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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9 :: 예레미야 15장 1-9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4장 13-22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4장 1-12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3장 20-27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3장 12-19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3장 1-11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2장 7-17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 2017.12.29 :: 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예레미야 15장 1-9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
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8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파멸시킬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게 하였으며
9 일곱을 낳은 여인에게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아직도 대낮에 그의 해가 떨어져서 그에게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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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어떻게 사랑하신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백성을 멸망의 재앙으로 몰아넣으실 수가 있으신지 항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반드시 실행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마음에서는 사랑하시고 아끼시지만, 순종을 요구하는 행위 언약에 의해서, 불순종한 백성에게 이미 내려진 결정을 집행하셔야만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불순종에 대한 저주의 결정을 내리셔야만 했다.
시내산 언약에 순종 할 것을 맹세로 화답한 이스라엘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죽어야만 했고, 가나안에서 추방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담이 에덴에서 불순종 한 후에 에덴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상황과 유사하다.
이러한 상황의 형태학적 유사성은,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나게하셔서,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순종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순종의 문제를 감당하실 것을 예표하기 위한 것이다.
(2-3, 피할 수 없는 불순종의 댓가들)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결정은 공의에 의한 것이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선하다고 할 수 없다.
불순종의 죄값은 반드시 치뤄져야만 한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예외없이,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순종의 의를 이룰 수가 없기에 죽어야만 한다.
불순종한 유대인들에게 내려진 죽음과 칼과 기근과 포로는, 피할 수 없는 결정으로서, 공의의 하나님이시면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감당하시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야만 하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 될 수가 있었고, 하나님의 눈물과 사랑의 표현이며, 신자에게 전가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공의에 대한 손상이 없이 죄인을 구원하실 수가 있으셨다.
하지만 최근에 붐을 일으키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있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말하는 의의 근거는, 재판장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일방적인 결정으로서, 누군가의 보상이나 대신 값을 치룸이 없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선언을 근거로 한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의를 위해서 대신 누군가 죄값을 치를 필요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인정하지 않는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재판장의 일방적인 용서이기에, 죄인이 의를 위해서 믿음이 필요하지가 않다.
하지만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이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주어야하기에, 최종적 구원을 위해서 행위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최종적 구원을 이루기 위한 행위의 기준이 정해져있지 않기에, 어느 누구도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는, 죄인이 재판장의 일방적인 선언에 의하여 의롭다고 선언되고, 타락한 아담과 그 후손의 죄의 문제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잠정적으로 해결되었다고보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공의의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은, 의에 대한 성부의 공의적 속성을 변질시키며, 성자의 구속 사역을 부정하며, 성령의 구속적 창조 사역을 무력화시키며,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부정하기에, 삼위일체 개념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범주를 벗어나는 다분히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논리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이 각광받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유대인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이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이들은 유대의 거짓 선지자들과 같이, 기독교에 가만히 들어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무력화시키기에, 새관점에 대하여 아무 생각없이 단편적인 개념을 가지고, 유행처럼 합류하는 것은 심각하게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공의로 집행할 불순종에 대한 댓가를 분명하게 감당할 것을 선언하라고 명령하신다.
톰 라이트의 새관점에서 거짓말하는 것과 같이, 아무런 댓가의 지불도 없이, 일방적인 용서는 있을 수가 없다.
(4, 므낫세의 죄악)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가득 찰 때, 이스라엘을 통해서 아모리 족속을 멸하게 하신다.
가나안의 죄악에 대한 징벌의 도구로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이다.
하지만 유다 왕 므낫세는 이스라엘 성전에서 아모리 족속이 범한 악행보다도 더욱 심한 악행을 행하게 하여 유다로 하여금 아모리 족속보다도 더 심각한 범죄를 하게한다.
비록 그가 말년에 회개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성전에 들여온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들은 유다의 말년까지 지속된다.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에 대한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힘들어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강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
므낫세가 성전에 도입한 가증한 것들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유다로하여금 불순종이 고착화되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한 유다를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수가 없으시기에,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 내신 것과 같이, 유다를 가나안 밖으로 흩어버리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고, 신약 교회의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체질을 가지고 있기에, 유대 성전에서의 부패와 같이, 가시적 교회의 부패는 돌이키는 것이 쉽지 않고, 개혁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일단 잘못된 길에 들어선 교회는 부패되고 붕괴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참된 성도는 교회에서 투쟁하기보다는 주님의 교회를 새롭게 세워나아가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 가운데 한 가지 일 것이다.
(5, 여호와의 이름을 짓밟은 므낫세의 악행의 결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언약을 맺으시며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루살렘은 다윗성이 있었던 곳으로 성전의 근거지가 된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과의 평화의 기초가 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시온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도성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야 되는 곳이다.
