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1절 말씀묵상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언약공동체의 부패성
그리스도께서 오신 자기 땅은 세상과 구별되었던 곳으로, 언약 안에 있는 공동체였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언약공동체를 세우시고, 자신이 지은 세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께서 언약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이 지으신 세계를 통치하시기에, 언약 공동체는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가지고있다.
언약공동체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지키고 보존하며,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여야만 한다.
에덴이 최초의 언약공동체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언약공동체였으며, 아담이 최초의 언약 백성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아담의 역할의 역할을 재연하여 순종함으로서 언약공동체를 보존해 나갔어야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에덴을 거니시며 아담과 함께 하셨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다가오셨듯이,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시고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다가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담이 범죄 후에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타민족과 달리, 왕으로서, 제사장으로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거부였다.
하나님께서 자기 땅에 오신 모습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처음은 에덴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다가오셨지만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는 행동을 하였었다.
두 번째는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가 오셔서 처음 아담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언약을 맺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아담과 마찬가지로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였으며, 이러한 우상 숭배는 가나안에서 생활하는 동안 지속되었다.
세 번째는 구속주로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세번째의 파루시아인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 조차도 제사장 나라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정작 섬김의 대상을 영접하지 않는 일을 하였던 것이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아담이 에덴 성전에서의 역할을 잘못하였듯이, 이스라엘은 성전에는 열심이 있었지만, 참된 성전이 오셨는데도 이를 거부함으로서, 자신들이 이제껏 성전에서 하였던 일들이 거짓된 것이었음을 증명해주었다.
이는 이제껏 자신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처음 두 번과 달리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살기등등한 헤롯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셔야만 했다.
헤롯이 죽은 후에,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의 시작과 더불어 사탄의 시험을 받으셔야했으며, 유대인들의 거부에 직면하셔야만 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이들은 주로 연약하고 힘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육신적으로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이들이 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
예수가 정치적 메시아이기를 원했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를 떠나고 대적하였다.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예수를 육신적인 목적의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육신적인 목적이 있는 한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를 영접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거부의 밑바탕에는 육신적인 욕심이 깔려있다고 할 수 있다.
육신의 소욕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다.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좀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은 우상 숭배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신의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거부 당할 수밖에 없으셨다.
그들에게 성전은 여호와를 섬기는 장소가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는 장소였기에, 참 성전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배척 받으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디아스포라 언약공동체
교회는 이 땅에서는 핍박을 받는 디아스포라 언약공동체이다.
그리스도가 배척되었듯이 교회는 이 땅에서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 머리 둘 곳이 없는 디아스포라 공동체이다.
자기 백성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데 이방인들은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이방 사회에서 뿌리 내릴 때는 엄청난 핍박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바울의 편지를 받고 바울의 방문으로 더욱 강건하여진 로마교회는 네로의 박해라는 환란을 감당하여야만 했다.
박해를 뚫고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교회는 불행하게도 일단 뿌리 내린 후에는 변질의 과정을 거치게된다.
핍박이 없는 교회는 변질 되어질 수밖에 없다.
교회는 사회에 대하여 하나의 세력이 될 수가 없다.
교회가 사회의 중심에 서있던 크리스텐덤의 시기동안 교회는 온갖 악행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교회는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 아니다
교회의 참된 외침은 세상의 저항을 불러 일으킨다.
개인의 욕심은 세상적이기에 교회가 이를 채워줄 수는 없다.
교회가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자 세상과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는 곳이 될 때 교회는 그 수명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쇠퇴은 외부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세속화된 한국교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자신이 섬기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던 사건은,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육신적 욕구를 채워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성전에 오셔서 보신 성전의 모습은 장사하는 곳이었다.
많은 한국교회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메가처치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어김없이 나타난다.
돈이 없이는 교회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새 교회의 중심은 참된 교회인 성도가 아닌, 성전이라 불리우는 건축물이 되어버렸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성공의 기준은 성전건축이다.
목회자들의 욕심이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화려한 건물로 대체시켜버린 것이다.
성전 건축 후에는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양심의 부끄러움도 없이 거짓말을 하기도한다.
진정한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과 그 지체들인 성도들이다.
교회 건축물은 성전이 아니라 참 성전인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모이는 장소로서의 예배당이다.
성전이라고 전축된 예배당을 건축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게된다.
이러한 이유로 설교의 많은 부분이 세속적이 되어질 수밖에 없다.
교인들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세속화되었기에, 목사와 교인이 하나같이 세속적이 되어져간다.
욕심을 가진 목회자들은 세속화된 교인들에게 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죄에 대하여 설교하면 교인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는 은혜와 복음에 대하여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이미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는, 죄에 대하여, 은혜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세속화는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행위와 같은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반복하고있는 것이다.
교회가 이익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때에만 교회는 죄에 대하여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다.
교회가 욕심에 이끌려 이익의 문제에 얽매이게 될 때 그리스도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어질 수 없으며, 이는 자기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행동방식과 다를바 없는 것이다.
도시교회는 생존 자체가 쉽지 않은 구조로 되어있기에 더욱 시험에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익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주체가 될 것이며, 이는 이미 중세 유럽에서 보편화되었던 현상이었다.
이익의 문제에 묶여있는 로마카톨릭은 말씀을 왜곡하여 해석하고, 하나님의 성도들에 대한 박해도 서슴치 않는다.
진정한 교회는 이 세상에 대하여 디아스포라로 남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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