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4장 1-12절 말씀 묵상
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3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6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9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11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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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가뭄의 징계)
유대인들은 가뭄의 재앙이 분명한 하나님의 표현임을 알면서도 끝까지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인간의 심성을 보여주고있다.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강퍅한 마음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의 심성이 어떠한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도 그러했겠지만, 특히 현대인들은 자연의 재앙을 좀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연계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모든 현상을 과학이라는 지식에 의해서 분석을 하지만, 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고하더라도 과학은 현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현대에 들어와서 기상이변은 물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과학은 현상을 설명해주지 결코 원인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기상 이변을 통해서 말씀을 하셨다.
신약에 들어와서 기상이변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고만 결론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할 여지가 많이있다.
기상 이변이 단지 인간의 문명의 발달에 의한 후유증 차원에서만 해석이 가능할까?
과학이 인간에게 주는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기도한다.
(7, 예레미아의 기도)
예레미아는 본인 스스로가 죄악에 대한 고백을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이 마땅한 형벌임을 인정하고있다.
예레미아는 형벌을 없애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마땅한 형벌임을 고백하고있는데, 이는 죄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레미아는 그냥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외아들 그리스도에게 친히 담당시키심으로서 형벌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8. 이스라엘의 소망이었으나 마음이 떠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그네와 같이 잠시 머무시다가 떠나신다는 표현은, 표면적으로는 떠나시는 것 같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떠남이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생각하는 세상적인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실 참된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신다.
교회나 신앙생활의 차원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일 때 하나님은 소망이 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이 신자가 바라는 참 소망과 구원자되심은 오직 인간의 근원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9, 하나님은 놀란 자와 같거나 무력하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슈퍼스타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세속적 욕구를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신들의 인간적 욕구를 채워주시는 차원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렸다.
하나님께서는 타협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타협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의에 의한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으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시며,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를 담당하시도록 하셨다.
인간의 참된 구원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죄악이 드러나고 고발되어야만 한다.
(10, 정죄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신다.
인간의 죄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상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변명을 할 수가 없다.
유대인들의 마지막은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마음에서 하나님과 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있다.
(11, 백성을 위해서 구하는 복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문제는 항상 근원적으로 접근해야한다.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급한 것 위주로 해결할 경우 문제는 반복된다.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을 위해서는 현재의 부정적 상황을 직면해야할 필요가 있다.
(12, 중심에서의 회개가 아니기 때문에 응답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그냥 때를 쓴다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근원적이고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해결책을 원하신다.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 하실 수 있는 문제이다.
(결론)
모든 어려움은 우리에게 단순히 어려움을 극복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려움의 근원에는 우리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가 내포되어있다.
참된 신앙은 현상을 쫓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근원이 어떠한 지를 알고서 하나님과 본질적인 관계 회복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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