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2018. 6. 18. 22:02

신명기 28장 58-68절 말씀 묵상


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59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아직 가나안에 입성하지도 않은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모세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명령은 완전한 것을 요구한다.

모든 말씀을 지키라는 반복적인 강조는 듣는 이들에게 심히 마음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 선 이스라엘에게 모세 언약은 은혜 언약이 아니라 행위 언약이었다.

명령에 대한 실행 여부에 따른 축복과 저주는 행위 언약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에덴에서의 아담 언약이 그대로 재연republication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담의 행위 언약이 반복되는 면이 있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위치와 성격은 에덴에서의 아담의 위치와 성격과는 일치하지는 않는다.

가나안에서의 모세 언약이 에덴에서의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인가에 대해서는 아랫부분에 따로 정리해본다)


60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던 애굽의 모든 질병을 네게로 가져다가 네 몸에 들어붙게 하실 것이며

61  또 이 율법책에 기록하지 아니한 모든 질병과 모든 재앙을 네가 멸망하기까지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실 것이니

62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이스라엘의 나중 상태는 출애굽 이전의 처음 상태보다도 더욱 안좋아진 상태가 된다.

선택받아 누렸던 모든 축복은 사라지고, 오히려 선택받기 이전 만도 못한 상태가 된다.

저주를 받을 거라면, 차라리 출애굽을 안하는 것이 좋았을 뻔 하였다.

선택받았다는 자체가 축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선포되는 말씀이다.

현대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시험대에 선 가나안에 임시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였듯이, 선택의 기로에 선 현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일반 은혜라는 축복이 임하고 있다.

가나안에서의 축복이 선택을 위한 기회로 한시적으로 주어졌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 은혜의 축복은, 그냥 세상적인 복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선택의 기회를 허락하였듯이, 현대인에게도 선택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한시적으로 은혜를 베푸신다.

하나님의 일반 은혜 아래서 인류가 누리는 문명의 기술은 인간의 외적인 삶에 풍요를 가져다 주지만,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무한정 주시는 풍요가 아니다.

불순종한 가나안의 이스라엘에게 질병과 재앙이 임하였듯이, 현대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질병과 재앙이 임할 수 있고, 또 임하고 있다.

현대인의 막강한 기술력과 능력도 무력화되는 것은 순간이다.

현대인은 문명의 기술이 인간을 구원해주리라는 자기 착각에 빠져있다.

현대 의학의 발전 못지 않게 질병의 가지수는 최대치를 기록하고있다.

현대 의학으로 누리는 장수는, 약으로 버티는 수명의 연장이지 결코 건강 수명은 아니다.


인간의 굉장함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미없다.

인간은 자신의 외적인 재력이나 능력, 규모등이 커지면, 하나님을 의지하려하지 않고, 자신을 신뢰하게된다.

자기 신뢰는 교만으로 이어지며, 교만과 자기 신뢰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것으로 이어진다.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명령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명령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은, 그리스도를 믿느냐, 아니냐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63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를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요
64  여호와께서 너를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으시리니 네가 그 곳에서 너와 네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목석 우상을 섬길 것이라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시고 번성하게 하기를 기뻐하시면서 일을 이루셨지만, 가나안에서의 멸망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면서 행하셨다.

출애굽과 더불어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던 백성은, 만민 중에 흩어지면서 목석우상을 섬기게 된다.

모든 것이 정반대 상황으로 바뀌어버린다.

출애굽에서의 희망은 절망을 바뀌어버렸지만, 가나안에서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게 된다.

출애굽 직전의 애굽에서의 상황은 가나안에서의 마지막 상황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애굽에서의 고통은 출애굽으로 이어졌지만, 가나안에서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이어졌다.

애굽에서나 가나안에서나 고통은 동일하였지만, 이어지는 희망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애굽에서의 고통은 외적인 환경의 변화만을 가져왔지만, 가나안에서의 고통은 내적인 환경의 변화를 가져왔다.

출애굽이 육적인 구속이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은 영적인 구속이었다.

출애굽에서의 유월절은 실체로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이르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 이러한 두 가지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한다.

우선은 삶의 고통 가운데 구원을 위한 몸부림이 있어야하며, 그 다음은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한가지 과정만 있다.

새관점은 인간이 얼마나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인지에 대한 안식이 생략되어있기에, 구원의 속성이 다르며, 그리스도의 역할 또한 달리 해석한다.

실제적으로 자신을 압제하는 세력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세계에 있다.

