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2. 5. 1. 12:40

요한복음 1장 13절 말씀 묵상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은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선포한다.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이들의 행위는 사람의 뜻으로부터 나온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의한 은혜로 인한 것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상황, 즉 그 이름을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이는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없디 않느냐는 질문이 생기게된다.

하지만 구원의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이를 주권자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혈통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유대인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은 유대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사상이다.

요한은 유대인들의 자부심의 근거였던 육신적 혈통에 대한 마침표를 찍는다.

모든 인류는 혈통으로는 처음 아담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라고 하더라도 육신의 혈통으로는 아담의 범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상징으로서 참된 아브라함 자손은 둘째 아담의 자손이다.

육신의 혈통으로는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으로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육신의 혈통에 대한 마침표를 찍으셨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루살렘과 성전은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육신적 혈통으로서의 아브라함 자손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의 그 임시적 역할이 종료되었다.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더 이상 육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혈통적 유대주의에 종료를 선언한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한 것임을 선포한다.


베드로가 경험한 영적인 혈통

혈통에 대한 종료는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볼 수 있다.

베드로는 로마 군인인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비몽사몽간에 네 귀에 매달린 큰 보자기 같은 그릇에 담긴, 베드로가 보기에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을 듣게된다.

베드로조차도 이때까지 유대 민족만이 아브라함 혈통의 선민이라는 의식에서 자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의 폐지는 더 이상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을 소유한 선민이라는 구분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누리게 함으로서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의 특권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제껏 혈통은 유대인 자신들만이 언약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있던 근거였다.

이러한 혈통에 대한 집착은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있다.

제3성전을 통해서 혈통적 유대인들이 최종적 구원에 참여된다는 주장은 지금도 진행되고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세상 나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이유로는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간에 율법을 지키는 육신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주어진 율법은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기에 제3성전을 통한 세대주의적 구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육정human decision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알미니안주의가 칼빈주의와 구분되는 첫 번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최종적 결정이 하나님께 달려있는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됨은 인간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고있다.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아야한다.

인간은 자신의 하나님의 자녀됨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삶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구원 사역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구원 사역은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구원할 자를 미리 정하셨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영역이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이 세상이라는 공간을 살아가지만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존재이다.

인간의 존재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산 자나 죽은 자나 동일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 가운데 드러날 것이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결정되어진 존재일 뿐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위치를 결정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인간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일로 인한 것을 넘어서야한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이 되어야하며, 인간의 기도와 삶의 방향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향이 되어야한다.

신자는 자신의 구원이 자신의 뜻과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한다.


사람의 뜻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결정의 주체가 되려고한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범죄한 자이기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넘어설 수 없는 존재이다.

범죄자는 재판관이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죄를 스스로 용서할 수가 없다.

범죄자에게는 결정권이 없고 오직 재판관에게만 있다.

인간이 범죄한 죄인이며, 이로 인해서 전적으로 부패한 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모든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이 되어야한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나 알미니안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자들, 현대에 와서는 바르트주의자들과 새관점주의자들은 자신이 스스로 의사 결정의 주체자이며, 자신의 구원의 문제는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아담의 죄의 문제는 이미 끝난 것이며, 이제는 스스로 행함의 주제가 되어서 구원에 참여하여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아담 안에서 범죄한 자로서의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망각한 교만한 생각이다.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려고한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의 위치와 존재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 택정함을 받지 않고는 스스로 주권자의 영역에 참여할 수가 없다.

오직 주권은 하나님께 있기에 신자의 삶에는 감사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창세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바로 구원을 약속하신다(창 3:15).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을 역사 속에서 실행하시고 또한 독생자를 보내셔서 자신이 창세 전에 미리 정하신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권적으로 구속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시작된 아브라함 언약도 자신의.계획 안에 있는 이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모세 율법도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 역사 속에서 주권적으로 실행하신 것이다.

모세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정한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보조적이고 부차적인subservient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모세 율법은 구원을 위해서 주어진 것 아니라 완악한 인간의 죄를 고발함으로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모세 율법을 통한 죄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는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올 수 없다.

모세 율법 자체가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면, 구원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을 사용하셔서 구원받을 자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게한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가 없다.

구원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어야만 하며, 대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서 이루신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키심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구원에 참여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서 아담이 이루지 못한 순종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또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하여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의 형벌을 대신 충족시키심으로서 자신이 정한 이들에게 구원을 얻게하기 위한 의를 전가시키신 것이다.

범죄한 아담의 자손으로서의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두 가지 역할, 즉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능동적 순종과 불순종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수동적 순종이 전가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신자에게 구원을 위한 행함이 요구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에 의한 협력적 구원이 된다.

신자에게 요구되는 행함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열매로서의 성화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가 없으며, 자신에 대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하여야한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행위나 그 이름을 믿는 행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부분은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행위만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행위는 자신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인간은 자신이 삶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어떠한 우연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없이는 일어날 수가 없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때 남을 탓하거나 환경을 탓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서 환경을 허락하신 것이다.

모든 긍정적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

어둠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이 어둠의 세력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기에 죄를 짓는 행위와 관계없이 어둠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처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기에,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모든 이들을 위함이 아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기에 왜그러렇게 하시냐고 하나님께 항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 후에 오신 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의 역할이 있은 후에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깨닫는 일이 먼저있어야한다.

죄를 깨닫는 것 조차도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하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조건으로 하기에 올바르다고할 수 있다.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인간에게는 어떠한 주권과 권리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과 구원하심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적용) 자녀의 구원의 문제

아브라함의 자녀는 육적인 자녀들과 영적인 자녀로 나눌 수 있는데, 이 땅에서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중심으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적인 자손들이다.

유대인들은 혈통적 자녀들이다.

혈통으로는 구원에 참여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적 사역에 의해서만이 구원에 참여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자녀들의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만한다.

자녀들의 구원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척박한 상황은 믿는 자들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지기에 많은 기독교 가정에서 자녀들의 일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부모는 자녀들의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평생을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이라는 은혜를 구해야만 할 것이다.

자녀라는 존재는 탄생 이전부터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졌던 존재이기에 자녀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내려놓아야한다.

자녀에 대한 인간적 집착은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하심에 방해가 될 수가 있다.

육신의 부모는 자녀의 모든 문제를 인간적으로 해결해주려고 해서는 안된다.

자녀 스스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양육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하도록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어야 할 것이다.


(적용)근원적 사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서 인간의 사고 체계는 좀 더 근원적으로 변화되어야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인간은 자신의 행동방식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고, 무엇으로 결정되어지는지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하는 행동 조차도 자신이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알지를 못할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인간의 행동 방식을 결정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는 이 땅의 역사와 자신의 행동 방식에 대하여 좀 더 근원적인 시각으로 접근해보아야한다.

모든 환경의 근원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

신자는 자신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뜻을 알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 방식과 자신의 사고체계를 성경에 비추어보아야한다.

성경은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유형적typologically으로 보여주고있다.

성경은 유형적으로 우리의 환경을 해석해준다.

우리는 성경이 제시해주는 유형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역사하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신자가 성경을 읽어야하는 이유 가운데 한가지는 성경은 우리의 삶이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그림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삶이라는 그림자를 보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실체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만 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