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7. 12. 29. 12:50

예레미야 14장 13-22절 말씀 묵상


13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15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16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18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내가 성읍에 들어간즉 기근으로 병든 자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두루 다니도다

19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

20  여호와여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22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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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


거짓 선지자들은 다수이며, 이들은 백성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소수이며, 백성들이 듣기에 불편한 말이라도 있는 그대로 전해야만 한다.


모든 시대가 위기 상황이겠지만 특히 대한민국의 현재의 상황은 특별한 위기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과연 거짓을 말하는 지에 대하여 분별력을 가져야 할 때이다.


한국 교회의 부패상과 현실의 위기가 과연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기의 상황에서 특히 신자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지만, 백성들은 이를 분별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


(14, 거짓 선지자의 예언)


이 시대에 모든 신자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가지고있지만, 가시적 교회의 영역에서는 성직자에게만 선지자의 직책이 주어진다.


성도는 단지 성직자의 말을 듣고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어떠한 영역이든지 독점이 될 때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이 시대는 특히 성직자들의 거짓 선지자 역할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는 성직자의 역할에서 문제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선지자의 역할을 본인 스스로는 외면하고서 성직자에게 의존하는 성도들의 책임도 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두려워서 모세를 중재자로 선택하였듯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선포하기 보다는 책임을 회피하고 하나님과 말씀을 두려워 피하려고하는 경향에서 나온다.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아담의 후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만약에 성도들이 직접적으로 말씀을 소유하고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교회의 부패는 경험하지 않아도 됬을 것이다.


신학의 영역도 신학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많은 인본주의적 신학자들이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데로 말씀을 판단하여 해석하지만, 말씀은 인간적으로는 듣고 이해하기 힘들어도 말씀을 각색하거나 인간적인 관점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칼 바르트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성경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많은 부분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어떻게 30여년을 부인과 자식을 놔두고 여비서와 동거 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찔림이 없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붐을 일으키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경우는, 유대주의적 언약 해석으로 성경을 인간적인 관점과 인간적인 구도로 바꾸면서, 기독교를 유대교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그에게 예수는 구속주가 아니며 오히려 유대교적 삶의 새로운 본을 보여준 인물에 불과하다.


아담이 상실한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시키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누구나 스스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시대를 분별하면서 살아가야한다.


모든 성도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분별력을 가질 때 거짓 선지자나 거짓 신학자들이 둥지를 틀지 못할 것이다.


(15, 실제적 상황)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한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성경의 역사를 많은 부분 비현실적 원역사로 바꿈으로서 인간의 부정적 성품을 추상적이거나 낙관적으로 보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조심해야한다.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면서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지향하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낙관적인 견해를 조심해야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 지상적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새관점주의자들을 조심해야한다.


신학이 실종된 가운데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려는 거짓 목자들을 조심해야한다.


현 시대는 진리보다도 거짓이 다수를 차지하는 유다의 마지막과 너무도 유사한 시대다.



(16. 저주받기에 합당한 백성들)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 뿐만이 아니라 이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들도 재앙을 받기에 합당할 만큼 죄악에 빠져있었던 것을 본다.


말씀에서 보듯이 아무리 지도자들이 잘못을 했더라도 죄에 대해서는 본인 각자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현 시대에 아무리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잘못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듣길 원하는 것을 듣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17, 하나님의 슬픔)


인간은 저주를 미움의 대상과 연관시키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들을 저주할 수밖에 없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찢기는 아픈 심정을 나타내신다.


이는 사랑한다고 언약을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 언약을 근거로 한 행위 언약 안에 있었기에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고 하더라도, 언약에 대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행위 언약에 합당한 결과를 감당하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영벌에 처할 자들에 대한 그림자로서,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라도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해야만 하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당하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슬픔과 딜레마였음을 생각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미움으로 저주를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 스스로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듯이, 언약이라는 약속을 기반으로한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그리고 아브라함과 피의 언약을 맺으신 분으로서,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피흘림의 댓가를 치루셔야만 하는 아픈 마음을 간직하신 분이시다.


(19, 희망이 사라진 유다와 시온)


하나님의 저주는 나아짐을 위한 징계가 아니라 심판에 의한 정죄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행위 언약 안에서 약속을 맹세한 백성이기에 불순종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만 한다.


징계하고 평강을 준다면, 그리고 치료한다면, 이는 정죄가 아니라 나아짐을 바라는 채찍이고 언약의 실행이 아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언약 백성으로서 약속에 대한 결과이기에 선지자가 감당하라고 선언한 대로 재앙을 감당해야만 했다.



(20-22,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모든 상황은 죄를 죄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의 댓가를 치러야만 하며, 하나님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기 위해서 저주를 내리셔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의 죄악에 합당한 댓가를 치루어야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친히 감당시키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저주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찢어놓는 행위인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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