므낫세는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의 성전에 온갖 이방신을 위한 제단을 쌓고서 그곳에서 하나님보시기에 가증한 일들을 행하였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증한 일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 시대에도 많은 목회자들이, 외형적 교회의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면서, 온갖 세상적인 방식은 다 도입시키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예루살렘 거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저주를 피 할 수 없었듯이, 목회자의 잘못 이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이용하는 일에 동참하는 교인들의 잘못도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6, 아담의 후손이 가야 할 길)
유대인들의 악행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절히 말씀하시면서 돌이키기를 원하셨는데도 자기의 길을 걸어갈 것을 스스로 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죄성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시고 계신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드러나는 죄악들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증거해주고 있는 것이다.
(7, 불순종에 합당한 징벌)
더 이상 열매맺지 못하는 이들을 흩어 버리실 수 밖에 없는 것은, 모든 책임이 인간의 전적인 부패에 있기에, 공의에 의한 하나님의 정당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한 가닥 회개할 희망까지도 기대하셨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질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흩어짐은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 언약을 근거로하기에, 어느 누구도 불평도 할 자격이 없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린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유대인들의 범죄에 마찬가지로 참여한 자들이다.
우리가 이 시대를 평안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설령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을 원망할 근거가 전혀없다.
(8-9, 불평할 수 없는 죄인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자격은 인간에게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유대인에게 임한 재앙과 같이, 이미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모두 다 재앙 가운데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이나마 평안을 누리는 것은 일반은총에 의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사람들은 세상의 부정적 상황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 하지만, 문제는 부정적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표출하는 인간의 잘못된 사고 방식이다.
모든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이기에, 전혀 기대할 것이 없는 인간들이다.
이 세상은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세상이다.
그나마 이 세상이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은, 구원 할 자를 구원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반은혜를 근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단지 누릴 수 있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뿐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이미 하나님의 형벌 안에 있다.
사형을 기다리는 자는 아직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할 뿐이지, 그 이 상의 것을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마지막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자 일반 은총을 베푸신다.
인간은 그 은혜에 감사할 자격만 주어졌을 뿐이지 불평할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
부정적 상황은, 인간에 내재해있는 죄를 고발함으로서, 죄인들로하여금 하나님께 나오도록하는 수단이 되어야한다.
부정적 상황에 대한 불평의 내면에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기에, 자칫 신자들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상황을 유발 시킬 수가 있다.
신자는 부정적 상황에 대한 불평을 함으로서 멸망할 자들의 계략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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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4장 13-22절 말씀 묵상
13 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15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16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18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내가 성읍에 들어간즉 기근으로 병든 자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두루 다니도다
19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
20 여호와여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22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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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
거짓 선지자들은 다수이며, 이들은 백성들이 듣기 좋은 말만 한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소수이며, 백성들이 듣기에 불편한 말이라도 있는 그대로 전해야만 한다.
모든 시대가 위기 상황이겠지만 특히 대한민국의 현재의 상황은 특별한 위기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 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과연 거짓을 말하는 지에 대하여 분별력을 가져야 할 때이다.
한국 교회의 부패상과 현실의 위기가 과연 연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기의 상황에서 특히 신자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시지만, 백성들은 이를 분별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
(14, 거짓 선지자의 예언)
이 시대에 모든 신자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가지고있지만, 가시적 교회의 영역에서는 성직자에게만 선지자의 직책이 주어진다.
성도는 단지 성직자의 말을 듣고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어떠한 영역이든지 독점이 될 때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이 시대는 특히 성직자들의 거짓 선지자 역할로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는 성직자의 역할에서 문제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선지자의 역할을 본인 스스로는 외면하고서 성직자에게 의존하는 성도들의 책임도 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두려워서 모세를 중재자로 선택하였듯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선포하기 보다는 책임을 회피하고 하나님과 말씀을 두려워 피하려고하는 경향에서 나온다.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아담의 후손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만약에 성도들이 직접적으로 말씀을 소유하고서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면, 오늘과 같은 교회의 부패는 경험하지 않아도 됬을 것이다.
신학의 영역도 신학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많은 인본주의적 신학자들이 사람들이 듣기에 좋은데로 말씀을 판단하여 해석하지만, 말씀은 인간적으로는 듣고 이해하기 힘들어도 말씀을 각색하거나 인간적인 관점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칼 바르트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성경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많은 부분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어떻게 30여년을 부인과 자식을 놔두고 여비서와 동거 생활을 하면서 마음의 찔림이 없이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붐을 일으키는 톰 라이트의 새관점의 경우는, 유대주의적 언약 해석으로 성경을 인간적인 관점과 인간적인 구도로 바꾸면서, 기독교를 유대교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있다.
