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7. 12. 29. 16:43

에베소서 6장 10-24절 말씀 묵상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재정비된 삶의 모습과 더불어 이제는 전투 태세에 들어간 군인과 같이 어떻게 전투를 해야하는지, 전투 요령을 가르쳐주고있다.

이는 비록 그리스도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파괴된 관계성을 다시 회복시켜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로서의 관계성을 정립하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타락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과의 관계성의 회복을 하였어도, 세상과는 회복될 수 없는 관계임을 인식하고서, 세상과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보다는 세상 권세자와 싸울 것을 명하고있다.

이는 자칫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선하다는 이분법적 논리로 전개될 수도 있겠지만, 바울은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성도가 싸워야할 대상은 비록 공중권세 잡은 사단의 세력이지만, 인간은 육신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내적인  갈등으로 인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병행하여야 한다.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치 닭에 품겨진 달걀과 같이 성도는 주 안에서, 주의 강한 힘으로 강성하여질 수 있다.

이를 위해 성도는 교회 생활과 말씀,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더욱 성숙되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지치고 낙심한 성도의 안식처가 되어야하며, 영적인 공급처가 되어야한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성도는 주 안에서 그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기가 쉽지가 않다.

성도가 주 안에서 강해져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상과의 싸움에서 생존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취약점은, 교회가 이미 세상과 타협하면서, 세상을 닮아 가고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자연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교회가 세상보다도 더 타락하였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모습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게 현실이다.

교회의 타락은, 마치 전쟁터에서 전투하는 군인들을 지원해주어야할 후방 기지들이 이미 적군에게 공략당하여 파괴되어있는 상황과 유사할 것이다.

이는 사단의 세력이 교회 바깥보다도 오히려 교회 안에서 교인들 가운데 더 역사함으로서, 교회가 영적 전쟁에서 철저하게 공략 당하고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마귀와의 싸움에서 인간은 아무 무장도 할 수가 없다.

인간은 이미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사단으로부터 무장 해제를 당한 상태이다.

자체 무장이 안되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한다.

인간은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으로 사단과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가 없는 싸움은 혼자만의 싸움이기에 여지없이 폐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경험이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수가 없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도말고는 없다.

사람이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유명 대학의 학위를 받고나면, 더욱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서, 오히려 자신을 과신함으로 마귀에게 이용당하기 십상이다.

명성교회의 사건은, 인간이 높은 자리에 오르고 물질이 눈이 어두워지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들은 자신의 육적인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는 사단의 좀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어둠 자체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팔아먹은 가룟 유다와 같이, 하나님을 팔아먹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사단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대신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지위와 욕심을 입었기 때문이다,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씨름)

씨름이라는 용어와 싸움이라는 용어에는 차이가 있다.

싸움은 상대방이 자신의 외부에 있는 반면에, 씨름은 자신의 내부에, 혹은 자신에게 밀착되어있는 경우다.

씨름은 어찌보면 자신의 내면에서의 갈등이나, 같은 공동체의 일원과의 갈등일 수가 있다.

싸워야할 대상이 외부의 적이라면, 자신은 선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내부의 적과의 싸움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은 죄성의 이중 구조를 인정하고서 자신과 씨름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씨름은 주로 욕심과 관계된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은 욕심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본능이지만, 이는 사단이 휘두르는 손잡이가 되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영적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욕심과 교만의 문제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한다.

가룟 유다도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단에게 패배하였듯이, 명성교회 세습 사건도 자신의 욕심과의 씨름에서 패배한 것으로서, 자신의 욕심을 사단에게 종속시켜버린 것이다.

명성 교회 사건은, 이들이 혈과 육이라는 욕심에서는 승리하였을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에게는 패배한 것이다.


(직접 싸워야 할 당사자로서의 성도)

통치자들, 권세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은 사단의 다양한 특성들을 나타낸다.

이 네 가지는 서로 구분하기보다는 한 존재의 다양한 면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혼자 존재 할 수 없으며, 어떠한 형태로든 공동체에 속하여 있으며, 공동체를 주관하는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되어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안식을 누리지만, 아직 육적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이 세상 주관자들의 영향에서 자유 할 수가 없다.

사단도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사단에게서 완전히 보호해주시기보다는, 성도가 하나님의 도움하에 직접 사단을 대적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도는 전적인 보호가 필요한 어린 아이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장성한 어른과 같이 책임감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역경을 파헤쳐나가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할 때 막으실 수도 있으셨지만,  인격체로서의 아담의 결정을 존중해주셨듯이, 성도의 행동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고 보호해 주실 수도 있으시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성도의 인격 안에서, 성도의 능동적 대처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해 보아야한다.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악의 날은 인간이 사는 모든 날이 악한 날일 수도 있겠지만, 최후의 심판이  가까워질수록 사단은 더욱 발악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현시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통과 권위와 권력이라는 무장을 해제시킨 후에, 그 자리에 사단의 방식을 주입시키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전자 통신의 발달은  무차별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려하기에, 인간의 내면의 악이 최대로 활성화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패망 직전에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을 배제하는 모습들이, 지금 이시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다고 말할 수 없다.

