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5절 묵상
김원호(dent4834@hanmail.net)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은혜를 받은 바울
바울은 자신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은 자신의 이력을 생각할 때마다 은혜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바울이 사울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을 때 자신은 분명 하나님께 올바른 일을 하고있다고 생각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까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가 없다.
바울이 입은 은혜는 바울만의 자랑이 아니다.
바울은 철저한 유대인이었으며, 이스라엘은 아담을 내포하고있으며,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기에, 바울의 고백은 모든 신자들의 고백이 되어야한다.
바울 자신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가운데 믿는 자들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기까지 불순종하였던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에서의 좌절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좌절과 한 가지였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듯이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모든 신자는 낙담과 좌절 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나고 은혜를 경험하게된다.
인생은 언제까지나 순탄하기만 할 수 없다.
순탄하기만한 인생은 독이 될 수 있다.
세상의 많은 불행들은 종종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통로가 되고있다.
세상은 이미 죄악 가운데 있기에 세상에서의 부귀 영화는 불행을 자초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세상은 모두 성공과 자아성취에 관심을 가지지만 그리스도인은 정작 그리스도의 은혜에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사도의 직분을 받은 바울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을 전하여야만 하는 직분을 받았음을 설명하고있다.
직분이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았지만 은혜를 받지 않고는 사역에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바울이 받은 은혜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였으며, 바울이 받은 사도의 직분은 하나님의 특별 은혜가 함께하는 직분이었다.
바울이 받은 사도의 직분은 일반 은총의 영역이 아니라 특별 은총의 영역이다.
특별 은총은 하나님의 구속의 나라의 확장을 위한 것이다.
일반 은총의 영역은 자연법을 근거로하지만 특별 은총의 영역은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특별 은총은 일종의 수동성을 가지고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르심의 자리에 서야했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성령께서 주체가 되시기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동 방식은 자칫 인간의 일이 될 수가 있다.
바울의 사도직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복음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는 오직 값없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의 본능적이고 능동적인 생각과 행동은 자칫 복음의 이름으로 성령을 거역하는 일을 할 수도있다.
인간은 원래 본능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때 가장 편하고 자연스럽다.
복음을 말하고 생각하고 전하는 일이 인간적인 동기에서 출발된다면, 엄청난 에너지가 요구되고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가 따르게되며 여러가지 부작용을 낳게 되기도한다.
성령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은혜로말미암지는 부르심을 받지 않고는 복음의 영역에 접근해서는 안된다.
바울은 과거의 자신의인간적인이고 능동적인 열심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음을 은혜를 경험하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모세는 40세에 나름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인간적인 열심을 내었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모세는 자신의 의지적 노력이 완전히 상실된 80세가 되어서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자신의 공로와 능력은 복음을 전하는 근거나 동력이 될 수가 없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아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의 문제들은 대부분 교회가 인간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있기 때문에 생기게된다.
참된 목회는 바울과 같이 은혜 가운데 수동적으로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 직분을 받은 자만 하여야하지만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다.
홍수에 마실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이 교회는 차고 넘쳐나지만 정작 은혜를 경험하는 교회를 찾기가 쉽지가 않다.
인간의 능동적인 행동 방식은 자칫 특별 은총의 영역에 속하여있어야 할 교회를 일반 은총에 속한 기관으로 변질시켜버린다.
사람들의 욕심은 신학교를 제도적 교육기관의 한 가지로 추락시켜버렸다.
누구나 자신이 원한다면 부르심에 관계없이 신학 교육을 이수하고 목회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성령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신학교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제도적 기관이지만 제도적 기관이라고 무조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기관인 것은 아니다.
바울과 같이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고백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있어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
5절의 문장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었다.
나름 대로 5절을 좀 더 쉽게 다시 번역해서 이해해 보고자한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으니, 이로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위해서,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믿음으로부터 오는 순종에 이르는 자들이 생기도록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의 순종을 위해서 자신이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요구되었던 율법에 대한 순종과는 다른 믿음의 순종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이다.
믿음으로부터 말미암는 순종에 대한 번역들이 번역서마다 조금씩 달리 표현되어있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믿음의 순종the obedience of faith:ESV
•믿음으로부터 오는 순종the obedience that comes from faith: NIV)
•믿고 순종하도록; 현대인의 성경
•믿고 순종하게; 새번역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이미 믿음의 순종을 전하고자하는 결론을 말하고있다.
바울이 말하고자하는 내용은, 구원이 유대인에게 한정되어 율법의 행위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도 행위가 아닌 믿음의 순종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복음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 즉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얻을 수 있는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토록 어려웠던 구원에 이르는 길이 믿음이라는 너무나도 쉬운 방법으로 대체되어 제시된 것이다.
