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6. 24. 19:15

신명기 31장 30절- 32장 14절 말씀묵상



30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
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이스라엘 총회는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산에서의 총회를 기억하게한다.


에덴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선포되는 곳이며, 이 땅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었다.


아담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왕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제사장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스라엘 총회에서의 모세의 선포는 에덴에서의 아담의 선포를 재연하고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덴의 하나님의 산에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재연되는 것이었다.


에덴에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으며,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에덴을 지켜야만 했었다.


이는 에덴에서의 아담에게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에덴에서 선악과 금령이 선포되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은 궁극적으로 이 땅에 대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원론적으로 처음 창조의 때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새창조를 선포하고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총회에서 선포되는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늘이 귀를 기울이고 땅이 말을 들을 것을 선포함으로서 하늘과 땅의 연합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는 하늘과 땅, 즉 창조주 하나님과 천사들의 거처가 되는 비가시적인 하늘과 하나님이 지으신 각종 피조물들의 거처가 되는 가시적 세계인 땅을 가리키고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비가시적인 하늘과 가시적인 땅의 연합에 있다.


이러한 연합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이 아담을 통해서 선포됨으로서 완성이 되었어야했는데, 아담의 불순종은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일에 실패를 가져온 것이다.


이스라엘 총회에서 선포되는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을 통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의 선포가 요구되는 것이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통한 하늘과 땅의 연합에 궁극적 목적이 있었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는 율법은 하늘과 땅을 연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재창조가 이 땅에 선포되는 것이었다.


모든 피조세계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을 이루면서 또한 심판에 대한 선포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피조 세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할 수도 없으며, 피해서도 안된다.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행적을 내세우는 것은 초라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만큼이나 인간은 문명을 발전시킴으로서 자신들을 완성시켜나가려고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자기 의를 이루려는 것과 같이, 인간의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선포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이 스스로가 왕이 되기 위한 발버둥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거스르면서 발전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은 어느덧 하나님의 왕권을 마주하는 반대편에 서있다.


인간의 문명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독립된 세계를 만들어간다.


스스로 만든 거대한 도시 문명의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교만해지면서, 스스로가 만든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여 파멸의 길에 들어 설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법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고도화된 도시 문명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발악처럼 점점 더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만이 우뚝서려고한다.


인간이 추구해야하는 진정한 발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하늘과 눈에 보이는 가시적 땅의 연합을 위한 방향성을 가져야한하며 이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만이 가능하다.


성도는 하늘 나라에 속한 백성이면서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성도의 삶은 하늘 나라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것이다.


모세는 창세기 2장 5절에서 땅을 갈 사람이 없었으므로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연대순과 모순이 되는 것 같지만 2장에서의 기록은 연대 순이라기 보다는 창조의 중심에 사람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경작할 아담을 창조하심으로서 땅에 비를 내리시고 들에 초목이 나게하시며 밭에 채소가 나게하셨다.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나안에 입성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의 입을 통하여 교훈을 비같이 내리고, 모세의 말이 이스라엘 가운데 이슬을 맺히며, 연한 풀 위의 가는 비같이, 그리고 채소 위의 단비같이 내리게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며 내리셨던 단비와 같이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의 입을 통하여 말씀의 단비를 내리신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단비로서 이스라엘을 흠뻑 적시는 것이었다.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죄에 오염된 이들었기에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단비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으며, 불타는 가시덤불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 불로 심판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토라를 외우면서, 격한 토론을 해가면서까지 자신들의 율법적 유대주의를 지켜나가고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죄성을 인정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 창조와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기 함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율법과, 또한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자연법은, 궁극적으로 처음 창조의 때와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게 함으로서,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할 당위성을 말해주고있다.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교훈은, 율법과 하나님의 자연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으로 이어져야한다.


율법과 자연법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특별법으로 이어질 때 하늘의 생명에 이를 수가 있다.


땅에서의 풀과 채소가 비로 인하여 소생되어지는 것과 같이, 이 땅에서 경험되어지는 생명력들은 궁극적으로 하늘의 생명을 향하는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말씀을 근거로 사는 성도의 삶은 천국에서의 삶이 이 땅에서 모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모세 율법은 자연법의 원형이다.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모세 율법에 그대로 담겨있다.


모든 인간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연법을 근거로 살아가야한다.


