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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020. 7. 17. 22:41

로마서 1장 2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복음의 5가지 구성 요소


하나님


복음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인간이 만든 종교이다.


인간 세계에 종교가 없는 종족이 없으며 또한 모든 종족의 중심에는 종교가 있다.


그만큼 인간에게 하나님과 구원은 삶의 주제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은 어떠한 종교와 철학도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역사 속에 수많은 인간들이 오랜 역사를 통해서 그렇게 많은 고민과 생각을 통해서 구원의 문제와 씨름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는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구원의 문제와 씨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느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비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린 모든 결론은 빛이 없는 흑암으로 결론이 나지만,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복음은 흑암에 비추이는 빛과 같이 또 하나의 창조의 과정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물질적인 세계만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영적으로 죽어있던 생명체에 살아 숨쉬는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스스로 숨을 쉬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새생명을 불어넣으심으로서 택하신 자로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하는 복을 주신다.


복음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듯이 복음에는 구원의 근거에 인간의  공로가 가미될 수 없다.


인간의 공로가 요구되는 어떠한 이론도 더 이상 참된 복음일 수가 없으며, 더군다나 하나님의 복음일 수 없다.


하나님의 복음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전적인 인간의 부패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이 전제가 되어야 참된 복음이 될 수 있다.



선지자


최초의 선지자는 아담이었다.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선지자로서의 역할은 모든 피조 세계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는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비가시적인 하늘과 가시적인 땅의 연합에 있었다.


모세는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기록한다.


태초에 비가시적 하늘과 가시적 땅이 창조되었던 것이다.


에덴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되는 곳이었다.


에덴에서 아담이 순종에 성공하였다면, 아담은 이 땅에서 에덴을 확장시키고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함으로서, 이 땅이 하늘과 연합되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은 아담이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직책에 실패함으로서, 이 땅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에게 종속되게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대한 왕권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세우시기로 작정하시고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아들을 준비시키셨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아들에 관하여 예언을 하였으며 아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심으로서 최종적 선지자가 되셨다.


선지자의 최종적 역할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이며,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이 완성되는 마지막 날에는 하늘과 땅이 연합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이다.



그의 아들


그의 아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의 중심에 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지만 복음을 훼손하려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의 중심에서 제하려는 시도를 한다.


톰 라이트의 경우는 성경의 몸통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이전과 신약은 머리와 꼬리라고 말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는 유대주의 이스라엘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오신 부차적인 인물일 뿐이다.


현대신학은 기독론보다는 신론 중심의 복음을 주장함으로서 보편구원론을 추구한다.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대표성을 가진다.


처음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대표한다.


둘째 아담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신자를 대표한다.


구원을 위한 복음은 아들에 관한 복음이어야한다.


아들에게 요구되는 첫번째는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다.


불순종으로는 아들이 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성경 해석은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처음 아담의 불순종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으로 묘사되어야만한다.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의 대비는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언약이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 언약이었다는 개념이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칼 바르트를 비롯한 신정통주의자들은 아담의 행위 언약을 부정하기에 둘째 아담으로서의 순종의 의미, 즉 능동적 순종의 개념을 인정하지 않기에 능동적 순종이 배제된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의 전가만 인정한다.


능동적 순종의 전가가 배제된 전가 교리는 모든 이들에 대한 속죄 개념으로 확장되며 결과적으로 만인 구원론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원시복음(창 3:15)으로부터 시작된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이어야한다.


톰 라이트는 처음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적에 암묵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였다고 주장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처음 아담과의 관계성을 배제하고서 해석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키신 분이 아니며 단지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적 죽음으로서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실 필요도 없기에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신격을 손상시키며 결과적으로 삼위일체 개념마저도 훼손시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선지자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격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복음의 중심에 있으신 분이시다.



성경


하나님께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다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이다.


성경을 통하여 미리 약속하신 주체는 하나님이시기에 성경 말씀을 기록하신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사람은 성경을 기록한 주체가 아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단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되었을 뿐이다.




성경의 저자가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들에 관한 약속을 성경에 기록하시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사람은 증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사람의 책에 자신의 약속을 기록 하시지는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도록하신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이다.


칼 바르트는 성경이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한 인간의 책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성경의 저자가 인간이라면 성경은 언제나 새로운 버전으로 수정 보완 되어야하지만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은 일점 일획도 수정 보완 될 수가 없다.


성경은 복음을 위해 기록된 책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한 부분이지만 그 중심은 아들을 증거하기 위한 기록이다.



미리 약속하신 복음


하나님의 복음은 아담의 범죄 직후에 바로 약속되어졌다.(창 3:15)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요구하셨던 순종은 창조 세계의 완성을 위한 것이었다.


아담은 불순종함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여야할 자격을 상실함으로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손상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불순종 직후에 둘째 아담에 대한 약속을 하심으로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이 온전하게 선포되도록 계획하시고 선지자를 통하여 아들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왕권이 회복된다.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이 회복되었다고 이 땅이 구속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 땅은 최후의 심판까지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세상으로서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까지 이 땅은 죄 가운데 놓여질 것이다.


