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7. 12. 29. 15:59

에베소서 4장 1-16절 말씀 묵상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바울의 갇힘은 희생이 따르는 신앙 생활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하면서, 신앙 생활이 자신의 생활에 손상이 되거나 제약이 될 때, 손해보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세상과 타협하거나 분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울의 갇힘은 신앙으로 인한 삶의 영역에서의 희생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교회를 위한 신앙생활이 삶의 영역에 깊이 들어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교회 생활과 일상 생활의 이원화를 추구하는 신자들에게 성도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 네 가지 삶의 모습은 구약 이스라엘에서는 볼 수도 없었고, 생각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바울의 투옥으로 이어지는 행동 방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기에는 저주의 결과이며,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구약 이스라엘에서 희생은 죄의 결과이며, 투옥은 죄값을 치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희생적 삶의 모습을,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성도가 갖추어야 할 마땅한 성품과 연계시키고 있다.


(겸손)

이스라엘 공동체의 패망은 교만과 관련되어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만을 질책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취한 때문이다.

신약의 성도가 받은 지위와 능력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성도의  겸손은 교회 공동체가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온유)

온유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성품이다.

온유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부름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의 열매이다.

부드러움으로는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한다.

하지만 온유한 자는 세상에서의 희생을 감수하여야한다.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과 같이, 세상의 핍박에 대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한다.

온유한 자는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며, 시기하거나 다투지 않으며, 희생을 각오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오래 참음)

오래 참음은 마치 고무줄을 당기는 것과 같이 언젠가는 움직일 것을 기다리면서,  움직임을 늦추는 것이 아니다.

오래 참음을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인내가 아니다.

오래 참음은 순간 순간 좌절과 포기와 낙담과 절망이 쌓여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단순히 움직일 시간을 늦추거나, 참지 말아야 할 시간을 늦추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내적 능력의 표현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성도는 순간 순간 분노와 시기와 다툼의 생각을 죽임으로서, 온유한 모습을 드러내는 가운데 인간적인 행동 방식을 접어야한다.

움직임을 결정하고 행동하여야 하는 순간은,  오직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진행되어야 한다.


(용납)

용납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상황을 수용하는 것이다.

용납은 오래참음의 결과이다.

여기에는 분별력이 요구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용납하는 것에 대하여 질책한다. (고후 11:4)

부정적 상황은 긍정적 상황을 위한 과정으로 용납될 수도 있겠지만, 불의를 좋아하는 자를 심판 위하여 허용된 것도 있기에 조심해서 용납하여야 한다.

자신의 욕심에 끌려서 미혹되는 것과 사랑 가운데 용납하는 것은 구분되어야한다.

서점에 나와있는 신앙 서적과 신학 서적 가운데는 진리의 영이 아닌 미혹의 영으로 쓰여진 책들이 많이 있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용납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의 마음 가운데 역사하는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하나됨 가운데 속하여 있는지 분별하여야 할 것이다.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도는 교회 공동체의 하나됨을 위해서 평안의 연결로 성령의 하나됨을 유지하도록 열심을 내야한다.

하나됨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이다.

하나됨은 공동체의 기본 요건이다.

아담은 지음을 받았을 때 삼위 하나님의 하나된 공동체적 형상을 부여받았다.

에덴에서의 순종은 궁극적으로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됨의 완성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됨의 파괴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파괴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간이나 다윗의 범죄와 같이, 한 개인의 불순종이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한 개인의 불순종이 공동체의 하나됨에 미치는 파급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신약의 교회는 상실되었던 공동체의 회복이면서, 하나로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도는 삼위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자격이 주어진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하나되게하는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고, 성도는 성령 안에서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납 그리고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된 교회 공동체를 가꾸는데 참여하여야한다.

교회에서의 교만과 다툼과 분열은, 성령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일이라는데  심각성이 있다.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는 만유내재신론과 결부되어서는 않된다.

만유내재신론Panentheism은 하나님께서 만물 안에 계실 뿐만이 아니라 만물이 신이라는 개념까지 나아간다.

하나됨은 삼위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과 같이, 궁극적으로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성도도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몰몬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성도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선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일반 은혜와 택한 자에게 주시는 특별 은혜도 모두 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땅에 교회를 세워나아가는 것이다.

성도가 사도로, 선지자로, 복음전하는자로, 목사로, 교사로 부름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주신 선물의 분량대로 맡겨진 직책들이다.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인간들은 모두 다 사단에게 사로잡혔던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자신의 종으로 사로잡으시고서, 이들에게 선물을 주신다.

원래 아담이 에덴에서 받은 직분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이었다.

이러한 직분은 성전으로서의 에덴을 관리하기 위한 직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사단에게 빼앗겨 왜곡되고 변질되었던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회복하시고서, 자신과 연합된 성도들에게 이러한 직분을 위임시키신 것이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은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타락한 세상 가운데 세워지는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직분은 좀 더 다양해야 했기에, 사도로서, 선지자로서, 복음전하는자로서, 목사로서, 교사로서의 다양성이 필요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로 연합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성령의 강림하심과 더불어,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의 교회의 사역이 맡겨졌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이러한 다양한 선물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공동체적 사역들이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땅 아래 낮은 곳에 지옥, 즉 하데스를 의미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지옥을 뜻한다면 이를 뒷받침할만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의 설명을 찾아야만 한다.

땅 아래 낮은 곳보다는  “낮은 곳인 땅으로”라는 표현이 문맥에 더 적합하다고 본다.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사도와 선지자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필요한 사역자들이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도 사도와 선지자를 자칭하는 것은 완성된 성경에 더하려는 행위이다.

사도행전 29장이나, 목사에게 사도라는 명칭을 적용하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다양한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은사주의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허물 수가 있기에 경계해야 한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성도들에게 많은 신학적 지식이 요구된다.

아직도 교회에서 성경이나 신학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분위기다.

한국 교회에 이단들이 쉽게 침투할 수 있는 것은, 교회에서의 충성 봉사에는 열심이지만 정작 성경을 체계적으로 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소홀하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는 성도가 성경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면 부담스러워한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교회는 목회자의 전유물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단과 거짓의 유혹에도 흔들림없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한다.

유독 한국 교회에 이단이 많은 것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을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 아는 일에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진리는 논쟁을 유발할 소지가 많고, 자칫 성도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해서 서로의 생각이 다를 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분열을 유발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이를 사랑 안에서 극복해 나아가야한다.

하지만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왜곡된 진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상하게 할 수 있기에, 진리는 반드시 바로 세워져야하며, 이는 자칫 분열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하나의 진리 안에서 다양한 교단이 있는 것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리스도의 터에 뿌리를 내리고 견고하게 세워져가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다.

이를 극복하는 수단은 사랑이지만, 인간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사랑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랑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능력이 없는 사랑이다.

교회의 분열과 교단의 분열과 성도 간의 분열은 희생이 없는 공허한 사랑을 외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통하여,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희생적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기에, 성도는 자기 희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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