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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3 :: 요한복음 1장 2절 말씀 묵상
- 2021.09.12 ::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 묵상
요한복음 1장 3절 말씀 묵상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점진적 인식
요한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서 점진적으로 구체화시키는 방식을 취하고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이신 말씀에 대하여, 2절에서는 하나님과 함께 하심에 대하여, 그리고 이제 3절에서는 만물에 대하여 언급한다.
1,2,3절의 중심은 하나님이신 말씀이다.
창세기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 되었듯이,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선포하고있다.
만물은 이어서 서술되는 생명과 빛을 포괄하는 총체적 개념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이는 자신이 만든 만물 가운데 피조물의 형태로 다가오신다.
말씀이신 창조주는 창조물인 빛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이러한 점진적 접근법은 사물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선포되어지는 방법이기에, 이는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모르겠다고 핑계댈 수 없도록 만든다.
만물의 정체성
만물의 정체성은 만물을 만드신 이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된다.
만물은 정적이면서 동적인 역동성을 가지고있다.
만물의 질서있고 체계적인 움직임은 어느 하나도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위치나 방향성을 갖는 것이 없다.
본래 말씀으로 지어진 만물은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으실 정도로 완전하였지만, 만물은 그 중심에 있는 인간의 죄로 인하여 혼돈과 파괴가 시작되었다.
원래 지어진 만물은 아름답지 않거나 혼란스러운 것은 없었다.
원래의 만물에는 지으신 이의 품격이 담겨있었다.
만물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품격은 타락한 인간에게 생명력과 빛으로 다가온다.
피조된 인간은 지어진 만물의 정점에 있다.
만물의 정점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이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빛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인간은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려 하기보다는, 빛으로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말씀 가운데 만남으로써 좀 더 근원적인 접근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만물의 역동성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만물의 창조주는 인정하면서도 그 분의 간섭하심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창조주는 인정하면서도 만물의 움직임은, 마치 감겨진 태엽에 의해서 시계가 움직이듯이, 만물은 더 이상 창조주의 간섭하심이 없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한이 전하는 복음에서는 창조주께서 만물 가운데 다가오셔서 직접적으로 간섭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있다.
말씀은 만물 가운데서 살아움직이는 하나님의 역동성을 나타내 보여주고있다.
말씀은 역동성을 전제로한다.
역동성이 없는 말씀은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인간이 말씀에 대하여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하여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죽은 존재이다.
하지만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은 말씀에 대하여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신자가 말씀에 대하여 반응을 할 수 있는 것은, 신자 스스로 살아있거나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께서 반응을 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듯이, 말씀은 지금도 역사하셔서 신자를 거듭나게 만든다.
역사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의 목적없는 움직임과 같아 보이지만,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움직임 가운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요한이 소개하는 만물을 지으신 분은 이 땅에 빛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 땅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하심이지만, 그 분의 성육신은 이스라엘이라는 역사 한 가운데 오신것이며,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한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움직였던 역사였다.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역동성이 있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환경에서도 그리스도의 간섭하심이 없는 곳은 없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로 설명될 수 있듯이 인류는 어둠 가운데있다.
그렇다고 어둠이 빛을 탓할 수는 없다.
어둠은 아담 안에서 인류가 선택한 것이며, 인류의 역사는 어둠 가운데 전쟁과 시기와 질투와 온갖 더러운 일로 가득하지만,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한줄기 은혜로 인하여 이제까지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이다.
말씀에 반응하는 신자는 빛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말씀 가운데 역사하셔서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다.
인간의 정체성
만물의 존재의 근원을 창조주에게서 찾을 수 있듯이, 인간의 존재의 근원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리스도께 주권이 있다.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주권이 없다.
불순종한 인간은 사단에게 내어준바되었지만, 그 근원적인 소유권은 그리스도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그 뿌리를 알아야한다.
왜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해하는 일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한다.
