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7. 12. 29. 12:31

예레미야 8장18절- 9장 6절 말씀 묵상

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19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20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2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4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5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6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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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절)

여자는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있으며, 결혼 후에는 남편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


유다 백성을 딸로 표현하는 것은 보호받아야 할 백성이 보호 받지 못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보호자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할 때 임하는 여자의 고통이 담겨있다.


유다 백성의 지도자가 책임을 인식하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역자들에게도 많은 책임감이 요구된다.


(1절)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로서 상가에서의 고통과 같은 심정을 느끼는 예레미아 선지자의 모습을 본다.


우리의 상황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


하지만 주변을 보는 심정은 항상 예레미아 선지자와 같은 심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할 것이다.


(2절)

떠나고 싶은 심정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문제는 보고 싶지 않아도, 누구나 하나님의 자연법 아래에 있기에,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알고있다.


(3절)

혀로는 마음에 가득한 것이 나올 수밖에 없지만, 이들은 자신의 거짓말로 부와 권력을 누릴 것이다.


누구나 말만 잘하면 이 세상에서 많은 이득을 누릴 수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혀에 묶임으로 인해서, 악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거짓을 남발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지만, 표면적인 부요함 뒤의 내면의 빈곤을 숨기면서, 혀로 뿌린 악을 합리화 시키기 위한 또 다른 악을 저지를 뿐이다.


하나님을 말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겠지만,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게 악용 할 뿐이다.


(4-5절)

사람에게 마음을 두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며, 가진 자들을 조심해야하는 이유다.


가진 자는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거짓된 혀를 남발하며, 친구를 속이고, 결국에는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6절)

속이는 자들 가운데 거하는 예레미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속임 가운데 운영되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 아래 거하는 이들인데도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인 우리들은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이는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보기보다는, 율법이 일반 은총의 여이역에 속하여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자연법이라는 일반 은총의 기반 위에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거부하고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우상숭배라는 악이 비록 세상의 기준으로는 악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심각한 악이다.


하나님이 가장 큰 근심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때, 예레미아 선지자가 거할 수 있는 광야를 찾았듯이, 하나님께 속한 이들은 이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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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29

예레미야 8장 4-17절 말씀 묵상

4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6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7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8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9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10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11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12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14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 들어가서 거기에서 멸망하자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멸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심이니라

15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

16  그 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준마들이 우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이르러 이 땅과 그 소유와 성읍과 그 중의 주민을 삼켰도다

17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가운데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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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절, 하나님의 바램과 인간의 현실)


온갖 가증한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회복을 희망하시나, 죄인인 당사자들은 회복을 바라지 않는다.


이러한 자존심은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죄인으로서의 속성 가운데 한 가지로서, 회복에 대한 인간의 발목을 잡는다.


자존심은 아담과 같이, 자신의 실상을 보고싶지 하지 않는데서 연유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하나님의 간섭하심 앞에 자존심을 내려놓을 때 다가올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은, 죄를 직면하게되기에, 비록 인간에게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이것이 진정한 축복의 통로임을 인식해야한다.


대부분의 현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는 하나님을 배제한데서 연유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마음에 있는 양심이라는 자연법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문제를 직면하고 싶지 않기에,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현대 사회는 하나님을 떠난 악의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해결책을 제시해 줌으로서 더욱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부추긴다.



(7절. 규례와 자연법을 떠난 죄인들)


자연법은, 비록 속성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과 동물들 모두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이미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여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규례는 구체화된 자연법으로서, 인간이 규례를 떠난다고 할지라도, 규례를 떠난 인간의 모습은 결국 자연법을 통해서 실상이 드러나게 되어있다.



(8,9절- 지혜의 근원된 말씀)


유대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은 지혜가 아니라 하나의 지식에 불과했다.


그들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율법은 행할 능력이 없는 머리에만 남아있는 지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행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현대 사회는 지혜로운 사회가 아니라 지식이 넘치는 사회다.


지식이 많은 이들은 자신이 지혜롭다는 착각을 하게된다.


지식은 인간 머리에서 나오는 생각을 강화할 뿐이지만,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지식이 많은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교만해진다.


지식은 과학적이지만 지혜는 과학과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의 말씀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이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다.


오직 지혜를 가진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교만한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과학적 지식이나 인간 중심의 실존적 사고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재단하려고 한다.


유신론적 진화론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지식으로 재단한데서 나온 결과이다.


오히려 증명되지 않은 진화를 가지고 진리를 대체한다.


