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장'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8.01.23 :: 사도행전 9장 32-43절 말씀 묵상
  2. 2018.01.22 :: 사도행전 9장 19-31절 말씀 묵상
  3. 2018.01.21 :: 사도행전 9장 10-19절 말씀 묵상
  4. 2018.01.20 :: 사도행전 9장 1-9절 말씀 묵상
사도행전 2018. 1. 23. 19:21

사도행전 9장 32-43절 말씀 묵상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베드로는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고하더라도 이스라엘이 복음화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집착을 가지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콘스탄티누스의 경우와 같이 이스라엘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중세로마카톨릭과 같이 이스라엘도 부패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성을 아셨기에 초대 교회의 집단화를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은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성전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으며,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종국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다.

어차피 멸망당할 이스라엘이었지만 베드로의 전도로 인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핍박으로 인하여 각지에 흩어졌을 때 교회를 중심으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면서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와줄 수  있었다.

성령 사역은 단편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총체적으로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애니아에게 오랜 고통은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베드로가 내려간 룻다에 병든 자가 없었다면 베드로의 사역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중풍병자의 고통 만큼이나 치유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요9:3)”과 같이 중풍병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인간 사회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질병들이나 부정적 상황들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알리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들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질병으로 고생하는 것은 그만큼 문제를 많이 내포하고 있으면서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접하는 모든 부정적 상황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멸망시키는 수단이되며, 구원받을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 된다.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에게 임한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지상 명령이 성령이 함께하는 사역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실 때에는  능력을 함께 주신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인간의 능력에 의지하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보다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실행하는 살아가야 할 것이다.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능력과 마찬가지의 능력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치유 사역이 영적인 치유 사역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사역으로 인하여 맺어진 열매들은 주님께로부터 온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인 것이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낸 상황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간청하였던 백부장을 연상시킨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과 유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베드로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베드로의 사역과 서신서들이 복음서와 대립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주는 것이다.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증풍병자뿐만이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리는 능력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산자를 치료하는 것 이상임을 보여준다.

죽은 자를 살리는 현상적 이적은 죽은 영혼에 영적인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예수를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서 예수가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능력과 생명을 주시는 이신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실상과 허상)

에니아와 도르가에서 보여준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 있었던 치유 사역을 연상시켜준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면서 무리들이 육의 양식을 넘어서 영의 양식을 얻기를 원하셨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을 단지 굉장한 이적을 베풀었다는 이적의 크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일 것이다.

베드로가 행한 이적은 베드로가 얼마나 큰 인물인가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단지 육적인 생명을 살리는데 그쳤다면 어차피 죽을 인생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치유는 현대 의학으로도 어느 정도는 따라 할 수가 있지만 베드로의 치유 사역과 현대 의학의 치료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현대 의학에 의한 치료는 육적인 생명에 한한 것이다.

베드로의 치유는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각과 능력은 이 땅에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베드로가 행한 치유 사역은 이 땅에서 하늘, 즉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가 있는 상위 구조upper-register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던 하늘과 땅의 연합이 시작된 것이다.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린 베드로의 이적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성령에 의한 새창조 사역으로서, 성령께서 영원한 생명을 창조하고 계시다는 새 창조의 유형을 보여준 것이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는 능력이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죽음의 허물을 벗기는 작업이었다.

아나니아의 기도로 인하여 사울의 눈을 덮었던 비늘같은 허물이 벗겨진 것과 같이 죽음의 허물을 벗김으로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근본적 문제는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 주어져야만 해결 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죽는 것과, 사는 동안 온갖 죄악에 시달리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아니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 세계는 아담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등진체 어둠의 세력 가운데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구속 사역은 인간을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가리키는 모형이면서, 동시에 허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를  환상 가운데 거하는 비현실적 세계로 생각하지만, 인간이 눈으로보는 현실적 세계는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고 인식의 한계 가운데 있으며, 궁극적으로 소멸될 것이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이며,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위해서 이러한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고계신다.

인간의 삶은 허무한테 굴복하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실상으로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실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육체가 갖는 의미는 영원한 것에 대한 씨앗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영원한 것을 싹트이기 위한 사역이다.

성령의 새창조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있다.

