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6. 21. 21:55

신명기 30장 1-20절 말씀 묵상



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쫓겨간 나라에서는 고향이 그리울 수 밖에 없고, 모압 땅에서 선포되었던 모세 언약이 생각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주 조그마한 모습까지도 기뻐하신다.

인간에게 아주 조그마한 희망의 씨앗이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이를 놓치지 않으신다.

마치 엘리야가 사환을 보내, 일곱 번째만에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을 보고서,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시라고 말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 자손의 조그마한 기억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무수히 많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만드는 씨앗이 된다.

조그마한 기억을 만드는 씨앗은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없다면, 만들수가 없을 것이다.

유배생활 가운데있던 이스라엘이 가나안과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듯, 인간이 원초적으로 기억해야할 것은 에덴과 에덴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일 것이다.

에덴까지 올라간 기억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어질 때 구속의 문이 열릴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유배된 존재이다.

좌절과 낙담 위에 돋아나는 기억의 씨앗은  구원의 열매로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미약한 시작을 사용하셔서 창대하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큰 것을 기대하시지는 않으신다.

출애굽이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외침에서 시작되었듯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동기가 중요하다.

삶의 여정에서의 실패와 좌절과 낙망은 하나님을 기억하게하며, 구원의 씨앗이 뿌려질 토대가 된다.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청종하는 것은, 적극적인 순종보다는, 최소한도의 귀를 기울이는 관심 수준의 순종이다.

유배 이전의 자신만만했던 솔로몬 성전때와 비교해 볼 때, 겸손해진 상태에서, 초라하게 지어지는 스룹바벨 성전과 같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 받으시는 성전이 지어지는 것이다.

포로 이전의 솔로몬 성전이 승리한 자들의 순종을 생각하게 한다면, 포로 이후의 스룹바벨 성전이 실패한 자들의 순종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 성전과 더불어 교만해진 이스라엘을 꺽으시고, 스룹바벨 성전과 더불어 엎어진 이들을 세우신다.

하나님께서는 저주로 인하여 유배되었던 이들이 돌아온 것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최소한의 것만을 말씀하신다.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마치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마음을 돌이키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기꺼이 받아주신다.

모든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사랑과 간절함과 긍휼하심이 밑바탕에 깔려있음을 알 수가 있다.



4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말씀을 청종했다는 조그마한 행동의 모습에 크게 기뻐하시면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을 모아 그들을 이끄실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변치않는 견인perseverance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칼빈의 5대 강령의 5번째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이 이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행하여졌음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최소한도로 소극적이지만, 하나님은 오래참으시며, 기다리시고 적극적으로 힘쓰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하심으로 인해서 조상들보다도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은 실제로 가나안의 이스라엘 가운데서는 실행되지 않았다.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케 하시리라는 말씀은 새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해서 성취되었다.

톰 라이트는 이를 유대 이스라엘이 확장된 교회라는 관점으로 보고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과연 확장된 이스라엘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세는 여호와께 감추어진 일과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나타난 일을 구분하여 이중적인 구조를 제시한다.

여호와께 감추어진 일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나타난 일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톰 라이트는 유대 이스라엘을 실체로 보고 교회를 부차적인 조직으로 보지만, 유대 이스라엘은 실체인 교회를 예비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교회는 육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의 확장이 아니라, 이스라엘과는 구별되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육체에 할례를 행하였지만,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을 말씀하신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육체에 행하는 할례를 행한다면, 이전의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겠다는 것은,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해석되지가 않는다.

진정한 이스라엘 자손이 되려면, 이전의 육체적 행함에서 마음의 행함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마음의 할례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할례를 베푸심으로서, 새이스라엘인 교회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근거 위에 세워질 것을 보여주신다.

육적인 할례는 이미 실패한 외적인 행위의 반복인데 반하여, 마음에 베푸신 할례는 마음 중심의 변화를 통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된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마음 중심에서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 중심의 변화가 요구되는 것은, 인간이 죄악된 행위를 하기 이전에, 타락한 아담의 자손으로서 본질적 죄인이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내면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아무리 노력하여도 환경만 조성이 되면 죄악을 저지를 수 밖에 없다.

마음의 할례는 오직 성령이 임하심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출애굽 때와는 달리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본질적 죄악의 뿌리인 사단에 대한 저주를 행하시는 것이며,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다.

성도의 세상과의 싸움은 인간의 외적인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승리에 근거하는 싸움이 되어야 한다.



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모세를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것에 대한 요구는 철회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마침이 되는 적극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을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을 다 이루셨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대하여 다 이룬이들이다.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10  (윗절에 포함됨)


이스라엘이 받는 복은 행위 언약에 대한 순종을 근거로 하여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행위 언약을 다 성취 하심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만이 하나님의 명령을 다 수행한 새이스라엘 자손이 된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현재의 유대인들은, 아직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요구를 실행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안식일에 예루살렘의 유대인 구역을 승용차로 들어갈 수 없으며, 만약에 들어간다면 돌에 맞게 된다.