하자가 있는 지식은 진리가 될 수도 없고 더군다나 과학적이지도 않다.


유신론적 진화론 뿐만이 아니라 칼 바르트와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식의 코드로 풀어내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결과물물은 인간의 지식 코드에는 잘 맞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지혜로운 생명력은 상실 될 수 밖에 없다.


이와같이 지식의 코트로 무장한 이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을 쉽게 난도질 하면서, 자신들은 옳은 일을 하는 정의의 사도라는 자부심으로, 스스로 교만해지기도한다.


지혜가 없는 지식은, 진리의 생명력을 파괴하는 부작용만 양산할 뿐이다.


이들의 종국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며, 자신들이 쌓은 교만으로 인하여 스스로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서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 이들은 결국 황폐하여 질 것이다.


지혜있는 자는 지식의 높은 자리에 앉을 때 더욱 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한다.



(11-12절, 악을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고 거짓말을 한다)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에게는 책임감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지도층 인사들에게 말씀하시고 계신다.


가증한 일을 행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의 모습은, 이 시대의 교회 가운데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설교시간에 수 많은 가식과 위선 그리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아무 문제 의식을 못 느낀다.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의 영혼의 잘됨을 위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성도들이 상처를 받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씀을 왜곡 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들은 이러한 일들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승리자 의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이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기만하다.



(13-17. 재앙만을 걱정하며 문제의 근원을 생각하려하지 않음)


부정적 상황을 허락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 주신 은혜를 거두어 가실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정적 상황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지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께 잘못 한 것을 알고있지만,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환경의 재앙이나 여러가지 현상들에 대해서, 오직 과학으로만 풀어 가려고 한다.


기상 이변으로 작황이 안 좋으면 수입을 하면되고,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하려고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과 능력에 제한 받으시는  분은 아니시다.


한 가지를 해결하면, 그 보다 더 많은 여러가지의 재앙을 허락하신다.


마지막 때에는 재앙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더욱 많이 듣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방책을 구하여도 결코 하나님의 진노에서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함께 한 연약한 이들을 위해서 오래 참으실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실오라기 하나라도 감출 수가 없으며, 심지어는 마음 속의 어떠한 생각도 숨길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시고도 오래 참으실 뿐이다.


이 모든 것을 알 때 어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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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27

예레미아 7장 29절- 8장 3절

29  너의 머리털을 베어 버리고 벗은 산 위에서 통곡할지어다 여호와께서 그 노하신 바 이 세대를 끊어 버리셨음이라

3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눈 앞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31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들의 자녀들을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령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하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3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날이 이르면 이 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말하지 아니하고 죽임의 골짜기라 말하리니 이는 도벳에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했기 때문이니라

33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34  그 때에 내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가 끊어지게 하리니 땅이 황폐하리라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2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3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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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의 가증한 것)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가증한 것은 주로 우상 숭배들에 대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표면적으로나마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명확한 우상숭배하지 않는 것일까?


오늘날의 사람들은 도벳에서의 이스라엘의 행위와 같이 가증한 것을 행하지 않는가?


더 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이라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오늘날의 보편적인 사람들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심겨 놓으신 자연법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율법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저주와 심판이 예고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인류도 마찬가지로 자연법 앞에서 저주와 심판이 예고되어있다.


율법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분명한 배교행위로 드러났지만, 자연법 앞에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등진 문명의 발달로 하나님을 등지고 있다.


이 세대는 이스라엘 백성들 못지 않게 하나님을 배제하는 악한 세대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문명의 발달 이면에는 분명하게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기 보다는 인간 스스로 해결해보자는 독립적인 마음이 깔려있다.


문명은 정죄를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면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고 정죄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아담도 범죄하고서 하나님을 피하였듯이, 아담의 후손인 가인도 아벨을 죽이고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미를 지닌 에녹, 즉 개벽을 뜻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 선언을 하였다.


한 세기전 서구 사회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대량 생산한 물건을 팔 시장을 확보하고자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렸다.


산업화된 나라들은 수 많은 나라들의 주권을 강탈하고, 수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면서도, 그저 자신들의 이익만 증가되면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산업혁명에 뒤늦게 동참한 독일과 일본은 다른 나라들이 이미 식민지를 다 차지하고있었기에, 자신들도 시장을 확보하고자 전쟁을 일으키게되었다.


현대 사회는 시장 경제가 사회를 이끈다.


시장 경제에서의 진리는 이익이다.


