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5장 12-26절 말씀 묵상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말미암아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것으로서 믿는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인한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백성의 확장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서로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마지막 때에는 사랑이 식어진다.
사랑이 식어졌다는 것은 은혜가 사라졌다는 것이고 성령께서 좀처럼 사도시대와 같이 역사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신사도 운동에서 하는 이들은 사도시대의 성령의 역사를 재현해보려고 하지만 이들이 하는 이상한 행동들은 거의 귀신이 발광하는 모습이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를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물론 사도 시대는 정경이 정립되기 이전의 특수성이 있지만 지금 시대는
기독교의 세속화로 인한 순수성이 심각하게 결여되어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성도가 성도로 보이기보다는 유물론적 효용 가치로 보이는 시대이다.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떠나서 인간적 개념의 신론 중심의 신학이 되어버렸다.
신학의 기독론에서 신론으로의 중심 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왜곡된 결과를 가져왔다.
윤리를 앞세우는 인본주의적 기독교는 오히려 사람의 죄성이 가득하여 사랑이 없는 정죄를 하기에 바쁘다.
많은 발전에도 불구하고 머리만 커진 현대 기독교는 성령의 능력이 상실된 하나의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되어버렸다.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부흥을 가져온다.
현재의 믿는 자의 감소는 일단 현재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쇠퇴하고있음을 보여준다.
성령 사역의 감소는 일단 준비되어있지 않은 교회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다.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일차적으로는 인간적인 필요에 의한 만남이 있더라도 이차적인 열매로서의 믿는 자들이 생기게된다.
교회가 사회의 칭송의 받으면 사람들은 교회로 오게되어있고 이차적으로 이들을 거룩한 성도로 양성을 시켜야한다.
세상에서는 처음부터 액면 그대로의 복음 전파를 기대할 수는 없다.
전도를 위해서 길에서 외치기보다는 삶의 현장에서의 만남을 통한 성령의 간섭하심을 간구해야한다.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다 나음을 받을 정도의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사도 시대의 성도의 순수성과 열심을 볼 수도 있겠지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초창기의 하나님의 강력한 특별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험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성도는 힘든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더욱 크신 특별 은혜로 간섭하시기를 간구해야한다.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시기와 질투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인간의 높아지고자하는 욕망이 죄절된데서 나온다.
인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사단과 같이 높아지고자하는 욕망이 내면에 깔려있기에, 시기하고 질투하는데서 자유할 수가 없다.
시기와 질투는 인간이 사단의 종노릇하는 통로가 된다.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대제사장이 사도를 옥에 가둘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면, 대제사장은 이미 막강한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정치적 권력과 믿음이 아무 문제없이 공존되는 역사가 거의 없어기에, 대제사장들의 권력 남용은 신정정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오직 복음 전파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중지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약 시대에는 복음 전파가 없는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결코 원하시지 않는다.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전적으로 순전한 것이다.
제대로된 복음 전파는 순수성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이 시대 복음의 왜곡은 순수성이 결여됨으로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고있다.
순수성을 가진 복음이라 하더라도 신학이 왜곡된 순수성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다.
사도들이 경험했던 기적들과 비슷한 일이 “하늘에 속한 사람”의 저자 윈형제에게도 일어났다고 하지만 상황이 목적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윈형제의 목적은 백투예루살렘이라는 세대주의적 행동방식을 위한 간증으로서 신학적 근거가 결핍된 간증이기에 그 위험성을 분별하여야한다.
사도시대의 간증은 정경이 정립되기 이전의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서, 성경이 정립된 현재에는 성경에 대립되는 유사 간증을 분별해 낼 필요가 있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작정하신 일을 막을 수가 없다.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성전맡은 자, 제사장들….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데 주축이 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직자들이다.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와 신학은 오직 전문가들이 독점하고서 비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것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 현실이다.
25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성전맡은 자에게 부하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이들이 권력자의 대열에 있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이상적인 신정체제가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나마 어느 정도 순수성을 지켰던 칼빈마저도 사람들은 마녀 사냥하기에 바빴다.
칼빈을 끝까지 따라다니며 그를 방해했던 세르베투스가 처형을 당하였던 것은 제네바라는 신정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에 대한 처형이 시의회의 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칼빈이 사람을 처형했다고 칼빈에 대하여 마녀사냥하기에 바쁘다.
중세 로마카톨릭의 악행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형집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실을 왜곡시킴으로서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볼때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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