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장 37~53절 말씀 묵상
37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38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스데반은 모세의 권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터 왔음을 말하고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행하시기에 모세에 대한 거부는 곧 하나님에 대한 거부가 될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께 특별 은혜의 권위를 입었다면 세상에서의 권위자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자연법에 지배되는 일반 은혜의 영역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이며, 이는 하나님의 구속 영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와는 구분된다.
특별 은혜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있는 신자는 동시에 일반 은혜의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있기에, 자연법에 의한 이 세상의 권세자에게도 복종하여야한다.
39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입은 모세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복종하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을 거부하였다.
이는 단순히 권위에 대한 불복종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면서 동시에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애굽에 대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심각한 이유는 일반 은혜를 근거로하는 보편적인 권위가 상실된 시대라는 것이며, 동시에 권위에 대한 도전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세상 신에게 속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40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이는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복종하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목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상은 인간의 필요를 채워줄것 같은 허상이지만, 그래도 인간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신을 만든다.
시내산에 올라가기 이전의 모세는, 실상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대변하는 역할을 못한 것이며, 이제껏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이로 이용 당한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성도의 필요를 채워주는 방법으로 확장을 하려고 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만있는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될 것이다.
기회주의적이고 타협하는 것이 보편화되어있는 현재의 대다수의 교회들은 실상 아론의 송아지와 별다르지 않다.
41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출애굽의 과정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였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 할 수가 없다.
그들이 유일하게 기뻐하였던 것은 송아지를 만들었을 때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은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42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로마서 1장에서도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을 때 그들을 내어버려두심으로 그들이 어떠함을 증거하고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에서 경배를 받으시길 원하신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인간의 마음을 잡아둘 수가 없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잡아당기시지 않으시면 고무줄과 같이 자신의 죄성이라는 본능으로 다시 돌아가게되어있다.
내버려 둔다는 것은 인간의 원래의 상태가 어떠한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어떻게 될지를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증명해줄 뿐이다.
끝까지 은혜를 거부하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 둠으로서, 세상은 자신들의 죄악을 스스로 증명함으로서 심판대 앞에 설 수 밖에 없다.
43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을 제물로 바치게하는 가나안의 신과 토성이라는 별과 관련된 신은 다 아론의 금송아지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신이다.
인간이 만든 신의 모습은 인간의 내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상 앞에서 행하는 악행들은 전부 다 인간의 마음의 원함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장막이 광야에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새 언약 시대인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친히 신자 안에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신자와 함께 하심을 증명해주고 있다.
성령이 내주하는 신자는, 심각한 갈등이 없이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상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성령이 신자 안에 내주하고 계심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광야에서의 증거장막이 가나안 땅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어짐을 말한다.
이는 한편으로 현재 우리의 삶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앞으로 임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삶으로 계속적으로 이어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은혜를 받은 자의 간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랐다.
자연인으로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하나님의 처소를 간구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인간은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수 있었던 것은 다윗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솔로몬은 눈에보이는 성전을 지었지만 그는 자신이 지은 성전으로 말미암아 타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가 손수 지으신 성전은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과 달리 타락과는 관계가 없었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완성될 수가 없었듯이, 타락한 인간은 상실된 성전을 지을 수가 없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상실된 성전을 완성시킬 수가 있으셨다.
성전으로서의 에덴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기에 신자는 더 이상 에덴에서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완성된 성전으로서 신자에게 안식이 되시기에 신자가 에덴에서의 문화명령, 즉 창조명령 혹은 통치명령을 다시 시작하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더군다나 다시 제3성전을 지으려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들의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기에, 이를 지지하는 세대주의를 성경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스데반은 이사야 66장 1~2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를 인용하여 적용하고있다.
성전되신 그리스도를 위한 비약적인 논리를 전개하지만 결코 괘변이나 억지 주장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을 근거로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대 성직자들은 성경을 보더라도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성경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때 진리가 상실될 수 밖에 없다.
성경이 어떠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될 때 제대로된 해석은 불가능하다.
성령은 신자에게 성경 자체를 증거해주고있다.
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담대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다.
스데반은 기회주의적이지도 않았고, 타협 하지도 않았으며, 이에 따른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성령의 함께 하심은 지식과 능력을 넘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주신다.
결국 그리스도를 거부하였던 유대 지도자들은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멸망한 이스라엘과 한 가지라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적 이스라엘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라고 말하지만 성령에 의하지 않는 인간은 모두 다 멸망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오직 성령이 내주하시는 이들이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성령이 친히 내주하셔서 함께 하심을 증명해주시지는 않는다.
톰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인정하지 않기에 톰 라이트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인본주의적이고 유대적인 나라일 뿐이다.
52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심문하는 이들의 잘못을 정확하게 집어내고있다.
스데반의 말을 듣고있는 이들은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 할 수 밖에 없다.
마음에 찔려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자가 되거나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야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스데반을 공격한다.
인간에게 중립지대란 없다.
어느 누구나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여야 한다.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다.
이방인인 인간에게도 마음에 새겨진 율법, 즉 자연법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연법 앞에서 결단을 요구하는 상황들을 접하게 되어있다.
무엇을 선택 할 것인가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8장 4~13절 말씀 묵상 (0) | 2018.01.17 |
---|---|
사도행전 7장 54절~ 8장 3절 말씀 묵상 (0) | 2018.01.16 |
사도행전 7장 17~36절 말씀 묵상 (0) | 2018.01.14 |
사도행전 7장 1-16절 말씀 묵상 (0) | 2018.01.14 |
사도행전 6장 1-15절 말씀 묵상 (0) | 2018.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