.

순종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요구되는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순종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상황의 불공정함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자격이 없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종노릇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진정 싸워야 할 대상은 억울한 부정적 상황이나 사단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순종하지 않으려는 죄성인 것이다.



6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인간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있다.

삼위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구현에 있다.

공동체성은 순종이 전제가 되어야했듯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사역은 순종에 있었다.

순종이 결핍된 곳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도 사라져버린다.

시온으로서의 예루살렘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파괴가 되었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가 없다.

모든 사회 구조의 운행 원리는 이익이며 사람은 이익의 구조에 평생 쫓김을 당하며 살 수 밖에 없다.



7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는 것은 구원의 소망의 갖게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있다.

구원받을 자에게는 이러한 소망이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멸망할 자에게는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수단과 방법을 찾게되는 것이다.

인간은 소망이 있기에 슬픔이 있으며, 소망이 있기에 악인과는 구별된 생활을 할 수 있다.

아담도 에덴에서의 좋았던 추억을 간직하고서 구원의 소망을 품었다.

아담은 아들에 의해서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구원에 대한 소망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들 셋을 낳을 수가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임하지 않은 이들은 오직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예루살렘의 벗었음은 아담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수치와 연관이 된다.

아담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의 우월감이 상실되었듯이 예루살렘의 백성들도 교만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은 옷을 입음으로 근원적인 수치를 가릴 수가 없다.

인간이 입는 옷은 수치를 가리우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일 뿐이다.

인간은 발전된 모습과 성공을 자랑 삼아 스스로 영광을 드러 내려고 하지만, 결과는 오직 인간의 교만을 드러낼 뿐이다.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인간이 이룩한 과학 문명은 오히려 화만 자초할 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의 교만은 결국 파멸로 귀결될 것이다.


9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 인간이 스스로 세우려는 것은 더러운 것이며, 이는 수치를 가리는 옷이 될 수가 없다.

이것의 나중은 파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속이며 위안을 삼는다.

높아지려고하나 결국 낮아진 이들은 위로받을 수가 없다.

높아지려고 하면서 옷깃에 더러운 것을 묻히는 자들은 위정자나 고위직 공무원들 보다는 스스로 의롭다고하면서 정죄를 일삼는 자들이다.

오직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입은 자밖에는 없다.


10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대적이 빼앗은 보물과 대적이 침범한 성소는 대적의 문제이기 이전에 이러한 상황이 허락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유다 백성의 불순종이 있었다.

인생은 부정적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면서 투쟁을 하지만, 그러한 부정적 상황은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허락될 수 밖에 없었다.

부정적 상황의 일차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신자는 항상 하나님의ㅃ 은혜를 입은 죄인임을  깨달으며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갈 뿐이다.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율법과 성소는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 주어진 보물이었지만, 이들은 육적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영적 생명을 위한 도구들을 팔 수밖에 없었다.

비록 타락한 인간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는 길을 끊임없이 제시하신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자연법과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에 담겨있는 희미한 하나님의 음성은 끊임없이 죄인을 부르지만, 인간들은 육적인 생명을 위해서 희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 마저 육적인 목적을 위해서 팔아 버린다.

자연을 접하며 하나님을 알만한 수단들을, 도시화의 이름으로 낮과 밤을 바꾸며, 하나님을 묵상하기보다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에 의지하며 모든 시간과 공간을 육적인 목적에 맞추어 바꾸어 버린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점점더 삶에 종속된 노예가 되어갈 뿐이다.

지혜로운 자는 오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보존해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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