인간의 의료의 발달에 인한 치료는 영원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영원에 이르게하는 생명과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의 사역으로만 가능하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22. 18:07

사도행전 9장 19-31절 말씀 묵상


1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사울이 다메섹에 있던 예수의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울을 인도한 아나니아가  다메섹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신뢰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아마 사울이 아나니아가 아니라 별로 여론이 좋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인도를 받았다면 사울도 다메섹에서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아나니아가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이였기에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사용하셨다는 생각이 들기도한다.

이러한 면에서 하나님께 사용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일은 없어야겠다.

현재의 많은 교회들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있다는 사실은 이들 교회가 하나님께 사용되기 힘든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울은 자신이 이제껏 어떠한 일을 하고있었는지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중요한 사실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바울이 앞으로 감당할 사역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직접 사울에게 초자연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더불어 성령으로 말미암은 인식의 변화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말을 담대히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왜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유대인의 손에 죽으셔야만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일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사울이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죽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싶어서 사울을 죽이고자 했을 뿐만이 아니라, 현재도 유대인들이나 유대적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이들도 끊임없이 이러한 사실을 거부하며 왜곡시키고 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대표적으로 이러한 입장에 동참하고 있다.

톰 라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세상 정부를 대변하는 로마에 의한 것이며, 로마와의 대립에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유대인들의 잘못되었던 행동방식을 고치기 위해서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하여야하는지 본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의 행동방식을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해주신 증거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의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하려는 일을 하시고 나면 모든 나라가 그분의 심판과 구원의 통치에 들어올 것이라는 바울의 선교적 소명의 토대였던 전형적인 유대적 개념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톰 라이트,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행전, 215)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유대적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시려는 일을 예수가 유대적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수행한 것이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보는 바울의 선교적 소명은, 모든 나라를 유대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통치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울의 소명은 모든 나라를 유대적 이스라엘 안에 귀속시키려는 유대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중심으로 이해되어야한다.

사울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은 개인적 자격이 아니라 유대적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집단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이는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유대적 이스라엘과 바울이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서로 대립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예수의 역할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어도 행할 수 있는 수준의 역할이기에, 이는 궁극적으로 톰 라이트가 삼위일체를 부인한다는 말까지 나오게된 근원이 된다.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의 급격한 변화는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의 모든 변화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불가능하지만, 사울과 같이 급작스러운 변화와 깨달음은 마치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서 모인 이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함과 같이 획기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도행전의 기록이 성령의 새창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음을 증거해주는 것이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사울을 죽이기로 한 것은 개인으로서의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 조직 가운데 있었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체제가 위협을 받기 때문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울의 싸움은 개인이 조직을 상대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이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은 거대 조직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 안에서의 싸움인 것이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해를 당할지라도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이기에 이러한 싸움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너무도 많은 신앙조직들이 이 세상의 조직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사울의 고난은 예고된 것이었다.

하나님께 사용되는 사람은 이미 받은 고난으로 성장이 다 된 다음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되어지는 가운데 고난을 감당해야한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생기는 여러가지 어려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의 과정임을 생각하면서,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고난을 잘 극복할 수 있게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쫓아가는 입장이 아니라 쫓기는 입장이된 것이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 보는 이들은 상황의 변화를 행동 방식의 한 가지로 보지만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보려는 이들은 사울의 행동방식까지도 따라서 하려고 한다.

지금의 상황은 방법론적 접근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세상과 충돌되는 현상을 보여준 것이다.

방법을 배우려거나 따라하려는 것은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간 시기는 다메섹에서의 회심 이후 삼년 만이었다.

사울은 분명 스데반 순교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과거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신앙인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용서가 없이는 진정한 사역의 진보를 가지기 어렵다.

이때까지 예루살렘에서는 사울의 회심에 대한 신뢰가 없었고, 사울 또한 적극적인 활동의 진전을 가지지 않았었지만 사울의 방문으로 인하여 공식적인 활동이 시작 될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은 생각이 있다고 바로 시작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많은 지혜와 능력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참된 순종은 자기 열심보다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함을 본다.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성도의 친밀한 교제는 꼭 필요하다.