현대 사회는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낼 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스라엘에서는 도벳에서의 가증함이 제한적으로 드러났지만, 제1,2차 세계대전은 하나님을 등지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먹이 쟁탈전을 벌이는 전 세계적인 살욕의 현장이었고, 전 세계를 죽임의 골짜기인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로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이는 아직도 여러가지 형태로 우리의 경제 활동의 기준이 되어버렸다.


제 1, 2차 대전 후에 전 세계적인 무역의 발달과 첨단문명을 발전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이들이 승리를 외치는 소리다.


이제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에 까지 새롭게 둥지를 틀고있다.


모두가 이 골짜기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곳은 영혼을 파멸로 몰아가는 게헨나가 될 뿐이다


힌놈의 골짜기는 죽이는 자들이 죽는 곳이 되었듯이, 문명의 발전은 모두에게 죽음의 골짜기가 될 수밖에 없다.


삶의 환경에서 부딪히는 재앙들은 대부분이 힌놈의 골짜기를 만든 인간의 작품들이다.


도벳에서 어린 아이들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이들은 결코 자신들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악행인지에 대하여 무지할 뿐이다.


도벳과는 다르지만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온갖 악행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얼마나 가증한 것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교회 안에 있는 이들 가운데 비판하는 소리를 하는 이들을 쫓아내고서, 자신들은 남겨진 기드온 용사들이라 선포하는 교회도 있다,


말씀이 무덤에 덧입혀진 회가 되어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교회마져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가증한 것이라도 쉽게 수용해버리고 만다.


결국 교회의 몰락은 죽이는 자의 죽음과 같이, 스스로 파놓은 골짜기에 묻혀버리는 것이다.


교회의 몰락은 희망의 상실이며, 세상에서 난도질 당한 이들에게 위안을 제공하지 못한다.


마지막 때에는 교회의 부패로 말미암아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 마저도 쫓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저주하시는 분이 아니고 살리시는 분으로서 산자의 하나님이시다.


사람들의 부정적 상황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 결과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고발 당하는 인생들에게 유일한 희망이 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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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25

예레미야 7장 16-28절 말씀 묵상

16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7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

18  자식들은 나무를 줍고 아버지들은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가루를 반죽하여 하늘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만들며 그들이 또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나의 노를 일으키느니라

1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나를 격노하게 함이냐 자기 얼굴에 부끄러움을 자취함이 아니냐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노를 이 곳과 사람과 짐승과 들나무와 땅의 소산에 부으리니 불 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22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24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25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26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27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

28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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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숭배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하나님)


불순종은 다름 신에게 종속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종이든지, 아니면 사단의 종이다.


불순종의 문제는 아담에게서와 같이 처음에는 유혹, 그리고 그 다음 결과는 다른 신에게 종속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순종은, 우선 광야에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그 다음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가운데, 성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희생 제사로 드린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성경 구절이 없다면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의를 거부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광야에서 금식 하신 후에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서, 율법의 요구인 완전한 순종을 이루신 것이다.


예레미아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이미 유혹받은 자로서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에덴에서 불순종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결과적으로는 사단에게 종속되는 행동을 보여줄 수 밖에 없다.


예레미아서에서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는, 유혹받아 사단의 종노릇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가 어떠한 지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이, 오직 은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만하는 인생임을 가르쳐준다.



(순종은 들음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관심은 순종이다(24, 26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이 없었기에 순종을 기대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었기에,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소견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데서 오는 결정은 불순종일 뿐이고 악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듣는데서 오는 순종이었다.


불순종하는 이들의 마음에 가득한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마음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다.


현대 첨단 문명의 기기들을 통하여 제공해주는 지식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준다.


첨단기기가 삶을 윤택하게해주는 것과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더 많은 불순종의 기회를 제공해주기도한다.


도구 자체가 악은 아닐지라도 악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인간이 쉽게 스마트 폰에 중독된다는 것도, 스마트 폰의 기능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인간들에게 우상 숭배의 길을 열어주고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마음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첨단 기기에 의해서 더욱 활성화되고 있다.


인간이 개발한 첨단 문명은,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제공해주고있다.



(부정적 상황들은 하나님을 외면한 결과에서 온다)


고도의 문명을 자랑하며,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서, 최고의 지성이라 자는 이들이 가득한 현대인들도 우매하기는 마찬가지다.


현대의 삶의 환경 가운데서 발생하는 부정적 상황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라고 말하는 이들이 없다.


