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1장 12-22절 말씀 묵상
12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그의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예루살렘의 고통은 인간 모두의 고통이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하고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인간 모두의 상태를 대변하기에 모든 인간은 예루살렘의 고통에 동참하여야한다.
유대인의 불의는 인간 모두의 불의를 대변한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유대인들에게 적대적 행동을 취하였지만, 유대인은 인간 모두의 대변자일 뿐, 자신들을 포함한 인간 모두가 예수를 죽인 불의한 자들임을 깨닫지 못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최후의 심판의 그림자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는 심판이 모든 이들에게 임할 것이다.
현재의 삶 가운데 불의를 행하는 자를 비난하기에 앞서서 인간 모두는 동일한 죄임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단지 그들과 같이 자신의 내면의 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악한 행위 이전에 우리의 본질적 죄성에 대한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의 행함은 악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이 없이 행하고 모든 생각과 행동이 죄악인 것이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악에서 자유할 수가 없기에 어느 누구도 정죄하는데 앞장설 수가 없다.
정죄보다는 다만 의사를 표현할 뿐이어야한다.
13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어찌보면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반역과 관계없어 보이나 선지자 자신을 예루살렘과 동일시 함으로서 예루살렘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모습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예루살렘의 고통을 직접 담당하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선지자는 축복을 주실 분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 받는 저주였기에 그만큼 고통이 컸다.
인간은 이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이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이기에, 오직 말씀 가운데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볼 뿐이다.
14 내 죄악의 멍에를 그의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하게 하셨음이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넘기셨도다
(감당해야 할 죄악의 무게)
자신의 죄악의 무게가 가벼웠다면 목에 메어달린 죄악으로 인해서 그렇게 힘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하며, 자신의 죄악을 감당한 능력이 없는 자이다.
주변의 부정적 상황과 원수들은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기에, 주변의 상황과 싸우기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도다
유다는 스스로를 보호하였던 수단들이 무력화됨으로서 더 이상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가 없다.
표면적으로는 적들에 의하여 무력화된 것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유다의 불순종으로부터 인한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실력을 쌓고 세력을 키우면서 무장을 하지만 이들은 근원적인 방패가 될 수 없다.
국가가 아무리 무장을 하여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그 무장들은 휴지 조각에 불과할 것이다.
오히려 주변의 부정적 상황들과 적들을 일으켜 세워서 짓밟힌 포도송이와 같이 멸하실 것이다.
갈수록 커져가는 적대 세력의 위협의 근원에는 내부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순종이 점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현재의 평안은 우리의 실력과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고서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16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눈물과 고통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불행에 대한 것이 아니다.
부모의 심정은 언제나 자식을 향하여 있는 것과 같이 신자의 고통은 사랑하는 자로 말미암아야한다.
신자는 사랑하는 자가 되어 주변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인식하여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절망적인 상황이다.
사람들은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도, 고통이 임하기 전에는 축복을 축복으로 알지 못하고 감사하지도 않는다.
인생은 결국 파멸의 길을 걸어야할 수 밖에 없다.
파멸의 길이 택함받은 자에게는 구원의 길이며, 버림받을 이에게는 멸망의 길이다.
선지자의 애통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서, 버림받게될 그리스도의 고통의 표현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한다.
17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수치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생명이 역겨운 주검이 되었다.
탄생된 아름다운 인생은 주검으로 갈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생이며, 인생은 오직 구원자의 손길을 필요로한다.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두 손을 폈을 때 임한 구원의 손길을 감사하자.
인생은 비록 썩어질 불결함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새 옷을 준비하셨기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자.
18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나 자연법을 통하여 인생들에게 끊임없는 명령을 내리신다.
하나님의 명령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의 안에 거하기 위한 조건이기에, 하나님의 명령은 정당하지만 인생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 할 수 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를 자랑할 수가 없다.
인생은 고발되어질 뿐이기에, 선지자의 고통을 통하여 백성들의 죄악이 고발되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면서 동시에 인생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것이다.
인생이 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구원의 수단이기에 앞서서 자신들의 죄가 고발되어지는 현장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19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도다
인생은 어려운 가운데서 그동안 가까이 지냈던 주변에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도움이 될 수가 없다.
환경적 도움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기에,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에게는 그들은 단지 우상일 뿐이다.
아무리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라고 할지라도 오직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선지자는 유다의 반역을 비난하기보다는 이를 자신의 반역이라고 고백한다.
선지자는 유대의 죄악을 친히 담당함으로서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잇다.
그리스도가 중보자되심은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파괴였으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회복이었다.
선지자가 유다의 반역을 자신의 아들과 집 안의 죽음으로 묘사함으로서, 성부 하나님에 의한 아들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표하고있다.
21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심판받을 자들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책임과 사랑과는 반대로 대적자들은 오히려 선지자의 고통을 즐거워하고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라도 멸망당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시기에, 성도는 악한 자의 불행에 대하여 기뻐하면 안된다.
22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악인의 불행에대하여 기뻐하면 안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악인을 정죄하고, 그들에 대하여 험악한 말들을 많이하지만, 자신도 마찬가지로 심판받을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쉬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죄악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애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말씀 묵상 (0) | 2018.03.20 |
---|---|
예레미야애가 3장 1-18절 말씀 묵상 (0) | 2018.03.16 |
예레미야애가 2장 11-22절 말씀 묵상 (0) | 2018.03.15 |
예레미야애가 2장 1-10절 말씀 묵상 (0) | 2018.03.14 |
예레미야애가 1장 1-11절 말씀 묵상 (1) | 2018.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