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3. 10. 25. 11:27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3-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적 인간)

육신을 입은 인간은 죽음과 절망에서 자유할 수 없다.

구원의 문제는 인류 역사에서나 인간의 철학에서나 항상 가장 큰 과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육신의 죄성은 인간의 스스로의 구원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육신의 본능에 묶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수도사들은 육신의 본능을 다스리고 육신의 본능을 거스려서 살고자하지만 이는 마치 용수철에 가하는 힘을 빼면 용수철이 다시 제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본질이 변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본능을 거슬러서 육신의 본능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다.

인간은 본질적 죄성으로 인해서 구원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다.

유아세례는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본질적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자신의 육신의 죄를 씻어내시기 위함이 아니고 처음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된 이들과의 연합을 위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으신 것과 같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수 있도록 육신의 세례에 참여하시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으셨다고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신 것은 아니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죄성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이라는 육신의 세례를 받고서 광야에서 시험을 감당하고서 나름대로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인간 육신의 근원적 죄성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죄의 문제는 표면적인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즉, 육신의 본성 자체에 있다.

육신의 본능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문제는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인 것이다.

구원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에서 항상 중심에 있었다.

인류의 문명은 항상 그 가운데에 종교의 문명이었으며, 어느 곳에서도 신을 섬기지 않는 족속이 없었다.

인간은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종교를 만들어 보기도하고 고행을 하기도하고 금육주의자가 되기도 하며, 선을 행하면서 공덕을 쌓아보기도하지만 그렇다고 사망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려는 금욕주의적인 삶은 자칫 자기 의를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되고 이는 율법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그리스도 말고는 어디에도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어있는 육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서 생령, 즉 살아있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살아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유지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죽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육신적인 삶에는 더 이상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아담이 범죄한 날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육체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은 구분되어야한다.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하지만 여기서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은 구분되어야만 했다.

육적인 생명만으로 살아가는 인간, 즉 육신이 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며, 결과적으로 육신도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육신의 생명만있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는 결과적으로 총체적 죽음에 이르게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영적으로 죽은 육신에게 생명의 희망이 생긴 것이다.

생명이 있는 육신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한다.

창세기 6장 1-3절에서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있다.

육신이 되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며,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하는데,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육신이 되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지 않고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게된 것이다.

육신이 된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적인 필요를 위한 것이다.

일단 육신이 된 인간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홍수로 쓸어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삶의 가치가 없는 무가치한 삶인 것이다.

인간이 육신이 되었다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모습이 된 것이다.


(절망적 육신이 희망적 육신으로)

육신은 절망을 내포하고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육신의 한계에 묶여있는 존재이다.

육신은 죄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생명이 없는 사망의 몸이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고백하고있다.

육신을 입은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에 의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면서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육신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 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절망에 희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어둠 가운데 휩싸인 육신에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사망의 몸을 언급하고있는 것은 바울 자신이 육신에 묶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육신으로는 이룰 수 없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복된 소식이다.

육신이 되신 말씀이 내포하는 것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심은 마치 헬리곱터에서 구조 대원이 물에 빠진 이를 구하기 위해서 물에 내려오는 모습과 흡사하다.

물에 빠진 이는 구조 대원과 하나가 될 때 구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기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지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에 참여되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보증하시는 것이다.


(죄인과의 연합을 위한 육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죄인과의 연합을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그리스도와 연합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죄인의 자리에 오심으로 죄인이 감당해야할 모든 순종과 형벌을 대신 담당하심으로서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죄인들은 처음 아담의 죄를 전가받아서 처음 아담과 연합을 이룬 죄인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더 이상 정죄되지 않는 의인이다.

의인이 되는 것은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열매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아직 처음 아담으로 말미암은 사망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비한 존재이다.

죽음과 삶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첫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고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죽음과 생명은 이미 대표성 안에서 결정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의 대표성을 대신하시기 위해서 아담의 혈통으로 나셨으나 죄인도 아니시고 죄성도 없으신 분으로서 동정녀 탄생의 신비 가운데 오셨다.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오셨지만 그 근원은 말씀이시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신 분이시기에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거룩하심은 죄와의 완전한 분리가 요구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거룩하신 분이 죄로 오염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100% 육신을 지니신 사람이셨지만 이미 죄에 오염된 인간과는 속성이 다르신 분이시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존재이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행함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이다.

즉 우리가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자의 삶의 근거가 오직 말씀이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에 신자의 육신은 말씀으로 점령되었다.

신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여야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죽음과 이별의 고통을 넘어서는 사건이다.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인류 최대의 사건이다.

죽음과 생명은 인간의 노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이 모든 것이 대표성 안에서 결정되어진 것이기에 육신이 되신 말씀 안에서의 삶이 신자의 삶을 점령한 것이다.


