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1. 9. 16. 21:48

요한복음 1장 4절 말씀 묵상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으며,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설명하고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설명하신다(요 11:25)

여기서 소개하는 생명은 살아있는 육신과는 다른 영으로서의 생명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관점에서 본다면 살아서 움직이는 육신은 생명이 없는 주검일 뿐이다.

생명은 죽음에 대한 반대 개념이다.

마치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태초에 생명이 없었던 흑암 가운데 땅에서 취하여진 인간은 생명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심으로서 사람이 생령이 되도록하셨다.

흙으로 지어진 처음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이 불어넣어짐으로 생령, 즉 생명이 있는 영으로 창조된 것이다.

흙은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처음 아담은 불순종함으로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되었다.

모든 인류는 처음 아담의 후손으로 처음 아담 안에서 불순종하였기에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흙으로 돌아간 사람에게 다시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다시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도록하신다.

처음 아담 때와 달리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생명은 구원과 영생을 위한 것이다.

처음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처음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생명은 구원과 영생이 보장되지 않았다.

처음 아담에게는 순종의 조건이 주어졌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완전한 순종으로 이루신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인간에게 다시 처음 창조에서의 생기와는 차원이 다른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작업을 하시게된 것이다.

처음 아담은 불순종할 수도 있는 선택권이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부여받아 거듭난 신자는 다시 불순종 할 수가 없다.

신자의 생명은 신자의 순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믿음 또한 자신에게서 출발한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택하심에 의한 선물이기에 신자는 구원하시는 생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종종 보이는 배교행위는 원래부터 모양만 신자였던 불신자가 자신의 불신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기에 새생명을 얻은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 것이다.

 

실상은 죽은 인간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육적인 생명과 죽음은 매한가지일 뿐이다.

영적인 생명이 없는 인간은 실상 죽은 자들이다.

좀비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죽은 이들이다.

불순종한 인간은 좀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아담은 그 코에 불어 넣어진 하나님의 생기로 말미암아 생령, 즉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였지만 불순종함으로서 영적으로 죽은 존재가 된 것이다.

바빙크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날 정녕 죽으리라한 약속이 은혜 가운데 실행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담이 범죄하고서도 은혜 가운데 수백년을 살아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한날 죽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후의 삶은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육신만 살아있는 삶이었다.

생명과 죽음은 빛과 어둠으로 대비된다.

생명되신 예수님께서 빛으로 어둠 가운데 오신 것은 죽은 자들, 즉 처음 아담의 후손들 가운데 오신 것이다.

처음 아담의 후손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육으로 난 자들이다.

요한복음 3장 6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신다”고 전하고있다.

모든 인간은 육으로 난 자들이지 영으로 난 자들이 아니다.

영으로 난 자들만이살아있는 자들이다.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둘째 아담 안에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들에게 생명이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에 이를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자신이 죽은 자임을 인식하는 것은 생명을 얻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패망 후에 이 땅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망하고나서야 스스로 죽은 자임을 깨달을 수 있는 상황이 준비되었기에 오신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게서 솔로몬이나 다윗 시대에 오셨다면 그리스도께 나오는 자들은 인간 승리를 외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인간 승리라는 것은 없다.

인간적으로 승리한 자들, 성공한 자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힘들 것이다.

여기서 부자는 물질을 풍요를 누리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잘났다고 외치는 교만한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공 뒤에 오는 좌절과 패배,절망의으로 인하여 마음의 문이 열렸을 때 가까이 다가오신다.

자신이 살아있다고 자신을 믿어온 교만한 인간은 자신의 교만에서 꺽여서 깊은 좌절감으로 낙망하여있을 때에야 비로서 자신이 죽은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살 희망이 사라지고 내세울 명예와 권위가 없어졌을 때 비로서 자신의 실상에 대하여 깨닫게 된다.

자신이 죽은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는게 되는 깊은 좌절의 시간, 낙망의 시간, 우울의 시간이 바로 주님께서 참 생명을 주시고자 손을 벌리시고 기다리시는 시간이다.

육신의 생각은 생명에 대하여 저항한다.

믿고 의지했던 육신이 죽음을 앞에 둘 때 육신의 교만에 의지하던 인생은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깊은 좌절에 빠지게된다.

주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참 생명은 육신의 죽음을 전제로하는 생명이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생명을 주시고자 말씀 가운데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오신다.

 

사람들의 빛

여기서 사람은 영적으로는 죽어있고 육신만 살아있는 사람이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본래부터 빛 가운데 있었던 자들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

오직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이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빛으로 다가오셨다.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다가오신 것은 인간이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어둠의 세계는 빛을 경험하지 못하기에 빛에 대하여 알 수가 없다.

빛을 경험하는 순간 더 이상 어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고자 사람들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셔서 빛을 비추신다.

이 빛은 사람들로하여금 구원을 얻게해주는 계시의 말씀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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