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6. 25. 21:58

신명기 32장 15-33절 말씀 묵상



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하나님의 최선의 노력하심과 최상의 환경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외면한다.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것이 부족한 때문은 아니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빵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무리를 보시는 예수님이, 이들을 떠나실 수 밖에 없으셨듯이, 이스라엘은 풍족한 공급이 있었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지만, 일단 필요가 충족되면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필요를 위해서 따르는 이들은 배부르면, 혹은 필요가 충족되면 떠나게 마련이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하나님의 마음과 이스라엘의 마음이 얼마나 어긋나 있는 상태인지를 볼 수 있다.

인간은 부모의 심정과 자식의 심정의 차이를 통해서 어렴푸시 이를 알 수 있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필요에 의한 만남은 진실된 만남이 아니다.

이방신을 섬기는 것은 자신들의 필요를 위한 것이다.

인간은 물질적 공급 뿐만이 아니라, 속이고 거짓되고 음란한 것에 대한 소원을 이루고자 거짓된 것을 만들어 섬길 수 밖에 없다.

거짓된 신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타락한 아담의 자손은 누구나 육신을 입고 있는 한에는 거짓된 신에 대한 소원이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밖에 없다.



18  너를 낳은 반석을 네가 상관하지 아니하고 너를 내신 하나님을 네가 잊었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남으로서 자신들의 존립의 근거를 잃어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와같은 속성은 모든 인간의 속성을 대변해주고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상실되어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정체성은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표현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진리는 자기 자신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잊어버린 현대인에게 절대적 진리는 없으며, 이로 인하여 절대자의 존재도 들어설 수 있는 자리가 없다.


현대는 단적으로 상실의 시대라고 표현 할 수 밖에 없다. 


19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보시고 미워하셨으니 그 자녀가 그를 격노하게 한 까닭이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들로 부르셨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준비해주셨고, 완벽한 환경을 제공해주셨다.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을 정도의 완전한 안식의 땅을 제공해 주셨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떠나게된다.


이스라엘 자손의 이와같은 모습은 모든 아담의 자손을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이 상실되었다.


일반 은혜 가운데서의 삶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제공해주시는 오늘의 안식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외면하는 이들의 진정한 모습은 사탄의 자녀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한다.



20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의 한탄하심은 아버지로서 자녀에 대한 낙심이었다.


하나님의 낙심은 단순히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불순종의 문제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심은 아들에 대한 부르심이었으며, 장자에 대한 부르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진실된 자녀이기를 바라셨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전에 이미 종말이 어떠한지 결론이 내려진 상태였다.


인간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가나안에서의 부패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는 자신들이 부패한 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이를 증명해주시고자 가나안에서의 과정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겠지만 가나안 생활에서 증명된 인간의 부패성은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죄인임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갈수 없다.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이방인인 이스라엘 자손에 대한 질투에서 구원이 시작되었다.

이방인들의 구원의 동기가 질투에 의한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신을 찾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찾아 구원을 베푸시는 것과는 다르다.

이방인인 우리는 접붙여진 가지에 불과하다.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인 새이스라엘은 육적인 실패에 대한 대안이면서 실체가 되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열심 가운데 하나님께 향한 것은 좀처럼 찾아보는 것이 쉽지가 않다.

인간에게 하나님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애써서 상황을 외면하려한다.


22  그러므로 내 분노의 불이 일어나서 스올의 깊은 곳까지 불사르며 땅과 그 소산을 삼키며 산들의 터도 불타게 하는도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인간은 재앙 가운데 들어갈 수 밖에 없다.



23  내가 재앙을 그들 위에 쌓으며 내 화살이 다할 때까지 그들을 쏘리로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달리, 일반 은혜 가운데 일반 재앙이 나타난다.

현대인들은 이스라엘 자손 못지않게 하나님을 외면하는 생활을 한다.