(적용)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인간의 육신이 스스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내포하고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끊임없이 도전한다.

이러한 도전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타락한 죄성으로 부터 출발된 것이다.

행위구원론은 이러한 타락한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출발된 구원론이다.

행위구원론에는 인간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처음 아담의 대표성을 부인한다.

또한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대표성도 부인한다.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표성과 전가교리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설명할 수 없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대표성과 전가교리를 부정하며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지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삶을 본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왜곡시키고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발상이다.

새관점에서는 반복적인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하지만 구원은 행위를 통하여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그리스도의 보증에 힘입어 약속되어지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요한복음 2023. 10. 23. 07:20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2-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이 되신 말씀의 새로운 사역-절망에서 희망으로

창조주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낮아지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비천한 자리에 오신 하나님의 낮아지심 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지만 신자는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여야만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분이 인간의 더럽고 누추한 자리에 오신 것만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사건으로 끝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과 분리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기 위함이었다.

처음 아담의 에덴에서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계시는 하늘과 눈에 보이는 가시적 땅을 이어주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역할이었으며,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왕의 대리인으로서의 왕이 역할이었으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널리 선포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있다.

1절에서의 하늘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거룩한 곳이었다.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을 다스리고, 거룩하게 하여서,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아담이 순종을 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땅은 하늘과 연합됨으로서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아담은 불순종함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이라는 안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연합을 통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중보자이셨으며, 처음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3중직, 즉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자리에 오신 것은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등돌린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를 살리기 위해서 무한하신 조물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유한한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피조물의 형태를 입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전의 낡은 것을 고쳐쓰시는 리모델링 개념에서의 시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전 것을 다시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스스로가 새로운 역할을 하심으로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화란개혁주의에서 시작된 리모델링의 개념,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것을 하나도 폐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변화를 시키신다는 개념에서의 역할이 아니시다.

인간의 도덕적 향상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백성을 부르셔서 이 세상과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성도의 거듭남을 위한 것이다.

창조주의 낮아지심은 이 땅의 변화를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이 아니라 처음 아담에게 순종을 전제로 약속되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단순한 낮아지심과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처음 아담의 실패를 대신하시기 위함이었기에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것이 되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나 따름의 대상으로 보려는 것은 여전히 인간 스스로 처음 아담의 실패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은 인간에게 더 이상 순종의 행위를 조건으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간에게서는 더 이상의 희망을 볼 수 없다는 선포이며, 이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인간에게 선포된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은 구원을 위한 희망이기에 윤리를 위한 행함까지 무시되어서는 않된다.

그리스도가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인 것은 구원의 위한 조건에 한정된 개념이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여야할 성화에 관한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음은 칭의에 대한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었던 처음 아담의 자리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만이 처음 아담의 자리에 서실 수 있으신 것이고 처음 아담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서 오시기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할은 처음 아담의 역할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처음 아담의 자손이기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감으로서 구원을 쟁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인간이 최종적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삶의 본을 보여주셨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처음 아담 안에서 구원을 얻기에는 완전히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 사역은 처음 아담의 불순종을 대신하시지만, 처음 아담은 오실 자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의 실체로서 오신 것이다.

처음 아담에게는 단순한 순종이 요구되었지만, 아담의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는 단순한 순종, 즉 율법의 요구를 넘어서 죄의 댓가까지 치르셔야만 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며,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 즉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능동적 순종의 의와 죄의 형벌을 감당하신 수동적 순종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는 조건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처음 아담에게 주셨던 언약의 주체가 그 언약을 직접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되심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의 시간으로 초대함이면서 동시에 말씀으로 완성될 종말론적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창조주가 아니고서는 창조된 인간을 창조주의 영역에 초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함으로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이 처음 창조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말씀은 피조 세계가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며,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며, 지어진 것이 하나도 그리스도가 없이 된 것이 없다고 요한은 소개하고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는 것은 창조주께서 이제 피조물의 자리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 창조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보면 제3자의 창조 사역이었지만,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은 제3자가 아닌 피조물과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창조 사역이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심은 궁극적으로는 신자와의 연합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행동인 것이다.

육신이 되신 말씀은 인간의 자리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고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연합된 신자의 부활을 예표할 수 있으신 것이다.

처음 창조시에는 창조주의 희생이 없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을 만드셨지만,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 아래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이다.

처음 창조는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마지막에 아담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지만, 하나님의 새 창조는 신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신자를 초대 하실 것이다.

신자들은 아담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창조의 사역에 참여되는 것이다.

신자들의 새롭게 됨은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요한복음은 신자들을 위한 창세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는 암울한 세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이 세상은 결코 암울한 세상이 아니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귀한 세상인 것이다.