현 시대의 가장 큰 위협은 북한의 핵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의 부패된 모습일 것이다.

이렇게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는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만 할 것이다.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모든 기도와 간구)

성도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모든 종류의 기도와 간구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악한 날에 성도는 기도와 간구없이 상황들을 해체 나아갈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상황의 악함이 근본적으로 자신들에게 원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이겨나가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있다.

상황을 해쳐나가기 위해서, 세상은 지식과 돈, 그리고 권력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성도에게는 다른 방법이 요구된다.

세상은 자신들이 힘이있고 부하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부하고 힘있는 이들은 성도들이다.

성도는 현재의 삶 가운데서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는 갖가지 방법과 다 갖추어져있는 셈이다.

성도에게는 미래가 약속되어 있으며, 현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 가운데, 성령 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바울이 권면하는 성도의 싸움의 모습 가운데에는 삼위 하나님의 총체적 임재를 경험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제공되고 있다.

성도는 창조주이신 삼위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과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이 악한 시대에 가장 큰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다.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쇠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대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고통은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칭 사도라고 하는 목회자들의 경우 대부분은 교회를 기업으로 운영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있다.

사도들의 특징은 대부분 말씀을 전하는 일을 고난 가운데 수행하고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은 인간의 죄성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기에,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역경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도, 교만하지 않기 위한 도구로 받아들인다.

만약에 바울이 이 시대에 생활을 하였더라면, 초대 교회시대보다도 이 시대가 더욱 힘든 시대임을 토로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유명한 목회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부귀영화로 몰락하는 것을 보면, 바울도 예외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일 것이다.

이 시대는 영적 전쟁에서 결코 만만한 시대라고 할 수 없다.


21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22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23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바울은 갇힌 자로서, 갇혀있지 않은 자를 위로하고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진정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외적인 곤란에 처하여 있는 사람보다는 내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어려워도 내면의 풍성함은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준다.

힘든 이 시대를 풍요롭게 사는 방법은 물질이나 명예나 외적인 풍요를 추구함에 있지 않고, 오직 말씀을 소유한 자로서 삼위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이다.


(나가는 말- 새관점)

이 시대에 싸워야할 대적 가운데 한 가지는 변질된 신학이다.

허리에 띠어야 할 진리에 대한 해석이 왜곡되면 더 이상 싸움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단들도 문제이지만, 신학적 왜곡은 성도를 무장해제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신학의 영역에서는 좀처럼 영적 전쟁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지 않는다.

개혁주의 신학은 올바른 신앙의 형태를 잡아주는 뼈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생물도 뼈대가 틀어지면 원래의 특성을 가질 수가 없다.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는데 가장 취약한 부분은 개혁주의 신학의 붕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마다 심각한 신학의 왜곡 현상이 나타난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은 둘째치고, 알미니안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등을 거쳐 최근에는 새관점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여있다.

새관점은 이머징미셔널처치(선교적 교회)와 알버트 월터스의 “기독교 세계관”과 연합하면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미명하에 기독교를 역사적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체시키는 작업을 하고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있어야하지만,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자체를 거부한다.

새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왜곡시키는 것은 물론 심지어 속죄 사역과 전가 교리를 부정함으로서 칭의 개념까지 바꾸어 버렸다.

새관점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역할을 단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것으로 변질 축소시켰으며, 신약의 교회를 역사적 이스라엘의 확장 개념으로 바꿔 버렸다.

바울이 말하는 마귀의 궤계 가운데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명한 목회자나 신학자들은 마치 자신의 폭넓음과 유행에 뒤지지 않는다는 신세대적 사고릉 과시하려는 의도인지,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단편적으로 자신의 학문과 목회에 적용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다.

마치 개혁주의를 새관점으로 치장하는 것과 같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지식을 의지하면서 범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나가는 말- 축귀 사역)

가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마귀야 물러가라!”하고 외치거나, 축귀 사역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귀신이 들린 경우가 아니고는 자신의 내면의 욕심으로 시험에 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경우에 축귀 사역으로 대응하게되면, 자신은 의로운데 자신은 단지 외부의 마귀에 의한 희생자일 뿐이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이 된다.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성도는 이전의 옛 사람을 벗어버려야하는데, 옛 사람과 마귀를 혼동하면 안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 아담의 후손으로서 본질적 죄인이며,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에 참여될 수 없는 이들이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작업은 축귀 사역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사도 운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 오히려 마귀에게 뒤집어 씌움을 당하는 이들을 보게된다.

영적인 접근법은 종종 이원론적 사고를 가져오기에 매우 조심하여야하고, 분별력을 요구하게된다.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실제로운 자신의 생활의 문제점으로 정신질환을 앓고있는데, 이를 축귀 사역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무식함의 극치를 달리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상식을 무시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들 가운데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편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