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23. 19:21

사도행전 9장 32-43절 말씀 묵상


32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베드로는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고하더라도 이스라엘이 복음화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집착을 가지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콘스탄티누스의 경우와 같이 이스라엘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중세로마카톨릭과 같이 이스라엘도 부패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성을 아셨기에 초대 교회의 집단화를 허락하시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은 멸망할 때까지 끝까지 성전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으며,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종국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었다.

어차피 멸망당할 이스라엘이었지만 베드로의 전도로 인하여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핍박으로 인하여 각지에 흩어졌을 때 교회를 중심으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면서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와줄 수  있었다.

성령 사역은 단편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총체적으로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애니아에게 오랜 고통은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베드로가 내려간 룻다에 병든 자가 없었다면 베드로의 사역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중풍병자의 고통 만큼이나 치유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요9:3)”과 같이 중풍병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인간 사회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질병들이나 부정적 상황들은 궁극적으로 구원의 필요성을 알리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들이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질병으로 고생하는 것은 그만큼 문제를 많이 내포하고 있으면서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접하는 모든 부정적 상황은 멸망받을 자에게는 멸망시키는 수단이되며, 구원받을 자에게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 된다.



34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베드로에게 임한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지상 명령이 성령이 함께하는 사역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실 때에는  능력을 함께 주신 것이다.

인간으로부터 출발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인간의 능력에 의지하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보다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실행하는 살아가야 할 것이다.



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능력과 마찬가지의 능력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치유 사역이 영적인 치유 사역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베드로의 사역으로 인하여 맺어진 열매들은 주님께로부터 온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만이 맺을 수 있는 열매인 것이다.



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38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낸 상황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간청하였던 백부장을 연상시킨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과 유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베드로를 통하여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베드로의 사역과 서신서들이 복음서와 대립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주는 것이다.


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증풍병자뿐만이 아니라 죽었던 자를 살리는 능력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산자를 치료하는 것 이상임을 보여준다.

죽은 자를 살리는 현상적 이적은 죽은 영혼에 영적인 생명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예수를 따라서 행동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서 예수가 따름의 대상이 아니라 능력과 생명을 주시는 이신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43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실상과 허상)

에니아와 도르가에서 보여준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 있었던 치유 사역을 연상시켜준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면서 무리들이 육의 양식을 넘어서 영의 양식을 얻기를 원하셨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을 단지 굉장한 이적을 베풀었다는 이적의 크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일 것이다.

베드로가 행한 이적은 베드로가 얼마나 큰 인물인가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단지 육적인 생명을 살리는데 그쳤다면 어차피 죽을 인생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치유는 현대 의학으로도 어느 정도는 따라 할 수가 있지만 베드로의 치유 사역과 현대 의학의 치료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현대 의학에 의한 치료는 육적인 생명에 한한 것이다.

베드로의 치유는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고 기록한 바와 같이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각과 능력은 이 땅에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베드로가 행한 치유 사역은 이 땅에서 하늘, 즉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가 있는 상위 구조upper-register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분리되었던 하늘과 땅의 연합이 시작된 것이다.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린 베드로의 이적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성령에 의한 새창조 사역으로서, 성령께서 영원한 생명을 창조하고 계시다는 새 창조의 유형을 보여준 것이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하는 능력이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죽음의 허물을 벗기는 작업이었다.

아나니아의 기도로 인하여 사울의 눈을 덮었던 비늘같은 허물이 벗겨진 것과 같이 죽음의 허물을 벗김으로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근본적 문제는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 주어져야만 해결 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예외없이 죽는 것과, 사는 동안 온갖 죄악에 시달리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아니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창조 세계는 아담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등진체 어둠의 세력 가운데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구속 사역은 인간을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가리키는 모형이면서, 동시에 허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를  환상 가운데 거하는 비현실적 세계로 생각하지만, 인간이 눈으로보는 현실적 세계는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고 인식의 한계 가운데 있으며, 궁극적으로 소멸될 것이다.

인간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이며,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신자를 위해서 이러한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고계신다.

인간의 삶은 허무한테 굴복하는 허상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실상으로서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영원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실체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제한된 시공간 안에서 육체가 갖는 의미는 영원한 것에 대한 씨앗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영원한 것을 싹트이기 위한 사역이다.

성령의 새창조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있다.

인간의 의료의 발달에 인한 치료는 영원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영원에 이르게하는 생명과 실체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의 사역으로만 가능하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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