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6. 19. 20:53

신명기 29장 1- 13절 말씀 묵상

1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은 이러하니라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은, 호렙산에서 언약을 세웠던 처음 세대는 거의 광야에서 죽고서, 그의 후손들과 세워진 것이다.

단순한 세대교체의 의미보다는, 광야에서의 40년의 세월동안 하나님을 경험하고서 세워지는 언약이라는 점에서, 호렙산 언약보다는 좀 더 심도있다고 할 수 있다.

호렙산에서 세워진 언약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세대였다면, 모압 땅에서 세워진 언약은 하나님을 충분히 경험하고 알 수 있는 세대와 세워진 것이었다.

모압 땅에서 세워진 언약 후에도 이스라엘 자손들이 잘못을 행한다면, 이전에 호렙산에서의 언약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세워진 언약이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것이다.

마치 유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성인이 되어 입교를 하는 것과 같이, 이제 광야에서 사십년의 충만한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다.

판단력은 오랜 경험 못지 않게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출발되어야한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앞으로 살게될 환경이 과거와 비교하여 어떠할지를 스스로 판단하여야 한다.

기준이 없으면 상대적인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연륜은, 젊은 이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며, 판단력을 높여준다.

이는 젊은 이들이 노인을 존경하여야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노년의 판단은 그만큼 책임감이 따르기 마련이다.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삶의 연륜을 통해서 깨닫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근본이 변하지 않고는 아무리 많은 지식과 경험도 자연법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수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에 대하여 그토록 고민하고 연구를 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인간을 알 수가 없었다.

똑같은 풀이라도 소가 먹으면 소똥이 나오고 염소가 먹으면 염소 똥이 나온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40년의 충만한 시간동안 하나님을 경험하면서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근본적인 변화를 찾아 볼 수는 없었다.

환경이 바뀐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다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준비가 안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지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적을 베푸셔서 이스라엘 자손들로하여금 깨닫게 하실 수도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자연법적 과정을 중요시 여기신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서 얼마나 교만한 지를 알아야만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성장 과정이 필요하며, 자신의 문제와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이 성장의 첫 걸음이다.

모압 땅에서의 언약은 호렙산 언약보다도 성장 과정에 따른 좀 더 구체적인 명령이 제시될 수 밖에 없다.

거듭남의 과정은 많은 시행착오의 과정이 필요하며, 이스라엘 자손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식할 때에만 거듭날 준비가 되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80년의 시행착오 과정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과 눈과 귀를 허락하셨다.

거듭남과 성령의 함께하심이 없으면, 인간은 외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을 깨닫고 알 수가 없다.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오순절 성령의 강림하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간의 공생애를 같이 했어도, 예수님의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았어도 깨닫지 못했으며, 알 수가 없었다.

복음은 윤리나 도덕의 차원이 아니며, 표면적인 율법의 차원을 넘어선다.

복음의 핵심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깨닫는데서 출발된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노예 의지를 강조했지만, 현대신학자들은 이를 외면하고 거부한다.

신칼빈주의, 신정통주의, 새관점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개념을 거부하며, 인간의 행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지만, 오히려 이들 가운데에서 점점 더 부패하고 변질되어가는 기독교를 보게된다.

현대 기독교의 변질과 부패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외면하는데서부터 출발된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된 복음만이, 오직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마음으로 깨닫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5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40년 간의 공급하심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를 말해준다.

사십 년 동안의 광야에서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함에도 인간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이 세상 최후의 심판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일반 은혜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공급하시지만,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허락하시지 않으시며, 세상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의 불순종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사십 년 동안의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핑계 할 수가 없었다.

인간 세상의 마지막은 인간 스스로 초래한 재앙에 의하여 멸망되어 갈 것이며, 하나님께 불평 할 수가 없을 것이다.



6  너희에게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직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만나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광야에서 농사를 지울 수도 없었으며, 소산으로 인한 포도주와 독주도 취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만이 살길이었다.

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가나안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 가능한 환경이었다.

가나안에서의 안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자신들의 우상 숭배의 토대로 사용하였다.

가나안에서의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역시 타락한 아담의 자손임을 증명해주고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거듭나게 하시지 않고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거할 수가 없다.

일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편적 안식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회로 삼질 않는다.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떠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훨씬 편한 존재이다.

인생은 분명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데, 이를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느낀다고하더라도 무능력한 것이 인생이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바랄 뿐이다.


7  너희가 이 곳에 올 때에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이 우리와 싸우러 나왔으므로 우리가 그들을 치고
8  그 땅을 차지하여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나니


주어진 땅은 그냥 공터가 아니라, 점령에 의하여 악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선포하는 행위에 의한 것이다.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어진 땅은 이전의 우상 숭배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땅으로 바뀐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패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땅을 인간이 다시 오염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간섭하심은 한계가 있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정화하시는 작업을 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신뢰하고 맡길 수 없는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에, 근본적인 대책이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작업이다.



9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호렙산 언약보다도 경험과 신뢰가 더욱 다져진 상태에서 또 다시 요구하는 행위 언약이다.

언약을 지킬 것에 대한 요구는 모세 언약의 속성이 행위 언약임을 다시 한 번 더 나타내는 것이다.

은혜 언약이 일방적인 것이라면, 행위 언약은 쌍방적인 요구를 근거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제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는 성숙한 상태이기에, 호렙산에서의 언약이 다시 한번 더 강조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많은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분별력을 가질 수 있는 성숙된 이들이다.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일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성숙된 이스라엘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분별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게끔 하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를 바탕으로 충분한 지식이 주어지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10  오늘 너희 곧 너희의 수령과 너희의 지파와 너희의 장로들과 너희의 지도자와 이스라엘 모든 남자와
11  너희의 유아들과 너희의 아내와 및 네 진중에 있는 객과 너를 위하여 나무를 패는 자로부터 물 긷는 자까지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있는 것은


가나안에는 언약에 참여한 백성만이 들어갈 수 있기에, 가나안에 들어간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여야한다.

에덴에서의 생존 조건도 가나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약에 참여한 자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언약을 어긴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 날 수 밖에 없었듯이,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쫓겨나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는 언약의 종결이며,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복귀는, 이미 종결된 행위 언약을 토대로 참 성전되신 그리스도의 은혜 언약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일반 은혜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에게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진다.

전도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다.



12  네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에 참여하며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하시는 맹세에 참여하여


맹세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조건적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다.

맹세에 참여한 백성은 순종과 불순종에 따른 축복과 저주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는 백성이다.

언약 백성은 불순종으로 인한 저주에 대하여 하나님께 항의 할 수가 없다.

저주의 근본 원인은 불순종한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저주 아래에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반 은혜 아래에서 한시적 복을 누리는 것이다.

현재 인간이 누리는 축복은 결코 인간이 잘낫거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한시적인 것이다.



13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그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과정 가운데 있으며, 결코 완성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제시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거룩한 백성이어야한다.

가나안에서의 부패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결국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진다.

부패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이스라엘 자손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의 이스라엘 자손을 실질적인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본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주어진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get in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stay in 규범이라고 말한다.

새관점이 정통 개혁주의와 다른 주된 점은, 유대인들이 참된 하나님 나라 백성이며,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일 뿐이며, 그리스도는 유대민족에 가해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담당하시고서, 이스라엘을 이방 국가에 전파하는 길을 여신 분으로 보는 것이다.

새관점을 수용하면서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고백하는 이들은, 새관점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모르고 수용하는 것이다.

새관점을 수용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구속주가 아니며, 단지 행위를 본받을 선지자에 불과할 뿐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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