자연법을 거스르고, 자연법의 원리를 무시하면서 발전시켜나가는 인간의 문명은 필연적으로 인간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퀴어축제, 동성결혼, 가상증강현실, 로봇 섹스등등,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역행하는 인간의 행태는 비같이 내리고 이슬같이 맺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하는 인간의 교만한 행태들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처음 아담의 실패를 기억하고,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는 자연법으로서의 율법을 통하여 자신의 죄성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것이다.



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는 것은 여호와의 왕권을 선포하는 것이다.


백성은 선포되어지는 왕에게 모든 위대한 일들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인정해야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광야에서 선포되어지는 모세의 말은, 흑암 가운데서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의 왕권이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선포되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어진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이 손상을 입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은 가나안에서의 하나님의 왕권에 손상을 입히게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권은 포기되어질 수 없다.


처음 아담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손상된 하나님의 왕권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어진다.


성도의 마땅한 도리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선포와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찬양과 겸손이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께 위엄을 돌려드릴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정작 하나님 여호와를 애써 외면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고도하지 않는다.


피조 세계의 완벽한 모습과 놀라운 운행 원리에는 감탄하지만, 정작 이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찾으려고도하지 않는다.


인간의 이러한 하나님을 외면하는 모습은 아담의 타락 말고는 기원을 찾을 수가 없다.


모세의 말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모든 일의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도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하지 않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같이 스스로 영광을 취하려는 죄의 속성을 가지고있다.


이는 성도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는 매사에 자신을 자랑하려는 교만한 태도를 조심해야한다.



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모든 피조 세계의 존재 근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터 위에 세워졌기에 견고하다.


하나님의 터 위에 세워진 피조세계는 물리적인 견고함 뿐만이 아니라 정의와 진실과 참되심과 공의와 올바름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이 반영되어있다.


처음 창조 때와 달리 아담의 불순종으로 타락한 인간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의 터 위에 서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자신의 터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


이스라엘이 입성하게되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견고한 땅으로서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드러내며 정의와 진실과 공의가 실현되는 곳이어야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반석이 되셔서 완전하게 세우셨던 곳이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는 에덴에서 아담의 실패를 재연한다.


가나안에서의 실패는 에덴에서의 실패를 기억하게해주며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아담의 불순종을 기억하게해줌으로서 둘째 아담을 소망하게해준다.


모세의 선포는 행위 언약으로서의 아담 언약을 기억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은혜 언약의 주체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준비하게해주는 반석의 터를 닦는 작업이었다.


교회는 반석되신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로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같이 완전을 추구해야하며, 정의와 진실과 하나님의 공의가 선포되어지는 곳이 되어야한다.


외형적인 교회는 에덴과 가나안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경험하는 파멸의 장소가 되어가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가고있다.


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

정의롭고 진실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반석 위에 세워진 인간은 거짓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한다.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지으시지도 읺으셨으며, 하나님의 형상에는 어떠한 악도 담겨있지 않다.


하나님께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악을 행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악을 행한다.


인간의 가장 큰 악은 하나님의 왕권을 거부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더라도 이를 악이라고 부르지도 않으며 이것이 죄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이 생각하는 악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악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악을 행하였음에도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거나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가인도 마찬가지였으며 라멕은 그 정도를 더하여 더욱더 악을 보편화시켰다.


노아 홍수 때 인간의 악이 관용한 것의 근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 육신의 욕심에 이끌려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즐거움에 취하여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을 못하였겠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들의 악은 홍수로 쓸어버릴만큼이나 심각한 것이었다.


사람의 근본적인 정체성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왕이시면서 동시에 아버지이시다.


자신의 아버지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왕권을 부정하는 일 자체가 가장 큰 죄악이다.


모세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악을 지적하고있다.


이러한 죄악은 하나님이 창조세계의 반석되심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손수 반석이 되셔서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고 아들로서의 모든 신자의 맏형이 되신 것이다.



6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 


반석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바로 모세의 눈 앞에 있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모세는 선포한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앞둔 가장 희망적인 순간에 가장 절망적인 선포를 한다.


광야에서 보여주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가나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날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광야에서의 척박함이 가나안에서의 풍요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자녀에게 아무리 좋은 환경을 제공해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지 않으면 죄성을 가진 인간의 타락만 가속화시킬 뿐이다.


인간은 환경이 바뀐다고 근본이 바뀌지는 않는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인간의 아버지는 사탄이 되었으며 인간은 독사의 자식이 된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행함의 문제 이전에 신분의 문제에 있다.


유대인들이 토라를 외우고 율법을 지키며 많은 학문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행함으로 자신을 완성하려하여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근본적인 문제로 인한 것이다.