자신에 대하여 분명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공유하면서도 아무 이해관계없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

성령의 역사는 공동체의 회복이기에 성도 간에 교제가 없이 혼자하는 신앙 생활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사울의 사역이 처음에는 상당히 더딘 진보를 보인다.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은 사울이 사역의 시작에 대한 공적인 선언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위협으로 인해서 자신의 고향인 다소로 돌아가 바나바가 다시 찾아 올 때까지 꽤 오랫동안이나 머문다.


다소는 나름대로 문명의 중심 가운데 있었기에 사울은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와서 자신의 변화된 관점에서 이전의 자신을 되돌아 보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문명과 문화를 다시 한 번 변화된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바울의 기록은 주로 서신서에 나타난 것이 전부였지만 그의 서신이 복음서 안에 제대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 자신이 살았던 세상을 다시 새롭게 보는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만 했을 것이다.


신앙 생활의 정립을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오랜 삶의 환경 가운데 형성된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정립하는 시간들이 필요하다.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도는 고난과 환란 가운데 더욱 장성해진다.


고난과 핍박이 없는 환경에서는 나약해 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가 축복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하는 근거가된다.


한국교회의 급성장과 핍박이 없는 환경은 축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온지 몇년도 안되어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한국 교회 성장의 원동력은 고난과 핍박이었다.


현재와 같이 고난과 핍박이 없는 환경에서는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상실되었기에, 교회가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쉽게 오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는 사도 시대와 같이 핍박과 평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든든히 세워져 갈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21. 20:08

사도행전 9장 10-19절 말씀 묵상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한계를 넘어서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이 땅이 아직 천상의 영역과는 분리되었음을 말한다.

이 땅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였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는 과정 가운데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구속이며, 궁극적인 우주적 구속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임할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선교적 교회론으로서의 우주적 교회는 현재의 이 땅에 대한 구속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택한 자들에 대한 제한을 넘어서 이 땅에 대한 현재적 구속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이 땅의 백성들에게 말씀 하실 때 환상 가운데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눈에 보이는 자연적 방법으로 말씀 하셨을 것이다.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G. Kline은 마지막 심판 때의 구속 사건은 천상의 상위 구조upper-register와 이 땅의 하위 구조lower-register가 만나 하나님과 천사가 있는 상위 구조로서의 하늘과 인간이 거하는 땅이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 완전한 구속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현재의 땅의 구조에서 톰 라이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적 하나님 나라이며, 그가 말하는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확장된 유대적 하나님 나라로서 개혁주의에서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다른 뜻을 지닌 같은 용어일 뿐이다.

환상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만나시는 통로가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이 신적 존재를 경험하고자 행하는 관상기도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직접 만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이 땅에서의 새 창조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모든 상황을 세세하게 아시고 직접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머리로는 그 크기를 알 수가 없다.

모든 이들로부터 칭찬받는 아나니아를 택하시고 모든 거리의 명칭과 상황을 아시고 직접 지시하시는 하나님은 분명 제한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문명의 발전과 컴퓨터 기술을 통해서 놀라운 방법으로 정보를 얻어내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첨단 컴퓨터보다도 더 뛰어나신 분이 아니라 제한limit이라는 자체가 없으신 분이시다.

우리의 마음 속 깊은 생각부터 시작해서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다 아시고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신다.

아나니아를 부르실 때 사울이 기도하는 것을 알고 계셨듯이, 우리가 골방에서 조용히 속싹이는 기도까지도 정확하게 다 들으시고 함께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완전히 알게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에 놀라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살아갈 능력을 상실하게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숨으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침묵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고난 가운데 얼굴을 감추시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참된 안식은 우리의 문제를 다 덮으시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의탁 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하나님께서 직접 눈을 뜨게 하실 수도 있지만 성도들 가운데 역사가 일어나길 원하신다.

에덴을 세우시고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서 아담으로하여금 에덴을 다스리게 하신 것은 아담을 통하여 에덴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아나니아를 부르신 것은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하나님의 자녀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것이다.

이제 아나니아를 부르시고 사울을 준비시켜서 아나니아로 하여금 안수하게 하심으로 이 땅에 대한 새창조로서, 실패하였던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안식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는 성령의 창조 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참여하여야한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왜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친 사울을 택하셨을까?

