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3. 10. 23. 07:20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2-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육신이 되신 말씀의 새로운 사역-절망에서 희망으로

창조주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낮아지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비천한 자리에 오신 하나님의 낮아지심 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지만 신자는 그 이상의 의미를 생각하여야만 한다.

상상할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신 분이 인간의 더럽고 누추한 자리에 오신 것만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사건으로 끝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죄로 인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과 분리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주기 위함이었다.

처음 아담의 에덴에서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계시는 하늘과 눈에 보이는 가시적 땅을 이어주는 성전에서의 제사장의 역할이었으며,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왕의 대리인으로서의 왕이 역할이었으며,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널리 선포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있다.

1절에서의 하늘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있는 거룩한 곳이었다.

아담은 에덴에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을 다스리고, 거룩하게 하여서,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아담이 순종을 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땅은 하늘과 연합됨으로서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아담은 불순종함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이라는 안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의 연합을 통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연합을 위한 중보자이셨으며, 처음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3중직, 즉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자리에 오신 것은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등돌린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를 살리기 위해서 무한하신 조물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유한한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피조물의 형태를 입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전의 낡은 것을 고쳐쓰시는 리모델링 개념에서의 시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이전 것을 다시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스스로가 새로운 역할을 하심으로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화란개혁주의에서 시작된 리모델링의 개념,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것을 하나도 폐기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변화를 시키신다는 개념에서의 역할이 아니시다.

인간의 도덕적 향상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백성을 부르셔서 이 세상과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성도의 거듭남을 위한 것이다.

창조주의 낮아지심은 이 땅의 변화를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이 아니라 처음 아담에게 순종을 전제로 약속되었던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단순한 낮아지심과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처음 아담의 실패를 대신하시기 위함이었기에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것이 되었다.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삶의 본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나 따름의 대상으로 보려는 것은 여전히 인간 스스로 처음 아담의 실패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은 인간에게 더 이상 순종의 행위를 조건으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간에게서는 더 이상의 희망을 볼 수 없다는 선포이며, 이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를 통해서 증명되었다.

인간에게 선포된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은 구원을 위한 희망이기에 윤리를 위한 행함까지 무시되어서는 않된다.

그리스도가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인 것은 구원의 위한 조건에 한정된 개념이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성도로서 마땅히 행하여야할 성화에 관한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음은 칭의에 대한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었던 처음 아담의 자리에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만이 처음 아담의 자리에 서실 수 있으신 것이고 처음 아담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서 오시기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할은 처음 아담의 역할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처음 아담의 자손이기에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감으로서 구원을 쟁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인간이 최종적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삶의 본을 보여주셨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처음 아담 안에서 구원을 얻기에는 완전히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 사역은 처음 아담의 불순종을 대신하시지만, 처음 아담은 오실 자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의 실체로서 오신 것이다.

처음 아담에게는 단순한 순종이 요구되었지만, 아담의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는 단순한 순종, 즉 율법의 요구를 넘어서 죄의 댓가까지 치르셔야만 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며,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 즉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신 능동적 순종의 의와 죄의 형벌을 감당하신 수동적 순종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는 조건이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처음 아담에게 주셨던 언약의 주체가 그 언약을 직접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

요한이 소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되심은 하나님의 처음 창조의 시간으로 초대함이면서 동시에 말씀으로 완성될 종말론적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창조주가 아니고서는 창조된 인간을 창조주의 영역에 초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함으로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이 처음 창조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말씀은 피조 세계가 존재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며,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며, 지어진 것이 하나도 그리스도가 없이 된 것이 없다고 요한은 소개하고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는 것은 창조주께서 이제 피조물의 자리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음 창조는 피조물의 입장에서 보면 제3자의 창조 사역이었지만, 말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은 제3자가 아닌 피조물과의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창조 사역이었다.

말씀이 육신으로 오심은 궁극적으로는 신자와의 연합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행동인 것이다.

육신이 되신 말씀은 인간의 자리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고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연합된 신자의 부활을 예표할 수 있으신 것이다.

처음 창조시에는 창조주의 희생이 없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을 만드셨지만,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 아래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이다.

처음 창조는 모든 피조물을 만드시고 마지막에 아담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지만, 하나님의 새 창조는 신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신자를 초대 하실 것이다.

신자들은 아담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 자들이기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창조의 사역에 참여되는 것이다.

신자들의 새롭게 됨은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요한복음은 신자들을 위한 창세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는 암울한 세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이 세상은 결코 암울한 세상이 아니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귀한 세상인 것이다.

육신은 어떠한 형태로든 죽음을 맞게되지만,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약속된 부활로 새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걱정하는 고독사의 문제, 희망이 없는 세상, 극단적 절망감, 좌절과 외로움 등등… 그리고 죽음… 이 모든 것은 처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물들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오심은 이러한 분리의 종식을 위한 것이다.

세상이 주는 좌절과 절망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향한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이들로서, 세상적인 좌절과 절망은 신자에게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이다.

신자는 더 이상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절망과 좌절에 묶여서는 안된다.

신자는 고독의 문제를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풀어나가야한다.

신자는 새 생명을 소유한 자로서 더 이상 죽음의 저주가 붙잡을 수 없는 이들이다.

신자는 이 땅을 사는 동안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육신의 연약함 안에 갇혀 있지만, 인간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신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세상을 이긴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