이는 현대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을 비롯하여 많은 현대 신학들은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존재론적인 접근이 아닌 행위론적 접근을 함으로서 문제의 핵심을 외면하고있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외면은 인간의 희망사항일 뿐이며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육신의 속성에서부터 출발된 생각들이다.


하나님의 새창조는 태초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듯이  인간의 완전히 파괴된 상태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는 인간을 개조하거나 고쳐서 쓰시는 것이 아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그리스도를  새로운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묘사함으로서 인간의 행동 방식을 고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다고하더라도 가나안에서 부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있었다.


모세의 절망에 대한 선포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희망의 선포인 것이다.



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과거에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지만 현대에 와서는 모든 정보 매체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판단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종착역은 아담에 이른다.


인간의 부정적 상황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근본적인 접근을 하기를 원한다.


모세는 율법을 통하여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저주 밖에 적용될 수 없음을 알고있었다.


모세는 가나안 입성에 동참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는 눈에 보이는 가나안이 될 수 없음을 알고있었으며, 오직 둘째 아담으로 오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안식할 수 있음을 알고있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좀 더 근원적인 접근을 하여서 자신의 존재가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존재인 것을 인식하고 그리스도를 소망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순복해야한다.


민족과 인종을 정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왕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다.


인간이 처하게될 환경은 태어날 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노아의 아들들의 운명 또한 노아의 예언 가운데 결정되었으며, 모든 민족은 그 근원이 셈과 함과 야벳 가운데 한 가지에 속하여있다.


야곱과 에서도 태어나기 전에 그 기업과 백성들의 경계가 결정되었다.


자식이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이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정하심 가운데 자신의 위치에서 살아가야한다.


모든 인간은 그 근원이 아담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또한 아담의 범죄의 영향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와 아담의 범죄를 기억하고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것이다.


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을 기업으로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재창조를 위한 것이었다.


처음 창조시의 아담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기업이었다.


아담이 순종하는 가운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였더라면 땅에 사는 모든 인류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다.


범죄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세우시기 위해서 야곱을 택하셨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은 선택받은 야곱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야곱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종이 요구되는 조건적 하나님 백성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요구 된다는 것을 알고있었지만  실상은 그들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모세의 말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을 염두에 둔 선포였다.


성도의 정체성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하나님의 요구 조건이 충족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모세의 입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은 더 이상 성도들에게 요구되어지는 조건이 아니라 성도들이 맺어야할 결실들이다.


성도는 모세의 말이 실천되어지는 삶을 살아야할 의무가 지어지는 것이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의 새창조를 위해서 선택되어졌던 이스라엘에게는 처음 창조의 환경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해있던 환경은 처음 창조시의 혼돈의 땅과 같은 황무지였다.


생명력이 상실된 황무지는 처음 창조시의 생명의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의 땅을 기억하게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혼돈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게하면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새창조를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황무지 한 가운데서 호렙산에 나타나시어 혼돈 가운데서의 창조 사역을 시작하신다.


시내산은 황무지 한 가운데 있는 황량한 산이라는 의미에서 호렙산으로도 불리운다.


비록 죄가 없었던 아담은 평안했던 에덴에서 짐승의 유혹으로 불순종하였지만, 이미 아담 안에서 불순종하여 죄인이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덴의 환경과 달리 혼돈의 땅에서 짐승의 유혹과 싸워야만 했다.


광야에서의 짐승과의 싸움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는 처음 혼돈 뿐만이 아니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짐승의 영향력에서 자유 할 수 없었던 죄인들이 다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이 처음 창조보다도 더욱 힘든 여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이는 처음 아담에서 요구되었던 능동적 순종과 달리,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순종이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 뿐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의 희생이라는 수동적 순종이라는 두 가지 성격의 순종이 요구되는 것을 보여준다.


모세는 처음 창조시에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땅에서 수면 위를 운행하신 성령의 창조 사역을 기억하게하면서 이스라엘 가운데 운행하시는 성령의 창조 사역을 서술하고있다.


비록 아담 안에서 이미 타락한 존재였지만 혼돈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위하시고 보호하시는 성령의 창조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추가적인 희생을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이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값으로 사신 존재이다.


성도는 처음 창조시의 아담과 달리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희생으로 태어난 존재이다.


성도의 정체성은 처음 아담과 달리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 안에서 찾아야한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독수리가 보호하는 보금 자리는 아무도 간섭하거나 위협할 수 없다.