내면의 세계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또한 자신이 가나안의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 존재인지를 인식하는데서부터 출발된다.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인식할 때 가장 고통스럽다.

끊임없이 외부 환경에 대해서는 비난을 서슴치 않아도 정작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다가온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 보는 것으로 이어질 때,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65  그 여러 민족 중에서 네가 평안함을 얻지 못하며 네 발바닥이 쉴 곳도 얻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거기에서 네 마음을 떨게 하고 눈을 쇠하게 하고 정신을 산란하게 하시리니

66  네 생명이 위험에 처하고 주야로 두려워하며 네 생명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

67  네 마음의 두려움과 눈이 보는 것으로 말미암아 아침에는 이르기를 아하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 할 것이요 저녁에는 이르기를 아하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리라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모든 혜택이 사라진다.

선택받았다는 자체가 은혜라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선택받았다는 것은 축복과 저주의 기로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주에 담겨있는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선택받았다는 자체가 은혜는 아니지만, 은혜의 문턱에 놓여져있다는 것이다

비록 육적인 생명은 위험에 처해있더라도, 영적인 생명은 새롭게 열리는 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상황이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상태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것이다.

인간이 가져야 할 참된 희망은 하나님과 단절된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된 존재 자체에 있는 것이다.


68  여호와께서 너를 배에 싣고 전에 네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가 다시는 그 길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시던 그 길로 너를 애굽으로 끌어 가실 것이라 거기서 너희가 너희 몸을 적군에게 남녀 종으로 팔려 하나 너희를 살 자가 없으리라


출애굽 이전의 애굽에서의 상황보다도 악화될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멸망은 이전에 애굽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던 구원을 반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애굽에서 간절히 바라던 구원에 대한 간구와는 다른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간구를 하게 될 것이다.

출애굽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백성의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오심은 가나안의 멸망과 더불어 더욱 겸손해진 이스라엘 백성의 차원이 다른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모세 언약은 아담 언약이 재연된 행위 언약인가?

신명기 28장은 축복과 저주라는 갈림길에선 이스라엘의 모습이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행위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에스콘디도Escondido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재연 교리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이 있으며,  재연 교리는 그의 후예들, 즉 존 페스코J. V. Fesko나 반드루넨David VanDrunen등, 웨스트민스터신학교WSCal의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집필된 The Law is Not Of Faith라는 책을 통하여 다시 제기된 주장이었다.

재연 교리republication doctrine는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으로 보는 이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왔으며, 정통장로교회OPC 소속의 일부 목회자들이 모여서 Merit and Mose라는 책을 통해 재연 교리에 대한 반론을 집중적으로  제기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여러가지 면에서 아담에게 주어졌던 명령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기 때문이었지만, 모세 언약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가나안에서의 상황은 여러가지 면에서 에덴과는 다르기에, 단순히 행위 언약의 재연이라는 주장은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메러디스 클라인은 모세 언약이 표면적으로는 행위 언약이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 언약에 속하여있다고 본다.

그런데도 메러디스 클라인의 재연 교리에 대한 반발이 줄지 않는 것은, 모세 언약을 아담 언약이 유형학적typological으로 재연된 행위 언약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 언약을 아담 언약의 유형학적 재연으로 보는 것은, 여러가지 유익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 번쯤은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에 모세 언약에서 행위 언약의 속성이 제거되고 오직 은혜 언약만으로 해석된다면,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속의 의미는 축소되거나 소멸되며, 성경의 중심이 신약의 교회보다는 구약의 이스라엘로 이동된다는 점에서 행위 언약의 개념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 된다.

칼 바르트는 오직 단일한 은혜 언약만을 주장했다.

또한 존 머리John Murrey도 마찬가지로 은혜 언약만을 주장하였다.

존 머리의 영향을 받은 노먼 쉐퍼드Norman Shepherd의 후예들로 구성된 페더럴비전Federal Vision은 결국 톰 라이트의 새관점과 유사한 모습을 갖추게된다.

비록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간단하게나마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을 비교하면서 개인적인 관점을 소개하고자한다.

먼저 아담 언약과 모세 언약의 비슷한 점들을 살펴본다.


비슷한 점들


●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다.

에덴은 아직 타락 이전이었기에,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지 않은 풍요로운 곳이었다.

●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놓여있다.

아담에게 요구되었된 선악과 금령은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에 놓여있던 것이었으며, 시내산과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었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은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을 제시한 것이었다.

●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원시복음이 제시되었다.

에덴에서 쫓겨난 후에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으로 제시되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원이 제시된다.