유대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사용하셔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듯이, 민족주의자인 사울을 택하셔서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어떠한 항변도 할 수가 없었으며,  자신에게서 나오는 어떠한 자신감도 가질 수가 없다.

철저한 유대적 민족주의자였던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자신의 뿌리와 재능을 전부 박탈당한 것이다.

사용받기 위해서 준비하는 자들은 그동안 자신이 쌓은 수고에 대한 보답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고, 자신의 공로를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지만, 사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어떠한 공로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들은 자신이 공들인 것에 대하여 보상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아시기에 철저하게 무너진 사울을 선택하심으로서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일꾼으로 삼으신 것이다.

종종 교회의 가장 큰 장애 가운데 한 가지는, 오랫동안 교회에 공들이면서 교회의 장로가 된 이들 가운데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분열을 부축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들은 교회에서 어떠한 기득권도 주장해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울은 많은 교회를 세우고도 자신이 어떠한 자였는지를 알고있었기에 어떠한 기득권도 주장하지 않았다.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는데도 이미 다메섹에는 사울에 관한 이야기가 퍼져있었다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상황이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마 다메섹의 성도들은 사울의 위협을 피하고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구원을 위해서 간절하게 부르짖었을 것이다.

대제사장 무리들과 사울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박해하려고 기세등등하게 작전을 실행하고 있었겠지만, 다메섹 성도들의 기도로 인하여, 긴장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간섭 하심은 긴박하게 전개된다.

모든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갈 때 상황의 긴박성 만큼이나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준비해야한다.

대한민국의 현재의 상황은 모든 것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다.

대제사장과 사울의 박해 만큼이나 북한과 미국의 긴장감 가운데, 다메섹의 성도들과 같이, 대한민국이 위기로 치닫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부르셨듯이, 이 긴박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 하심으로 북핵 문제가 잘 해결될 수 있도록 그 어느 때보다도 성도의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은 이미 창세 전에 준비되었던 것으로서 인간의 생각의 한계를 넘어선다.

분명히 잘못한 것은 현재인데, 잘못한 결과에 대한 징계는 이미 잘못을 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을 잘못한 이후에 알게되는 경우가 종종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간섭하시는 가운데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것이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자신의 생각의 틀에 집어넣고 해석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박해하였던 사람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될지 누가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성도에게 현재는 단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 진행되는 것을 경험하는 시간일 뿐이며 앞으로의 일은 알 수가 없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하심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뜻 가운데 있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상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현재가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기도로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현재를 살아가야 할 뿐이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무조건적인 축복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세상적인 축복의 개념을 성도들에게 적용시켜서 복음을 왜곡시키고있다.

성도가 누리는 축복과 평안은 세상적인 풍요와 만족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진정한 축복은 고난 가운데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이다.

고난이 없이는 깨끗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께 사용받는 자는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깨끗함으로 준비되어야한다.

깨끗함은 우선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없애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이 가득했던 모세는 40년의 세월을 허무하게 보내었지만, 그 시간은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고난받는 시간은 가장 무익한 시간 같지만, 실상은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인간이 보기에 가장 비실용적이고, 가장 손실이 있는 시간이 하나님 앞에 서는 가장 유익하고 귀중한 시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유물론적 사고에 물들어 있어서 실용주의적 방식을 신앙에 적용시키기도한다.

성도는 삶의 여정 가운데 경험하는 실패와 손실과 낙담과 좌절의 시간들을 절망적이고 손해본 시간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가장 위험한 상황은 자신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신 만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안수는 자신이 가지고있는 것을 전달하고 위임하는 방법이다.

사도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을 생각할 때 사울이 사도도 아닌 단순한 제자 한 사람으로부터 안수를 받았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사울의 성령 충만은 아나니아의 성령 충만함이 안수를 통해서 전달된 것이다.

성령은 아나니아의 소유가 아니기에 안수하는 이는 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성령은 성도를 새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시다.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진 것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동시에 시작 되었다.

사울이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은 성령과 더불어 시작 되었다.

성도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내주하시는 성령과 더불어서 이루어져야한다.

성령의 렌즈로 보는 세계는 인간의 관점에서보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관을 형성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성도로하여금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불행히도 많은 기독교 세계관들이 둘 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고있다.