모든 부정적 상황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설명되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부정적 상황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을 외면한 결과에서 온다고 말하는 이들이 없다. (20절)


인간은 자신이 인식을 하지 못하더라도 악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유다 백성들이 조상들보다도 더욱 악을 행한 것과 같이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의 심도를 더해가게 되어있다.


문명의 발전은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방향으로 가게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우상 숭배하는 이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결코 낙관적일 수 없다.


내어버려진 이스라엘의 종국과 같이, 하나님께서 내어버려둔 현대인들에게 임할 종국은 악마적이고 파괴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순종하지도 않고 교훈을 받지 아니하려는 민족에게 외치는 말씀은 심판에 대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에게는 부정적 상황의 위협이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표시라고 보아야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어쩔 수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부터 길이 열리게 되어있다.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에는 인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현대 문명은 창조적 발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에 절대적 영향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이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고 간구도 하지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시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은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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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2:23

예레미야 7장 1-15절 말씀묵상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4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5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6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7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8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9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10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11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1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15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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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 종교가 아니지만 윤리는 열매로서 중요하다)


행위의 열매가 없는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하신다(3절).


이들이 길과 행위에 있어서 바르지 못한 것은 이들에게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알아도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능력이 없는 죽은 자임을 증명해 줄 뿐이다.


행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윤리를 말한다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행함의 열매가 없는 것은, 이들이 참된 기독교인들이 아님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또한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사망의 몸에서 자유 할 수 없음을 증명해 줌으로서, 성도를 더욱 겸손케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여호와의 말씀은, 이들의 길과 행위가 정도를 넘어서고 있음에 대한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인들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근원적으로 그들의 잘못된 신앙에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인간을 윤리적으로 만들기 이전에, 인간은 이미 윤리적으로 실패한 존재이라는 것을 고발함으로서,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새관점에서는 윤리에 기초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말하지만, 인간에게는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을 능력도 없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볼 수 있는 행실의 문제는 기독교인 들에게도 같을 수 밖에 없다.


차이가 있다면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에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제시되어있다는 것이다.


또한 죄의 문제를 해결받은 신자에게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성화의 과정이 요구된다.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인간이 이를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성전이라는 하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신다.


이는 성전에 예배드리러 오는 이들에게 충격적인 말로서, 이보다 더 큰 충격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성전에 올라오는 이들이, 자신들이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성전에 있지않고 성전에 예배드리러 오는 이들에게 있다.


오늘의 많은 교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용하여 거짓말을 하고있다.


가장 대표적인 거짓말은 교회를 성전이라고하면서 교회당을 신성한 곳으로 만들고서, 목회자만이 제사장인것과 같이 행하고,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갖다붙이면서 예배당 건축을 독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개인의 문제 이전에 목회자 전체의 문제인 것은, 이러한 용어 사용에 대해서 교단 차원에서는 전혀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교회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책임은 공동체적으로 있기에, 어느 누구도 자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도,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거짓말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말이 보편화되어있고, 우매한 성도들에게는 먹혀들어간다는 것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다.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하여 선언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재앙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목회자는 전부 거짓 목회자라고 보면 틀림이없다.


이러한 이들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악한 이들이다.


기독교는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의 의와 욕심을 이루기 위한 종교가 아니다.



(가나안- 영원 무궁토록 준 땅)


가나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의 조건은 말씀의 순종과 이에 따른 행위이다.


가나안은 에덴에서와 마찬가지로 행위 언약 아래 있다.


아담이 불순종으로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는 불순종의 결과였다.


불순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가난한 자, 즉 이방인, 고아, 과부, 무죄한 자들을 압제하는 일은 긍휼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종노릇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에덴과 가나안은 은혜 이전에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곳이다.



(도둑의 소굴이 된 성전)


성전이 도둑의 소굴이 된 상황은 한국의 교회들과 너무나 유사하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 역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는 교회가 외적인 건물과 조직 위주로 형성되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현상들이다.


참된 교회는 성도들 가운데 있는 무형의 교회이지 외적인 성전이 아니다.


성전을 강조하는 것은 건물과 조직에 권위를 부여함으로서 자신들의 이익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교회의 중심은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외적인 조직으로서의 규모를 추구하게되면 이곳에서는 세상의 온갖 악들은 다 나타나게되어있다.


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이익을 위해서, 욕심을 위해서, 세상 복을 위해서…...