태초에 혼돈 가운데서 창조를 위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던 것과 같이 성령은 이스라엘 백성들 위에 운행하시면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


홍수로 인하여 모든 이들이 멸절된 상태에서 노아 가족을 보살피시고 바람으로 물을 말리시고 아라랏산에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 성령께서는 다시 죽음으로 뒤덮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 가운데 구원하신다.


독수리의 새끼들로 묘사되고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령의 보호하심으로 죽음이 뒤덮였던 애굽 땅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애굽의 군대와 싸우시고, 바람을 일으켜 홍해를 가르시고, 짐승이 우는 황무지 광야에서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독수리와 같이 신발도 헤어지지 않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새창조의 시작이었으나, 이미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함으로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에초부터 불순종의 자녀들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은 순종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성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바라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 언약은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었으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의 속성을 내포하고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성령의 사역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이미 아담 안에서 불순종한 죄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함으로서, 그리스도를 예비하시는 새창조의 사역이었다.


성도에게는 처음 아담과 달리 순종이 요구되지는 않는다.


성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도에게 요구되었던 믿음은, 인간은 아담 안에서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셔서 죽으시고 순종으로 의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어도 본능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신에게 좀 더 편한 신을 만들어 숭배하려고한다.


출애굽은 인간의 처음 창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으셔서 자기 백성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 과정이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원치않았다.


이적과 기사의 여러 증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고, 시내산의 임재를 통하여 백성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등극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의 마음의 속성이 체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속성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만물의 질서와 창조 세계의 놀라운 조화는 창조가 오직 한 분 창조주로 말미암았음을 보여주고있지만 인간은 체질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인간은 사탄의 속성이 더 편한 체질로 바뀌어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일상에서 사탄의 속성들을 즐기고있다.


타인을 미워하는 것과 복수심에 불타는 것과 게임을 즐기는 것과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것과 자신의 욕심에 집착하는 것과 기타 등등… 인간의 삶의 많은 원동력들이 실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낙들의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속성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속성들은 대부분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탄에 종속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나무들에 박혀있는 가시들이 처음 창조시에 없었던 것이 생겨났듯이 인간은 타락과 더불어 체질이 바뀐 것이다.


거듭난 체질이 아니고서는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신의 주인이시며 자신을 인도하신 분이라고 고백을 할 수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체질적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없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주로 고백할 수가 없다.



13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땅의 높은 곳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산의 지상적 표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땅의 높은 곳에 왕으로 등극하셔서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산인 시온산에서 다스리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온에 참여케하신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의 높은 곳인 시온산에 임하신 하나님께 제사들 드리며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시온산은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임하셨던 산이 재현된 것이다.


모든 강의 근원이 되는 높은 산이 있었던 에덴은 하나님의 산, 즉 하르 마게돈의 장소로서 하나님의 총회가 열렸던 곳이다.


하나님의 산은 땅을 다스리는 여호와의 총회가 열렸던 곳이며,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였던 곳으로서 하늘과 이 땅의 피조세계를 연결하는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실 분은 이 땅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땅에 선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총회에 참여할 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아담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 막힘으로서 더 이상 땅의 높은 곳에 거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땅 위의 모든 생물이 죄로 말미암아 홍수로 멸망 당했지만 노아는 땅위의 높은 곳인 아라랏산에서 새로운 세상을 시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아담의 범죄로 체질이 바뀐 인간은 땅의 높은 곳에 거할 자격과 능력이 없었다.


모세의 입에서 나오는 선포는 땅의 높은 곳을 다닐 하나님의 백성, 즉 이 땅을 다스릴 왕으로 부름을 받을 자들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총회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며, 이는 모세를 비롯하여 시내산에 초대받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발등상에서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의 산에 참여하는 경험을 하게함으로서, 이 땅에서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았던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초청을 받은 거룩한 이들로서,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소산을 먹는 삶이며, 반석되신 그리스도로 인한 기쁨을 누리는 삶인 것이다. 



14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가나안에서 경험하게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고의 열매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풍요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는 에덴의 상황을 표면적으로 재현하고있는 것이다.


아담은 범죄 후에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만 소산을 먹을 수 있었지만, 타락 이전에는 에덴에서의 풍요를 만끽하고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누리게될 풍요의 상실은 에덴에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를 기억하게하는 것이었다.


인생이 누리는 풍요와 상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창조의 풍요로움을 경험하게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죄성을 깨닫게 해준다.


인생이 죄가 없는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풍요는 영원한 축복의 한 부분이겠지만, 죄악된 인간에게 주어진 풍요는 파멸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죄 가운데 사는 인생은 풍요 가운데 에덴을 기억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풍요를 바라보아야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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