모든 재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만, 이는 인간이 심판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춤으로서,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



24  그들이 주리므로 쇠약하며 불 같은 더위와 독한 질병에 삼켜질 것이라 내가 들짐승의 이와 티끌에 기는 것의 독을 그들에게 보내리로다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사람은 하나님이 감정도 없으시며, 진노하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자판기처럼  신은 인간이 원하면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며, 분노하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의 분노로 인한 재앙은 인간들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게해주는 유익이 있다,

만약에 재앙이 없다면 문제를 문제로 인식할 수가 없다.

문제가 있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거나 느끼지 못한다면, 더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다가오는 문명의 후유증들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하였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25  밖으로는 칼에, 방 안에서는 놀람에 멸망하리니 젊은 남자도 처녀도 백발 노인과 함께 젖 먹는 아이까지 그러하리로다


하나님의 분노는 모든 이에게 임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자신은 개인적 잘못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모든 개인은 공동체적 책임이 있으며, 개인은 공동체의 운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있다.

안팎에서 남녀노소 할것 없이 모든 이들이 모든 상황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운명과 사회의 운명은 같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국가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이유이기도하다.



26  내가 그들을 흩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끊어지게 하리라 하였으나
27  혹시 내가 원수를 자극하여 그들의 원수가 잘못 생각할까 걱정하였으니 원수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수단이 높으며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니라 할까 염려함이라


인간이 가지고있는 즐거움 가운데 한 가지는 다른 이들의 낙담과 고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일본이나 중국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못된 인간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기뻐하면서, 더 나아가 하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영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은 거의 욕이 되었다.

이러한 욕은 그리스도인을 조롱하는 데서 나왔으며, 이제는 일상 용어가 되었다.

인간은 최소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가 잘못되는 것을 즐거워해서는 안되며,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하여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인터넷 댓글을 보면, 현재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다.

성도는 공동체적 책임을 가지고 이러한 자들을 비난하기에 앞서서, 이러한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는 인간을 미워할 자격과 권리가 없다.



28  그들은 모략이 없는 민족이라 그들 중에 분별력이 없도다
29  만일 그들이 지혜가 있어 이것을 깨달았으면 자기들의 종말을 분별하였으리라

자신들의 종말이 어떠할 지를 알면 그렇게까지는 안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논리로 자신들을 합리화시키지만, 그들의 논리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온 헛점투성이의 논리이다.

이들은 천국을 보여줘도 거부할 이들이다.

사실 가나안의 이스라엘 자손도 천국을 거주하는 이들이나 마찬가지 였다.


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31  진실로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우리의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의지하는 반석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의지하는 반석은 인간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가 보기에 어리석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들과 논쟁할 필요는 없다.



32  이는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독이 든 포도이니 그 송이는 쓰며
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


세상이 의지하는 것들은 결국 독이 된다.

중국은 급격한 산업화를 통해서 힘을 키웠지만, 그들의 대기는 항상 심각한 미세먼지로 뒤덮여있다.

그들은 힘을 키우면서 독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미세먼지는 보통 80이상 올라가면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중국의 미세먼지는 80이면 좋은 상태이고 보통 200에서 1000이상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미세먼지는 눈에 보이는 한 가지 현상이지만, 휴대폰을 비롯하여, 가상 현실등 첨단 기술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상실시키는 독성이 있다.

자연과 동떨어진 도시문명은 인간으로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빼앗아 간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종종 숲속을 산책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져들면서, 그때 그때 생각난 것들을 메모해서 옷에다가 꼽아놓고서 집에와서 정리하곤했다.

현대의 도시 공간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환경이다.

지하철 안에서나 운전하면서 묵상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도시에서의 노력은 파멸로 달려가는 기차안에서 거꾸로 뛰는 것과 같다.

모든 시스템이 경쟁과 힘을 향하여 달리는 도시구조에서 현대인은 독을 마실 수 밖에 없다.


posted by Wonho K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