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23. 10. 25. 11:27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묵상(3-육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육신적 인간)

육신을 입은 인간은 죽음과 절망에서 자유할 수 없다.

구원의 문제는 인류 역사에서나 인간의 철학에서나 항상 가장 큰 과제로 자리잡고 있었다.

육신의 죄성은 인간의 스스로의 구원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육신의 본능에 묶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수도사들은 육신의 본능을 다스리고 육신의 본능을 거스려서 살고자하지만 이는 마치 용수철에 가하는 힘을 빼면 용수철이 다시 제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본질이 변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신의 본능을 거슬러서 육신의 본능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인간은 죄를 짓기 이전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 죄인이다.

인간은 본질적 죄성으로 인해서 구원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다.

유아세례는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본질적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자신의 육신의 죄를 씻어내시기 위함이 아니고 처음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된 이들과의 연합을 위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죄성을 가진 육신을 입으신 것과 같이 죄인을 구원하시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수 있도록 육신의 세례에 참여하시는 것이다.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으셨다고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이 되신 것은 아니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죄성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이라는 육신의 세례를 받고서 광야에서 시험을 감당하고서 나름대로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끊임없는 훈련과 연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인간 육신의 근원적 죄성을 무시하는 주장이다.

죄의 문제는 표면적인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즉, 육신의 본성 자체에 있다.

육신의 본능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구원의 문제는 외부의 도움이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인 것이다.

구원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에서 항상 중심에 있었다.

인류의 문명은 항상 그 가운데에 종교의 문명이었으며, 어느 곳에서도 신을 섬기지 않는 족속이 없었다.

인간은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종교를 만들어 보기도하고 고행을 하기도하고 금육주의자가 되기도 하며, 선을 행하면서 공덕을 쌓아보기도하지만 그렇다고 사망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육신의 소욕을 다스리려는 금욕주의적인 삶은 자칫 자기 의를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되고 이는 율법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그리스도 말고는 어디에도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어있는 육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서 생령, 즉 살아있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살아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유지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죽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육신적인 삶에는 더 이상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아담이 범죄한 날 에덴에서 쫓겨남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죽은 존재가 되었다.

육체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은 구분되어야한다.

바빙크는 아담이 범죄한 날 죽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하지만 여기서 육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은 구분되어야만 했다.

육적인 생명만으로 살아가는 인간, 즉 육신이 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존재이며, 결과적으로 육신도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육신의 생명만있는 영적으로 죽은 존재는 결과적으로 총체적 죽음에 이르게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영적으로 죽은 육신에게 생명의 희망이 생긴 것이다.

생명이 있는 육신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한다.

창세기 6장 1-3절에서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있다.

육신이 되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며, 더 이상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하는데,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은 육신이 되었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지 않고 세상적인 삶을 살아가게된 것이다.

육신이 된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육신적인 필요를 위한 것이다.

일단 육신이 된 인간에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모두 홍수로 쓸어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삶의 가치가 없는 무가치한 삶인 것이다.

인간이 육신이 되었다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본래의 창조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모습이 된 것이다.


(절망적 육신이 희망적 육신으로)

육신은 절망을 내포하고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육신의 한계에 묶여있는 존재이다.

육신은 죄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생명이 없는 사망의 몸이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고백하고있다.

육신을 입은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에 의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면서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려주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육신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 할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절망에 희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어둠 가운데 휩싸인 육신에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사망의 몸을 언급하고있는 것은 바울 자신이 육신에 묶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육신으로는 이룰 수 없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복된 소식이다.

육신이 되신 말씀이 내포하는 것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되심은 마치 헬리곱터에서 구조 대원이 물에 빠진 이를 구하기 위해서 물에 내려오는 모습과 흡사하다.

물에 빠진 이는 구조 대원과 하나가 될 때 구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시기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지는 것은 궁극적인 구원에 참여되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보증하시는 것이다.


(죄인과의 연합을 위한 육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죄인과의 연합을 위한 현실적인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그리스도와 연합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죄인의 자리에 오심으로 죄인이 감당해야할 모든 순종과 형벌을 대신 담당하심으로서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신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죄인들은 처음 아담의 죄를 전가받아서 처음 아담과 연합을 이룬 죄인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는 더 이상 정죄되지 않는 의인이다.

의인이 되는 것은 구원을 위한 행위가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구원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의 열매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신자는 아직 처음 아담으로 말미암은 사망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비한 존재이다.

죽음과 삶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첫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고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죽음과 생명은 이미 대표성 안에서 결정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처음 아담의 대표성을 대신하시기 위해서 아담의 혈통으로 나셨으나 죄인도 아니시고 죄성도 없으신 분으로서 동정녀 탄생의 신비 가운데 오셨다.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오셨지만 그 근원은 말씀이시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신 분이시기에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거룩하심은 죄와의 완전한 분리가 요구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거룩하신 분이 죄로 오염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100% 육신을 지니신 사람이셨지만 이미 죄에 오염된 인간과는 속성이 다르신 분이시다.

인간은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존재이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행함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는 따름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이다.

즉 우리가 처음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자의 삶의 근거가 오직 말씀이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대표성 안에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에 신자의 육신은 말씀으로 점령되었다.

신자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여야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죽음과 이별의 고통을 넘어서는 사건이다.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는 인류 최대의 사건이다.

죽음과 생명은 인간의 노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이 모든 것이 대표성 안에서 결정되어진 것이기에 육신이 되신 말씀 안에서의 삶이 신자의 삶을 점령한 것이다.


(적용)

말씀이 육신이 되심은 인간의 육신이 스스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내포하고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끊임없이 도전한다.

이러한 도전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타락한 죄성으로 부터 출발된 것이다.

행위구원론은 이러한 타락한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출발된 구원론이다.

행위구원론에는 인간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처음 아담의 대표성을 부인한다.

또한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대표성도 부인한다.

인간의 가장 큰 죄악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표성과 전가교리가 없이는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설명할 수 없다.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대표성과 전가교리를 부정하며 그리스도는 단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지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삶을 본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왜곡시키고 부정하는 적그리스도적 발상이다.

새관점에서는 반복적인 훈련과 노력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하지만 구원은 행위를 통하여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그리스도의 보증에 힘입어 약속되어지는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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