율법을 힘들게 지키며 애쓰는 이들에게는 황당한 말로 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껏 구원은 율법을 맡은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방인들에게도 문이 열렸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며, 더군다나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바울의 주장은 과히 혁명적인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복음은 놀라운 것이지만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구원 자체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믿고 의지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돈과 과학기술이며, 발달된 정보 통신은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서 하나님을 외면하게 만드는 거짓 것들이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결코 에덴의 발전이 아니라 인류를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가는 유혹일 뿐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데후 2:11-12)"
이방인에게도 요구되는 순종
"모든 이방인 중에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이를 좀 더 쉽게 해석해보면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의 이름을 위힌 믿음의 순종…"
이를 나름대로 의역을 해보면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이제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자 믿음으로 말미암는 순종이…."
이를 풀어서 묵상해 보면 궁극적으로 아담 안에서 불순종하였던 모든 성도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을 성취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야한다는 것이다.
순종에 관하여는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순종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로 귀결된다.
이방인인 로마에 있는 성도는 믿음의 순종, 즉 그리스도의 순종을 소유한 이들이다.
이방 성도에게 순종이 요구되었던 순종은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공로적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는 믿음의 순종이었다.
믿음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위한 믿음의 순종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은 그리스도를 왕으로삼는 하나님 나라 백성임을 말해준다.
순종의 의미에는 종속 관계가 내포되어있다.
종속 관계는 궁극적으로 왕국의 성립에 있으며, 순종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었던 것은 불순종으로 인하여 왕에 대한 종속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순종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순종이며 이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 요소인 왕과 백성을 연결시켜주는 접착제와도 같은 것이다.
이방 그리스도인에게도 순종이 요구됨으로서 모든 나라에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됨으로 인해서 모든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선포하고있다.
이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해서 성취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을 통하여 처음 아담에게 주어졌던 창세기 1장 28절의 통치 명령를 성취하셨으며, 이는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소위 문화명령이라 부르는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주어졌던 하나님의 통치 명령이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처음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통치명령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됨으로서 믿음의 순종을 고백하는 성도들에게 또 다시 요구되지 않는다.
아담에게 주어졌던 통치 명령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을 위한 조건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를 성취하심으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은 이미 믿음을 고백하는 성도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을 약속한 것이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종말을 살아가지만 아직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극치consumation의 시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믿음의 순종에 의지한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의인으로 인정받았기 아담에게 요구되었던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은 이미 하나님 앞에서 성취된 것으로 인정된 것이다.
성도는 비록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의인으로 인정되어도 사는 동안에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하듯이,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여야한다.
통치 명령은 이미 성취는 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통치 명령의 성취와 완성 사이에는 대위임령만 있을 뿐이다.
통치 명령의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실행하여야할 과제가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명령을 위한 문화변혁이라고 주장하지만 바울은 로마에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위임령을 실행하는 차원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고있는 것이다.
믿음의 순종으로 말미암는 의와 의의 전가
순종은 의를 얻기 위한 요구 조건이다.
순종이라는 용어 자체가 내포하는 행위의 요구로 인해서 인간은 자기 공로적인 행위를 통하여 의를 얻으려고한다.
하지만 믿음의 순종은 인간의 공로가 배제된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순종을 받아들이는 행위로서 일종의 전가 개념이다.
믿음의 순종으로부터 말미암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는 의의 전가를 근거로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순종의 행위는 공로와는 무관하다.
바울이 받은 소명은, 모든 이방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믿음의 순종에 참여하여 예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도록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쓴 편지는 이러한 소망을 로마의 그리스도인과 공유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소명이 무엇인지 밝힘으로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이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있다.
바울은 자신이 은혜로 받은 소명이 로마에 있는 신자들이 받은 소명과 동일함을 설명하고있다.
바울의 바램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이방 나라 가운데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어 신자들이 믿음의 순종에 이르도록 하는데 동참하길 원하는 것이었다.
비록 신자는 사도가 아니지만, 신자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부터 말미암은 은혜와 직분을 이어나아가야한다.
소명이 자신의 능력에 근거한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인간은 교만해질 수 밖에 없다.
바울은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공로를 위한 소명은, 자신의 능력이 하나님께 인정받아야만 하기에, 필연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게 할 수 밖에 없다.
능력에 근거를 둔 이들은 공로적 개념을 가지게되며, 믿음의 순종이 아니라 공로적 순종을 강요한다.
이들은 믿음보다는 자신의 행위가 동력이 되어,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한다.
성도는 이미 전적으로 부패하여 자신에게 근거를 둘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오직 믿음에 의지한 순종, 즉 믿음의 순종에 의지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을 감당하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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