만물이 완벽한 모습 가운데에서도 왜 부정적인 상황들이 생겨나는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만물 가운데 살아가지만 왜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인간은 왜 그리스도께서 지으신 만물을 파괴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의 방식은 그리스도의 창조 방식에 반대이며, 인간의 부정적인 사고와 행동방식은 만물을 창조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지만 이제 인간은 그 만물을 파괴하면서 피조된 인간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지구도 파괴할 수 있는 무기들을 만들어가고있다.
빛이 사라진 완전한 어둠은 파멸로 결론이 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지으셨을 뿐만이 아니라 지으신 만물의 완전한 파멸을 막으시기 위해서 어둠을 쫓아내시고자 빛으로 다가오신다.
만물은 지어진 목적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자를 다 구원하실 때 지어진 만물은 그 소명을 다할 것이다.
세상 만물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정립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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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2절 말씀 묵상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
1절에서는 1) 말씀이 태초에 계셨다 2)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말씀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세가지 사실을 전하고있다.
2절은 3절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특정한 사실을 좀 더 강조한다.
그(말씀이신 하나님)가 (다른 위격의)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강조한다.
2절에서의 함께 계심은 1절에서의 존재론적인 함께계심보다는 3절의 창조행위에서의 행하심의 행위론적인 함께 계심을 의미한다고 보여진다.
또한 2절에서의 함께 계심은 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심을 강조하기 위해 필요한 중간 서술이다.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시며 그가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창세기 1장 1절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신약에 와서야 구체적으로 서술된 것이다.
창세기의 기록은 창세기를 기록한 당시 시대의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서술된 것이다.
만약에 창세기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기록을 하였다면 아마 대혼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요한의 기록은 이제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 독자들이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말씀은 신약의 기록에 의해서 비로소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된 것이다.
이는 구약만으로는 완성된 말씀이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약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는 미완성의 종교일 뿐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사역과 더불어 신자와 성경 말씀으로 함께하신다.
요한복음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신자에게 전하기 위하여 기록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신자가 말씀이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요한복음1장 1-3절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준비되어진 독자들을 위해서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 기록에 숨겨졌던 사실을 선포하고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은 말씀의 존재론적 위격을 나타내기도하지만, 창조라는 행위에 있어서 말씀이신 하나님은 제 3자가 아님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3절에서는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바로 창조주이심을 선포함으로서, 경륜적 삼위일체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성육신 이전에 이미 태초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있다.
함께함과 권위
일을 행함에 있어서 누구와 함께하느냐는 그 함께하는 존재의 권위와 동일한 권위가 부여되기에 중요한 것이다.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만 일을 하였어도 일을 하는 현장에 다른 사람이 같이 있었다면 공동의 책임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은 말씀의 권위가 하나님과 동일하심을 선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창조 사역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셨음을 전하고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 사역 기간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은 창조 사역뿐만이 아니라 구속사역에 있어서도 동일한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효력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에 근거한다.
인간의 불순종과 범죄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신자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함께 계심은 신자에게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근거가된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은 신자에게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 아닌 안식을 주시는 기쁨과 위로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동체적 사역과 인간의 공동체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적 사역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의 공동체성이 마땅히 어떠해야하는지 그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존재이기에 왜곡된 공동체적 특성들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공동체는 이익을 위해서 존재한다.
유럽의 2천년 전쟁사를 보든, 어느 나라든 모든 인류의 전쟁사는 자신들의 공동체의 이익를 위한 것들이다.
타락한 인간의 행위의 동기는 자신의 이익이다.
공동체의 이익의 밑바닥에도 인간 개인의 이익이라는 계산이 깔려있다.
인간은 이익을 위해서는 함께하지만 이익이 되지 않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생명을 짓밟기도한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하심에는 이익이 아닌 사랑이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함께 계심의 근거는 사랑이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지은바 되었지만, 독사의 자식들이 된 인간의 삶의 원동력은 이익과 미움이다.
복음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심을 통하여 이익이 아닌 사랑에 근거한 구속사역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고있다.
자신의 이익을 쫓아가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오직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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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장 1절 말씀 묵상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이미 영원 가운데 계신 예수님
만물의 시작 이전에 이미 계신 분이신 예수님은 영원 가운데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 분이시며, 시간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시공간에 갇혀있지만 말씀으로 계신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초월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육신적인 한계에서 출발되어서는 안되며, 육신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어지는 분이 아니시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주어진 말씀이 근거가 되어야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말씀을 육신적인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가두어 놓고 해석하려하기 때문이다.