대표적인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알버트 월터스Alvert Wolters의 “창조 타락 구속” 기독교 세계관에는 둘 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담을 오실자, 즉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설명하면서 둘 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있다.

기독교세계관 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활동하는 교회 개혁이 윤리적 교훈에 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변화될 수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텐리 그랜츠는 성령의 사역을 주로 회개할 수 있는 역할로 제한 시킨다.

회개는 성령을 받은 이들의 열매 가운데 한 가지 일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교회에서는 교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회개를 말하지만 회개는 변화의 조건이 아니라 변화의 열매이다.

회개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 되었기에 회개하는 것이다.

새관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이 되기 위한 회개를 강조하지만 ,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열매일 뿐이다.

바울은 성령을 받았기에 일어나 아나니아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지 세례를 받았기에 변화된 것은 아니었다.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음식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이다.

초자연적인 신앙생활도 자연적인 삶의 법칙 가운데 진행되어야한다.

금식도 금식 자체로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금식은 경건의 방법 가운데 한 가지이며, 진정한 금식은 인간적 혈기를 제어하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사도행전 2018. 1. 20. 17:33

사도행전 9장 1-9절 말씀 묵상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사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정의에 사로잡혀있던 자이다.

정의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정죄하는 일에 앞장선 자였다.

홍길동, 스파이더맨, 황금박쥐와 같이 정의의 사자는 인간의 희망사항이었으며, 어느 시대에나 누군가의 역할이 있었다.

이러한 이들로 말미암아 표면적인 정의는 실현되었을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의 복음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잘못된 것에 대하여는 나서서 정리하는 이들이 있기에,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이들로 인하여 사회가 안정을 찾는 면도 있다.

이러한 정의는 민주사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공산권 국가인 예전의 중국의 영화들도 대부분 권선징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사회를 깨끗이 하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율법 아래에서의 정죄는 사회를 표면적으로는 깨끗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정의를 외치면서 사회 개혁에 앞장서는 이들은 대부분 표면적인 깨끗함을 위해서 정죄하는 일에 앞장서곤 한다.

이와달리 복음은 표면적인 문제를 다루지도 않으며, 정죄하는 일에 앞장서는 도구로 사용될 수도 없다.

참된 복음의 진리를 아는 이들은 사회개혁이나 교회 개혁을 위해서 정죄를 일삼거나 마녀 사냥을 하지 않는다.

참으로 복음을 아는 이들은 정죄를 하는 구약의 율법의 방식을 넘어선다.

복음을 아는 이들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임을 일깨워준다.

복음을 아는 이들은 정죄보다는 사랑과 용서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상황 가운데 말씀하시는 것을 전한다.

참된 복음을 아는 이들은 사람이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상황 가운데 직접 간섭하시는 은혜를 구한다.

복음을 아는 이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지기를 간구한다.

준비되어지지 않은 본질적 죄인에게 아무리 정의를 외쳐받자 더욱 죄만 드러낼 뿐이다.

참된 복음을 아는 이들은 정죄하기보다는 사도들과 같이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하는데 전념한다.

어둠과 싸우기보다는 빛을 비추는 것이다.

사울의 잘못은 자신이 알고있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에 율법의 틀 안에서 정의의 사도와 같이 정죄하는 일에 앞장 섰던 것이다.

현재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이들도 사울과 같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전부라는 입장에서 율법적인 방식으로 정죄하는 일에 앞장설 뿐, 정작 기도하면서 사랑하는 가운데 말씀의 빛을 비추는 일에는 소홀히 한다.

이들은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성경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골라내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데 능숙할 뿐이다.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의 박해는 공적인 집행이었다.

이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하나님 앞에서 유대적 율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왕들의 역사였으며, 성직자들의 역사였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왕들과 성직자들에 대한 말씀이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결산은 왕들과 성직자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동체적 관계성이었다.