유대인들은 제3성전을 지으려고하면서,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들 만의 메시아를 기다리고있다.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이제껏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어려웠고, 먼 것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실행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이러한 명령을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안에 감취었던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 감취어진 하나님의 비밀이었으며, 성도는 드러난 비밀인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쉽고 가까이서 성취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감취어졌던 하나님의 비밀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머나먼 중동 지역의 일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의 영역인  이곳에서의 일이다.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얘기도 아니다.

천상의 영역도 아니며 현재적 삶 가운데 일어나야 할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시키셨듯이, 성도의 신앙 생활은 이론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율법주의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한다.


인간의 무능력과 전적인 부패는 구원에 관한 것이다.


율법주의는 스스로 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행위이다.


스스로의 행위를 의의 근거로 삼는 율법주의에서의 구원은, 하늘로 올라가야만 쟁취될 수 있는 머나먼 것이다.


이와 반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사람의 마음과 입에 있을만큼 가깝게 있다.


모세가 전하여준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 귀결되기 위한 것이었기에, 모세는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 14)”라고 선포한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받은 말씀은 결코 가깝지가 않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이 성취될만큼 쉽고 가까운 것이다.


타락한 인간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인간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적 바리세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부르신다.


독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이다.


택함받은 이스라엘의 실상은 독사의 자식들이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도전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오해하였다.


모세가 모압 땅에서 재반포한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4)”고 선포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킨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의를 이루려는 율법이었다.


이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신 30:12)”의 의미를 가진 율법이었다.


모세가 진정 전하고자했던 것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려는 율법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부패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그 힘든 고생을 하면서 자기 의를 이루려고하였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는 행위였다.


마음에 담겨있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마음에 있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는 것보다는, 외식과 형식으로 행위 중심적이었다.


신앙고백은 입으로하는 믿음의 고백이 앞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다.


새관점에서 예수를 따름의 대상으로보는 것은, 그들이 아직도 행위 위주의 유대주의적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이제 제시되는 축복과 저주는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로 바뀐다.

생명과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생명과 복을 취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에게는 사망과 화만 있을 뿐이다.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생명이 주어지는 땅은 영원한 가나안인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육적인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기원후 70년 경에 성전의 파괴와 함께 무너짐으로 종결되었다.

현재의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이 제3성전을 지으려고하면서, 이곳에서 생명을 취하려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공로로 생명을 취하려는 사단의 계략일 뿐이다.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끝까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저주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지는 저주는 유대 가나안에서의 현재적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미래적 삶의 이중적 예언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구약의 현재와 신약의 미래의 이중 구조는 가나안의 이스라엘 자손에게 뿐만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오늘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선언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강령이다.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언약적 강령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근거로하고있다.


시편 2편 7절에서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기록하고있다.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강령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기 위한 것이다.


모세가 오늘 선포하는 생명은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 안에서, 오늘 이라는 시제로 이미 그리스도를 아들로 삼으셨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오늘이라는 현재 시점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아들로 창조하시고, 선악과 명령을 하실 때 이미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준비하셨듯이,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생명의 강령 안에는 하나님의 구속이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작정되었다.


모세에 의해서 선포되는 언약은,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이 떠나 육신이 된 인간에게 실행은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된 죽은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자기 의를 실현하려는 인간에게는 수치만이 남을 것이다.


자기 의를 실현하려던 가나안에서의 유대인들은, 완전한 무균 상태의 가나안을 스스로 균이 되어 오염시켰다.


자기 의를 추구하는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작정된 생명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있지 않았기에, 수치만이 남겨질 뿐이다.


수치를 당할 이들은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모세의 강령을 윤리 도덕으로 받아들이는 새관점주의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를 도덕적 영감을 주는 이로 받아들이는 자유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수는 이미 창세 전에 택한 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셨으며, 성육신하심으로서 오늘 하나님의 아들로 지명되셨다.


모세의 강령은 아담 안에서 육신이 된 인간이 죽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이 택하여짐을 선포하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었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살았다.


모세 언약은 다윗에게 죄를 선포하면서 동시에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듯이,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로 육신의 죄악을 선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담겨진 생명을 선포하고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신의 육신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 아들로 지명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명을 얻는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저주와 축복이 반복되어 제시된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감추어진 것과 행하여야 할 것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선택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달려있으며,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은 이전과 마찬가지의 저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에덴에서와 달리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노예 의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기에, 그리스도께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에덴과 가나안의 차이는, 에덴에서는 전적인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었다면, 가나안에서는 이미 타락한 아담의 자손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노예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이미 결론이 난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가나안에서의 실패를 통한 인간의 부패에 대한 확증이 없었다면, 자신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대표하고있다.

인간은 누구나 삶의 여정이 이스라엘과 같이 실패의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삶 가운데 주어진 부정적 상황과 실패의 과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공은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며, 육적인 개념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수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하지만,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이 땅에서 죽음에 직면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육적인 죽음일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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