육신은 어떠한 형태로든 죽음을 맞게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약속된 부활로 새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는 고독사의 문제, 희망이 없는 세상, 극단적 절망감, 좌절과 외로움 등등… 그리고 죽음… 이 모든 것은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물들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오심은 이러한 분리의 종식을 위한 것이다.

세상이 주는 좌절과 절망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향한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로서, 세상적인 좌절과 절망은 신자에게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이다.

신자는 더 이상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절망과 좌절에 묶여서는 안된다.

신자는 고독의 문제를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풀어나가야한다.

신자는 새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더 이상 죽음의 저주가 붙잡을 수 없는 이들이다.

신자는 이 땅을 사는 동안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육신의 연약함 안에 갇혀 있지만, 인간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신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세상을 이긴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
요한복음 2023. 10. 4. 15:49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1-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 하나님의 자기 계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이라는 방식으로 인간의 인식 체계 안에 들어오신 것은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고 볼 수 있다.

어떠한 피조물도 누릴 수 없는 말씀에 대한 이해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철저한 인간 중심의 실존주의 사고를 정립함으로서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배제시켜버렸다.

실존주의적 신학은 철저하게 인간 중심의 사고를 한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칼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 보다는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기록한 인간의 책으로 보고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선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식체계로 구체화시키는 것이 쉽지가 않게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오심은 인간의 인식 체계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속사역에 참여할 수 있음을 증거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인간은  자신의 인식체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정립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말씀 묵상 또한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꼭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 여러번 인간을 찾아 오신다.

인류가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의 오심은 인간의 인식체계의 변화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번번이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 갈 뿐만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삶을 살게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에덴에서 아담을 찾으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의 후손에게 찾아오신 사건인 것이다.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을 외면하고자 하는 인간의 속성은, 범죄한 아담이 나무 뒤에 숨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였던 것과 같은 속성의 것이다.

하나님을 본능적으로 피하고자하는 인간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야만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포기하실 수 없는 존재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 만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이유로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는 존재이며,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심판과 구원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영생을 위해서는 육신이 되신 말씀 앞에 반드시 가까이 다가가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경을 외면하고 말씀을 외면하면서는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창조주로서의 말씀)

요한이 소개하는 말씀은 태초에 계신 분이시며,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시다.

말씀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

태초에 모든 만물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바 되었다.

구원자로 오신 육신이 되신 말씀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기에 구원하심의 권위와 능력은 창조주의 권위와 능력이시다.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세상의 위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없으신 창조주이시다.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새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다.

말씀을 통하여 구원에 참여하는 신자는 새롭게 창조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사람이다.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수 5:17)"라고 기록하고있다.

신자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성경 말씀은 인간이 접하는 많은 글 가운데 한 가지가 아니라 인간을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의 선언은 피조 세계 안에 들어오셔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실 창조주의 현현을 선언하는 것이다.

신자가 말씀을 대하는 일은 피조 세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가슴 뜨거운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만남은 시간적 공간적 접촉점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을 이루는 연합의 사건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육신에 갇혀서 죄의 법을 쫓던 신자에게 창조주 하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축복의 사건인 것이다.


(연합을 위해 육신으로 오신 말씀)

육신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다.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노아 홍수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다(창 6:3).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아담의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왔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이들을 아내로 삼음으로서 더 이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외면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육신이 됨은 근본적으로는 아담의 불순종에서 비롯되었지만 성경에서 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은 창세기 6장, 즉 노아 때였던 것이다.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수장되었던 것은 그만큼 육신이 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짐작케하는 사건이었다.

육신의 치명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분리이다.

아담의 타락 후에도 아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였고 셋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육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바울은 자신 안에 있는 육신이 죄의 법을 섬기고있음을 고백하면서 이를 사망의 몸이라고 규정하고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하나님과의 분리는 사망이다.

육신이 되었다함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이러한 근원적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인간의 육신은 죄에 묶인 사망의 몸이지만, 그리스도의 육신은 죄에서 자유케하는  생명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궁극적으로 택한 자와의 연합을 이루심으로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함이다.

죄의 종노릇하는 육신의 세계는 분리로 규정지을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이는 연합이 아닌 분리를 가져오는 싸움이다.

전쟁으로 얼룩진 인간의 역사는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발생하는 사건들이다.

말씀의 육신이 되심은 인류의 역사의 전환점이 된다.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의 인류의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이어가지만, 내면적으로는 구속사가 진행되고있음을 볼 수 있다.

육신이 된 인간들은 연합을 이룰 수 없지만, 그 가운데 세워져가는 하나님의 나라는 연합이라는 결과물, 즉 교회를 이루어가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완전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이다.

현재는 살아가는 성도는 바벨론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나그네와 이방인같이 세상과 분리된 자로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본향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모든 성도들과 연합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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