사도들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복음화되고 사마리아 성이 복음화되었다고하더라도 이들이 이스라엘을 대변하지는 못했다.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역사적 이스라엘에 대한 공동체적 결산이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신약의 교회를 역사적 이스라엘의 연속선상에서의  확장 개념으로 접근하지만 하나님과 역사적 이스라엘은 공동체적 관점에서 분명한 결산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성을 비롯한 이스라엘 곳곳에서의 개인적 복음화와는 달리 공동체로서의 역사적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신약의 교회에 대하여 반대하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였기에 톰 라이트의 주장과 같이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역사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이 있어야지만 획기적인 변화의 과정을 겪는다.

노아에게 나타나셔서 방주를 짓게하셨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으며,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출애굽을 준비하게하셨으며,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구속자를 약속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복음의 빛을 비추셨다.

이제 성령의 오순절 강림하심으로 새롭게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사도행전의 역사 가운데 직접적으로 나타나셔서 강권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

기세등등했던 사울에게 임한 하늘로부터의 빛은 이방인을 향한 전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은혜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 대한 부르심으로 인하여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하여 이 땅에 실행되었으며, 사울에게 비추인 하늘로부터의 빛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 하나님의 언약을 이방인인 우리에게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인 것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성도에 대한 박해는 그리스도에 대한 박해이다.

성도를 대함은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이다.

성도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일그러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서 회복되었기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의 자녀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결코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모든 행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대변하고있기에 행동에 있어서 무척이나 조심하여야만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하나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이기에,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 악취를 풍기지 않도록 자신을 잘 가꾸어야한다.



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청천벽력같은 말씀이다.

순간 상황 파악이 안될 것이다.

인생이 가장 비참하게되는 순간이다.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데로 살았는데 자신이 틀렸다고, 더군다나 틀린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악인이었다고 판별될 때 이처럼 비참한 일이 없을 것이다?

사울의 행동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행동방식을 대변해준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에덴에서 타락한 아담을 대변하면서 동시에 아담의 후손인 인류를 대변해준다.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를 따라 행동하지만 인간의 본능에 의한 정의는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불신자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따라서 행동을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러한 일들이 악으로 판가름 날 수도 있다.

인간이 보기에 좋은 문명의 발전과 의학의 발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이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의 세계, 즉 하나님과  분리를 추구하는 악한 죽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사울과 같이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악으로 결론 날 수밖에 없다.

사회에서는 가끔 희생 당하는 이들의 죽음에 대하여 무죄한 이들이라는 용어를 갖다붙이지만, 이 세상에 무죄한 이들은 아무도 없다.

모두 다 사울과 같은 이들이며, 단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죄가 억제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은혜가 없이는 모든 인간의 삶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같이 하나님을 대적한 이들로 판가름 날 것이다.



6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사울 스스로의 변화를 말씀하지 않으시고 가르침을 받을 것을 말씀하신다.

사울은 모든 이들로부터 스스로 독립적이었던 교만한 사람이었지만, 졸지에 이름도 없는 사람에게서 배워야하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눈이 안보여 무장해제된 사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철저히 무너진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성추행 혐의로 지탄을 받는 J목사는 예전에 항상 청년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속하여있는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좀처럼 각 분야의 최고를 사용하시지는 않으신다.

설령 최고의 사람을 사용하신다고 하더라도 모세와 같이 광야에서 자신의 교만을 완전히 꺽으시고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낮은 자를 사용하시어 높은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

세상에서 잘되었다고 하나님께 복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모세와같이 꺽이고 사울과 같이 눈이 안보이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축복의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한 아부일 뿐이다.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같이 가던 사람들이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겼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에게나 들려지는 것이 아니다.

준비가 않된 이들이 구체적인 상황에 개입이되면 부작용만 낳을 뿐이다.

말씀으로 임하신 그리스도는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하여 준비가 도

어있었고, 또한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을 통하여 예비가 되어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마음의 문을 연 이들에게 임할 때 부작용이 없을 것이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상대방의 마음 문이 열리도록 기도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모세는 왕족의 기운을 빼는데 40년의 세월이 걸렸지만 사울은 그 혈기가 빠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하여 짧은 시간 안에 변화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을 입을 수가 있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신학의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사울이 바울이 도

는 시간은 길지가 않았다.

훌륭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의 공부가 필요하겠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오랜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오랜시간 공동체적 훈련 과정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만든 제도로는 결코 사람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

모든 제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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