말씀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손수 취하신 형태인 것이다.
피조물 가운데 언어는 인간에게만 주어졌다.
언어를 소유할 수 인간은 존재의 근원을 말씀 안에서 찾아야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신 것은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또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작정하심 가운데 시작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말씀을 통하여 인간 안에 담겨진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여야만한다.
죄악으로 일그러진 인간은 불순종을 속성으로 가지고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말씀을 가까이 할 수가 없다.
처음 아담에게는 순종의 요구라는 말씀이 주어졌지만 처음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회복이 불가능하였기에, 둘째 아담, 즉 말씀 안에서만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
요한복음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인간의 거듭남과 구원은 말씀과 더불어 시작된다.
매일의 말씀 묵상은 구원받은 거듭난 자로서 이 땅에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구현해나가는 삶에 대한 지침을 제공해준다.
말씀 안에서만 해석되어지는 존재의 근거
창세 전에 오직 삼위하나님만 계셨음은 창조된 세계의 절대적 기준과 근거가 되신다.
만물의 가시적 존재는 존재의 시작과 존재의 근거가 있게 마련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은 모든 만물에 대한 주권적 선포라고 할 수있다.
인간이 만든 물건도 그 물건의 존재와 시작이 있으며 그 소유권이 그것을 만든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태초에 계신 말씀은 조물주이시며, 말씀은 피조 세계의 존재의 근거가 된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사고 능력의 한계는 어떻게 무에서 유가 만들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사고에서 한계에 부딪히지만, 성경은 이 한계를 넘어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인간의 존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가시적 현상들은 빛으로 오신 말씀 가운데 해석되어질 때에만 제대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말씀으로 창조된 가시적 세계는 보시기에 좋았지만, 인간이 사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다고만 할 수 없다.
인간사는 전쟁으로 얼룩져있고 인간의 삶은 부정적 상처 투성이일 뿐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세상사는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야만 하였던 이유였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결코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이러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에,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참된 해방은 오직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였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의 죽으심을 선지자의 죽음으로 밖에 인식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 가운데 직접 나타나시어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설명해주셨다.
인간의 눈으로는 예수의 죽으심을 직접 목격했지만 해석이 없이는 그 깊은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찾아오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삶 가운데 경험하는 다양한 현상들에 대하여 설명해주시고 계신다.
칸트는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는 분리되어있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도 없고, 인간의 논리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택하신 자에게 찾아오셔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말씀은 절망 속에 갇혀있는 인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참된 빛인 것이다.
성도와 함께하기 위한 말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은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근거가 되면서 동시에 말씀이 하나님과 동등하시다는 근거를 제시해준다.
인간의 존재론적 근거도 인간이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달려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서 말씀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론에 또 다른 정의를 부여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셨던 인간의 세상은 암흑 자체였다.
극단적으로는 인간은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도하지만 이는 또 다른 암흑 세계를 만들어갈 뿐 해결책이 아니었다.
인간사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어떠한 인간적인 방법도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일은 없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저주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해결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셨기에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오신 것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특혜인 것이다.
이제 말씀을 받아들인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본질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의 아들됨이다.
요한복음을 통하여 제시되어진 하나님이신 말씀은 인간을 하나님의 존재 안으로 초대하는 초대의 말씀이다.
말씀을 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초청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은 복음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선포하고있는 것이다.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의 대비
요한복음의 첫 번째 구절은 창세기의 첫 번째 구절과 대비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창세기와는 달리 말씀되신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신다.
창세기의 첫장이 에덴에서의 아담이 그 중심에 있다면 요한복음의 첫번째 장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중심에 계신다.
창세기는 창조와 타락이 주제였다면 요한복음은 구속이 주제이다.
요한복음은 인간의 구속을 위해서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한복음은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의 대비라는 관점에서 처음 아담의 타락과 둘째 아담의 구속이라는 관점에서 대비적으로 묵상해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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