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7. 12. 29. 13:00

예레미야 7장 12-18절 말씀 묵상

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5  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17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18  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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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피난처, 성소가 되신 영광스러운 보좌)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재앙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유다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펴실 것을 깨닫고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할 의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치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예비하고 계심을 깨닫고서,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있음을 찬양한다.


성소는 피난처, 안식의 개념을 포함하고있다.


태초부터 찬양 받으실 영광스러운 보좌는 유다 백성들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졌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궁극적인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다.


하지만 인간은 피난처, 성소, 안식이 되신 주님께 나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에 실질적으로 주 안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에, 권위자에 대하여 두려움이 앞설 수 밖에 없다.


권위자에 대한 두려움과 가까이하기 힘든 어려움은 전부 죄로 인하여 왜곡된 부정적 사고에서 나온다.


가까이 하기 힘들고, 어려운 것은, 마치 가인이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멀리 한 것과 같이, 자신의 죄에 대한 부담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권위자는 우리의 참된 안식이 되시며, 우리에게 평안을 제공해주시며, 우리의 위로와 힘이 되신다.


우리가 의지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예레미야와 같이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담감을 갖는 것은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섭게 권위적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스스로 두려워 할 뿐이다.


두려움과 불안, 공포, 스트레스, 외로움, 분리, 혼란들은 다 아담의 범죄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비록 체질은 아직 죄악된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신자는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자녀이기에,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온 죄의 속성으로부터 자유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릴 권리와 자격이 있으며,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주님을 찬양하면서, 주 안에서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3, 흙에 기록된 자들)


인생은 눈에 보기에 아무리 화려한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인생은 누구나 흙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를 기억했던 자들도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주를 떠난 인생들에게는, 사는 동안 품었던 수 많은 알들이 품에서 떠나고 더 이상 품은 자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인생의 참된 가치는 오직 하나님께 기억된 자로서, 영원한 안식이 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만 참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신자에게는 아담에게 순종의 조건으로 약속된 종말론적 축복과 영생을 누릴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허무한 인생들은 없어질 것을 위해서 살지만, 신자는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아가야할 것이다.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인생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위해서 문화 변혁 운동을 하며, 이 땅의 구속적 문화 변혁을 위해서 힘쓰는 인생들도, 그 문화가 더 이상 천국에서 보존되지 않는다면, 그 수고는 허무한 것이 될 것이다.


인생이 비록 임시적이고 짧은 기간을 살아가는 것이지만, 삶 가운데 문화물이 천국에서 보존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문화는 성도를 성화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데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14, 구원자께 의뢰하는 삶)


예레미야는 병들어 있는 자신이 치유받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병들어 있음을 보여주고있다.


인생은 연약하기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육신은 피폐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군다나 예레미야는 재앙의 저주를 선포하는 일을 맡았으니, 결코 쉽지않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이 없다면, 인생은 결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은 고통을 능가하는 것이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고침을 받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이 세상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고달픈 인생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안식은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것이다.



(15-16,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예레미야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충실하였지만 이로 인해서 좌절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위로가 없이는 인간은 낙담하게되어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위한 기도가 반드시 병행되어야만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17-18, 피난처가 되신 하나님)


예레미야의 기도는 마치 전쟁터에서 지원군의 도움을 요청하는 병사의 외침과 같다.


말씀을 소유한 성도는 이 세상과 전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성도의 삶에서 세상과의 싸움이 없다면 이들은 직무를 유기하는 자일 것이다.


모든 성도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가지고 있기에 말씀을 소유해야하고 또한 말씀을 선포해야만 할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전달받았지만, 모든 성도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28:19-20)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


말씀은 세상에 던지는 폭탄과 같아서 반드시 반격이 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은 전쟁터에서 군사를 보호해주시는 피난처가 되시며, 적군을 물리쳐주시는 힘이 되신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생각하며, 사는 날 동안 성도로서의 맡은바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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