교회는 외적인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 가운데 임한 성령이 내주하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그나마 이러한 일들을 줄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인간이 구원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오직 은혜만 있을 뿐이다.



(실로- 하나님의 생명 나무가 심겨졌으나 인간은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실로는 쫓겨난 아담에게 생명나무의 길이 차단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실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도, 하나님께 순종 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었던 곳이다.


실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외적인 자부심으로, 내적인 빈곤을 경험하였던 곳이다.


실로에서의 패망은,  인간의 욕심을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부적과 같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욕심으로 대체한 결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실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고, 혹은 쓰임을 받았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실로는 자신이 쓰임 받고 언제나 버림받을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겸손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곳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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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17. 12. 29. 11:25
예레미야  6장 16-30절 말씀 묵상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17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18  그러므로 너희 나라들아 들으라 무리들아 그들이 당할 일을 알라

19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율법을 거절하였음이니라

20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

2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장애물을 두리니 아버지와 아들들이 함께 거기에 걸려 넘어지며 이웃과 그의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

2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23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사랑이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처럼 포효하는 소리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 같이 다 대열을 벌이고 시온의 딸인 너를 치려 하느니라 하시도다

24  우리가 그 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그 아픔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25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다니지 말라 원수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라

26  딸 내 백성이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구르며 독자를 잃음 같이 슬퍼하며 통곡할지어다 멸망시킬 자가 갑자기 우리에게 올 것임이라

27  내가 이미 너를 내 백성 중에 망대와 요새로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28  그들은 다 심히 반역한 자며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

29  풀무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나니

30  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이라 부르게 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렸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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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율법을 거절함을 인한 것이다)

재앙의 일차적 원인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에 하나님께서 내어버리신 것과 같이 내어버린 자의 마땅한 운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 즉 하나님과 분리가 된 이들이다.

이미 죽은 자들은 순종을 할 수가 없다.

율법은 순종의 요구를 통해서 인간들이 순종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할 따름이다.

순종할 수 없는 하나님과 분리되어있는 인간들에게 임하는 재앙은 저주라는 개념보다는 마땅한 결과물일 따름이다.

저주라는 말은 잘 될 수 있는데 잘못되는 것에 적용되지만 인간은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다가오는 재앙은 저주가 아니라 마땅한 결과일 따름이다.

구원이 은혜가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받을 자격이 없는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불순종하여 에덴에서 쫓겨났었듯이, 하나님 말씀을 들르려고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현재적 상황도 마찬가지다.

헬조선이란 수식어가 붙은 N포시대의 부정적 상황은 누구를 원망하기 전에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서 자신이 삶의 주체가 된 시대적 상황의 결과물이다.

이스라엘의 완고함은, 멸망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길이 열려졌었듯이,
헬조선과 N포시대의 상황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표이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

많은 교회에서 수 없이 많은 예배가 드려지고 있지만 정작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고, 제대로 말씀을 들으려고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맞춤형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리가 없다.

자신들만의 화려함에 도취된 스스로를 속이는 예배일 뿐이다.

예배에는 희생의 개념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에서 희생되신 것과 같이 자신의 의를 세우거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복적인 예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순종하심과 같이 순종을 통하여 자신을 죽여나가는 희생적 예배가 하나님께서기뻐 받으시는 예배일 것이다.


(부정적 상황의 원인들)

핵 문제와 전쟁의 위협 가운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부정적 상황의 원인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으려는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일반은총의 축복은 구원의 특별은총을 위한 것이다.

성도들이 받는 육적인 축복이 구원의 은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일반 은총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축복을 저주로 변질시키는 교회들의 심각성은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마치 술을 마시면서 취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세상의 위협은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를 죽일 뿐이지만, 교회의 부패는 아담 안에서 죽은 영혼을 살리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력화시킴으로, 영혼과 육체를 죽이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목회자가 문둥병자와 같이 아무 감각도 없이 강대상을 더럽히고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여호와께서 내버린 은)

사람들이 내버린 은이라 부르는 것이나 사회에서 온갖 욕이란 욕은 다 갖다 붙여서 기독교에 대한 비방을 하는 것이나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회로 부터 욕을 먹는 다는 것은 일반은총의 영역에 속해있는 율법과 같은 사회법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상식을 무시하고 자연법을 자키지 않는 교회의 현실이 사회에서조차도 아무짝에 쓸모없는 사회의 걱정거리가 되고있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을 대표하고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실상은 바로 우리의 실상이기에 이스라엘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이 되어야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여주시옵소서.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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