문화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피조 세계의 구속을 의미하는 우주적 교회론을 주장하지만, 아직 최후의 심판이 남아있기에, 하나님의 왕권의 회복과 구속은 구분되어야한다.


아담의 타락 직후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수도 있으셨지만 왜 구약이라는 오랜 시간의 흐름이 있은 다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야만 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창세 전에 미리 택하신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지만, 그보다도 인간은 역사를 통하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고는 결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게하는 역사였다.


톰 라이트는 미리 약속하신 복음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 두고있지만, 육적인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의 모형으로서 인간의 죄를 드러냄으로서, 둘째 아담에 의한 구속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미리 약속하신 복음은 육적인 이스라엘을 통하여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의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된 것이다.


구원의 역사의 시간들에는 인간의 죄가 항상 고발되어야한다.


인류의 역사는 종교와 전쟁의 역사이다.


이는 모든 인간이 죄와 더불어 살면서 동시에 구속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자는 사는 동안에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서 오직 믿음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될 수 있음을 고백하여야한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행위를 더해야지만 구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복음이 약속을 근거로 한 것이며 복음은 신약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톰 라이트는 출애굽한 사건을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음의 성취였다고 보고 복음의 몸통을 육적인 이스라엘로 보는 유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있다.


새관점에서는 유대인들이 좀 더 잘하였더라면 신약으로 연결되지 않는 구약 성경만으로도 복음이 완성될 수 있었다고 본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유대주의적 신율법주의의 완성을 위한 부차적 수단으로 존재할 뿐이다.


새관점은 행위를 요구하는 유대주의와 마찬가지로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행위가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새관점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출애굽한 가나안의 육적인  이스라엘을 자리잡게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소외시킨다.


새관점에서는 선지자들을 통한 미리 약속하신 복음이 이스라엘의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



적용


바울이 전하는 아들에 관한 복음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적 증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역사적 증거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경이 증거하는 실체로서의 그리스도이시다.


선지자들을 통한 성경의 약속은, 구약이 신약을 증거하기 위한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신약은 아들을 증거하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는 유대 이스라엘이 실체인 몸통이며, 창세기와 신약은 머리와 꼬리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유대주의의 완성을 위한 부차적인 존재로 해석하며, 유대 이스라엘을 실체로 보는 유대주의적 사고를 하고있다.


하지만 모세를 비롯하여 이스라엘을 향한 선지자들의 결론은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있다.


복음이 복음되기 위해서는 죄가 드러나야한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처음 아담의 범죄를 증거하고있다.


구약은 인간이 왜 죄인인가를 말해주고았다.


선지자는 죄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아들에 관한 약속을 전하고있다.


신약의 당위성은 구약을 근거로한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을 통하여 미리 증거되었다.


현재의 당위성은 역사와 전통을 근거로해야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와 전통을 해체시키고, 그 빈자리를 자아 중심적인 새것으로 대체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신학을 표현하는 현대신학들은 모두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역사와 전통의 고리를 끊어 버리려한다.


톰 라이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한 가지는 “우리가 이제껏 복음을 잘못 이해하였다”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종교 개혁의 역사와 전통을 거부한다.


하지만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은 역사적 예수 탐구라는 주제의 역사 위에 세워진 것이다.


라이마루스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예수 탐구는 슈바이처에 이르러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슈바이처의 역사적 예수 탐구와 불트만 학파인 케제만의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제2성전 유대교를 근거로한 “언약적 신율주의”와 조합을 시켜서 만들어낸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이 없으며, 현재의 모든 것은 역사와 전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신학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에 뿌리를 둔 아래로부터의 신학과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에 뿌리를 둔 위로부터의 신학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이 전하고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의 선지자로부터 약속된 아들에 관한 위로부터의 신학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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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
로마서 2020. 7. 15. 22:18

로마서 1장 1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자신의 신분과 직책, 그리고 소임에 대하여 설명한다.

종이라는 의미는 일꾼이라는 역할의 의미 이전에 주인의 소유물이라는 신분을 나타낸다.

종이라고 반드시 일꾼인 것은 아니다.

종은 주인이 일을 하지 말라고하면 일꾼이 될 수 없기도한다

또한 종은 신앙인 가운데 특정 부류만 가리키는 신분도 아니다.

흔히들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신자는 주의 종이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소유물로서의 주의 종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다.

마치 요셉이 가뭄으로 굶주린 애굽인들에게 곡식을 팔아 애굽인들을 바로의 종으로 드렸듯이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셔서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의 소유물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의 죄의 값을 치르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오직 택한 자들만을 위해서 속죄 사역을 하셨기에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오직 신자들만이 주의 종이다.

오직 창세 전에 택정함을 입은 자들만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오직 이들만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모든 신자가 공통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자의 신분으로서의 표현이다.