이스라엘에게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 구원자가 오실 것을 말씀하신다.

● 실행의 능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명령에 따른 축복과 저주가 제시되었다.

● 가나안은 에덴과 마찬가지로 검증을 요구하는 곳이다.



다른 점들


●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이지만, 에덴은 아직 안식에 이르지 못한 땅이었다.

에덴도 풍요로운 땅이었지만, 가나안의 풍요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공급하심에 의한 풍요였다.

● 에덴에서의 순종에 따른 축복은 종말론적 약속이었지만, 가나안에서의 축복은 한시적인 현재적 삶이었다.

● 가나안은 영원한 가나안의 모형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는 곳이었지만, 에덴은 영원한 가나안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예표하지는 않는다.

● 아담은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에,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이미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었기에, 명령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 아담 언약에서는 은혜의 요소가 내포되어있지 않지만, 모세 언약은 은혜의 요소를 직접적으로 내포한다.


결론적 생각들


● 가나안은 에덴보다도 한 단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가까웠으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다.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는 타락 이전의 상태라서, 은혜가 직접적으로 요구되지 않았지만, 이미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은혜가 임함으로서 가나안이라는 안식의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새관점의 주장과 같이, 가나안이 하나님의 안식의 땅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할 수 있었다고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간 것이다.

가나안은 안식의 땅으로 주어졌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준비된 백성이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 있고 삐뚤어진 세대로다(신32:5)”고 말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부족한 점과 문제점을 노출시켜서, 그 부분을 채우실 수 있는 그리스도를 예비해주는 역할을 한다.

가나안의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구원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구원에 참여될 수 있었다.


● 가나안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톰 라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개신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몸통으로 보지만, 새관점에서는 유대 이스라엘을 몸통으로 본다.

새관점에서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꼬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구약의 모든 역사와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서, 처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다.

성경의 핵심은 처음 아담과 둘째 아담이지만, 새관점에서는 처음 아담을 논하지 않기에, 둘째 아담의 개념이 상실되어있다.


● 가나안에서의 축복이 한시적이었던 것은, 가나안 자체가 안식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가나안에서 순종에 따른 또 다른 종말론적 안식의 땅이 제시된다면, 가나안은 안식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가나안의 안식은 종말론적 안식을 예표할 뿐이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을 이 땅에 실현된 실질적 안식의 땅으로보며, 종말론적 가나안을 현재적 안식의 땅과 동일시한다.

새관점에서는 가나안의 이스라엘을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로 본다.

새관점에서 보는 예수는, 유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유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분이시다.

새관점에서보는 교회는 확장된 유대 이스라엘이다.


● 모세 언약은 은혜 언약의 속성을 내포한 행위 언약이다.

모세 언약을 은혜 언약만으로 보기에는 조건적 행위가 분명하게 담겨있다.

모세 언약을 단일한 은혜 언약으로 보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귀결되는 모세 언약이라는 점을 들지만, 모세 언약 자체는 표면적으로는 분명하게 행위 언약에 속하여있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모세 언약을 지킬 수 없었기에, 즉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실질적으로 모세 언약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고,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 귀결되는 면에서 모세 언약이 은혜 언약이라고 말하는 점은 맞지만, 그리스도께 인도되지 못하는 이들은 모세 언약 안에서  저주를 받아야만 했기에 모세 언약은 본질에 있어서는 은혜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하더라도, 표면적 속성에 있어서는 행위 언약의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보아야한다.

모세 언약을 단일한 은혜 언약으로보는 이들은, 존 머레이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였던 노먼 쉐퍼드와 그의 후예들로 구성된 페더럴 비전과 톰 라이트의 새관점주의,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카이퍼의 신칼빈주의가 여기에 속하여있다고 볼 수 있다.

모세 언약의 행위 언약으로서의 속성은,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을 재연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기에,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없이는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모세 언약의 행위 언약적 속성을 간과하는 이들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을 배제함으로서, 이들의 신학 사상에는 결과적으로는 인본주의적 속성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새관점에서 주장하는 율법은 복과 저주의 갈림길인 행위 언약의 근거가 아니다.

이들은 모세 언약을 오직 은혜 언약의 속성만을 갖고 있는 언약적 율법주의로 본으로서, 율법을 일종의 생활 규법으로 격하시킨다.

이는 기독교를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이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기독교는 윤리를 넘어서는 복음이며, 복음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전제로 한다.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근거로하기에 인간의 행위에 대한 관점은 열매로서만 접근되어야한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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