 

종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사회적 비하가 아니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자신을 종이라고 부른 것은 사회적인 비하를 내포하고있는 것이라고 말한다.(톰 라이트, 로마서, 38)

이러한 해석은 복음을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의 해석이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것은 상대방에 대한 겸손의 표시가 아니라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상대방에 대한 겸손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종이라는 표현에는 자신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소개하고자하는 의도가 내포되어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 함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을 사셨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종이라는 표현이 겸손에 대한 표현이었다면 로마서 전체가 자신과 같이 겸손한 사람이 되기 위한 서신이 될 것이다.

실제로 톰 라이트는 로마서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다.

새관점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따름의 대상이다.

하지만 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 진정 말하고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삶에 대한 것이다.

겸손은 다른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에서 나온 표현이지만 종은 수직적 관계에서 나온 표현이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수평적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니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수직적 관계를 위한 것이며 수평적 관계는 어디까지나 이차적인 것이다.

톰 라이트는 바울이 앞으로 방문하게될 로마 사람들에게 겸손을 표시하기 위해서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고 말하지만 이는 바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해석이다.

 

목회자는 주의 종인가?

종종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기도한다.

하지만 주의 종이라는 말은 목회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위해서 돌아가셨고 이들을 피값으로 사셨기에 모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종은 신자의 신분이며 직책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책을 사도라고 표현한다.

목회자를 직책의 관점에서 주의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할 수 없다.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칭하는 것은 역으로 일반 성도는 주의 종이 아니라는 말을 내포한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자는 없다.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온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다(요 8:4).

서기관과 바리세인은 하나님 말씀을 가장 잘 알고 자신들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말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서 죄의 종이다.

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더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신자는 진리 안에서 자유케된 이들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진리이다.

성도는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말씀 안에 거할 때 더 이상 죄가 지배하지 않는 참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함으로서,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자신에게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것임을 말하고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자신의 생각에서 출발된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어떤 신학자는 4복음서와 바울 서신서가 서로 대립적 관계에 있다고 해석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4복음서에서 전하고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킨다고 말하기도한다.

하지만 바울은 신학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이다.

사도와 신학자는 구분되어야한다.

어떤 목회자는 설교시간에 노골적으로 사도를 목사라고 칭하면서 자신을 자칭 사도라고 부르는 거짓을 말하기도한다.

복음 전파는 자신의 인간적인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3년간의 공생애 사역을 같이하였지만 성령이 임하기까지는 복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모세는 40세에 사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했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이없이 자신의 인간적인 방식으로 먼저 나섰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모세는 80세가 되어서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장 혈기 왕성하던 상황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왕성한 의욕을 가졌던 40세의 모세나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은 분명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명감에 충만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시작한 목회 사역은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복음 전파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여서는 안된다.

불행하게도 수 많은 교회의 현장에서는 목회자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고하면서도 자신의 욕심에 이끌리는 목회를 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의 잘못된 행위는 세상 끝날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들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복된 성도일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좋은 소식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따로 부르셔서 전하고자하는 복음은 창조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근원적인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다.

인간 세상의 어느 족속이나 예외없이 어두움 가운데 묶여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인간이 잘못된 불행에 묶여있는 것에서 자유케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이들을 위한 복음이 아니기에 현세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일한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죄인을 사심으로 죄인을 악에서 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만 그리스도의 백성이기에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나라이지만 구속의 나라는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의 죄값을 치르시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택한 자들만의 죄값을 치르셨고 오직 택함받은 자들만이 믿음을 고백하게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의 죄값을 치르셨다면 바울의 복음 전파의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믿음을 요구하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고 선포하는 복음으로 바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신정통주의자, 새관점주의자, 선교적 교회 운동가 등등….)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소식을 모든 이들이 인식하도록하는 것을 복음 전파의 내용으로 말하고있다.

이는 마치 1945년에 대한민국이 일제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과 같이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에게만 해방이 적용되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는 사실을 전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톰 라이트와 같이, 이 땅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다고 말하는 이들은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려고한다.

이들은 보편구원을 추구하며 개인의 회개나 신앙고백을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소식을 전하고 이에 동참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택한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복음이다.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로서의 사역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분리시켜서 거룩하게하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결정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예정이 앞선다.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이 지음을 받기 이전에 정하신 것이다.

인간의 결정은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인간의 모든 행함의 동기에는 하나님의 예정이 앞서기에 인간이 자신의 공로를 주장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논리를 앞세울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셔서 따로 세우신 바울뿐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따로 세우신 자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상적인 것으로부터의 분리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세상과의 분리라는 과정이 반드시 수반되어야한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신자로서의 삶의 근거로 삼아야한다.

신자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다.

신자는 처음 아담에 속하여있지 않고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아 거듭난 이들이다.

신자의 세상에서의 삶은 세상과의 끊임없는 투쟁의 과정이 수반되어야한다.

신자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택정함을 입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육신의 소욕과 싸워나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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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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