그에게 예수는 구속주가 아니며 오히려 유대교적 삶의 새로운 본을 보여준 인물에 불과하다.
아담이 상실한 3중직, 즉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시키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누구나 스스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시대를 분별하면서 살아가야한다.
모든 성도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분별력을 가질 때 거짓 선지자나 거짓 신학자들이 둥지를 틀지 못할 것이다.
(15, 실제적 상황)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한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성경의 역사를 많은 부분 비현실적 원역사로 바꿈으로서 인간의 부정적 성품을 추상적이거나 낙관적으로 보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조심해야한다.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면서 문화물의 천국보존을 지향하는 문화칼빈주의자들의 낙관적인 견해를 조심해야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 지상적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는 새관점주의자들을 조심해야한다.
신학이 실종된 가운데 말씀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려는 거짓 목자들을 조심해야한다.
현 시대는 진리보다도 거짓이 다수를 차지하는 유다의 마지막과 너무도 유사한 시대다.
(16. 저주받기에 합당한 백성들)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 뿐만이 아니라 이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들도 재앙을 받기에 합당할 만큼 죄악에 빠져있었던 것을 본다.
말씀에서 보듯이 아무리 지도자들이 잘못을 했더라도 죄에 대해서는 본인 각자가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현 시대에 아무리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잘못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듣길 원하는 것을 듣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17, 하나님의 슬픔)
인간은 저주를 미움의 대상과 연관시키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이들을 저주할 수밖에 없음으로 인하여 마음이 찢기는 아픈 심정을 나타내신다.
이는 사랑한다고 언약을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 언약을 근거로 한 행위 언약 안에 있었기에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고 하더라도, 언약에 대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행위 언약에 합당한 결과를 감당하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될 영벌에 처할 자들에 대한 그림자로서,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라도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해야만 하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당하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슬픔과 딜레마였음을 생각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미움으로 저주를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 스스로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셨듯이, 언약이라는 약속을 기반으로한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자로서, 그리고 아브라함과 피의 언약을 맺으신 분으로서,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피흘림의 댓가를 치루셔야만 하는 아픈 마음을 간직하신 분이시다.
(19, 희망이 사라진 유다와 시온)
하나님의 저주는 나아짐을 위한 징계가 아니라 심판에 의한 정죄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행위 언약 안에서 약속을 맹세한 백성이기에 불순종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만 한다.
징계하고 평강을 준다면, 그리고 치료한다면, 이는 정죄가 아니라 나아짐을 바라는 채찍이고 언약의 실행이 아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이 감당해야 할 고통은 언약 백성으로서 약속에 대한 결과이기에 선지자가 감당하라고 선언한 대로 재앙을 감당해야만 했다.
(20-22,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모든 상황은 죄를 죄로 인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의 댓가를 치러야만 하며, 하나님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기 위해서 저주를 내리셔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불순종의 죄악에 합당한 댓가를 치루어야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친히 감당시키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신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기에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저주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입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마음을 찢어놓는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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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4장 1-12절 말씀 묵상
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3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6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9 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11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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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가뭄의 징계)
유대인들은 가뭄의 재앙이 분명한 하나님의 표현임을 알면서도 끝까지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 인간의 심성을 보여주고있다.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강퍅한 마음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의 심성이 어떠한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과거에도 그러했겠지만, 특히 현대인들은 자연의 재앙을 좀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연계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모든 현상을 과학이라는 지식에 의해서 분석을 하지만, 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고하더라도 과학은 현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현대에 들어와서 기상이변은 물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과학은 현상을 설명해주지 결코 원인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기상 이변을 통해서 말씀을 하셨다.
신약에 들어와서 기상이변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고만 결론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할 여지가 많이있다.
기상 이변이 단지 인간의 문명의 발달에 의한 후유증 차원에서만 해석이 가능할까?
과학이 인간에게 주는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기도한다.
(7, 예레미아의 기도)
예레미아는 본인 스스로가 죄악에 대한 고백을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이 마땅한 형벌임을 인정하고있다.
예레미아는 형벌을 없애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마땅한 형벌임을 고백하고있는데, 이는 죄와 타협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레미아는 그냥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외아들 그리스도에게 친히 담당시키심으로서 형벌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8. 이스라엘의 소망이었으나 마음이 떠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그네와 같이 잠시 머무시다가 떠나신다는 표현은, 표면적으로는 떠나시는 것 같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떠남이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생각하는 세상적인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실 참된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신다.
교회나 신앙생활의 차원이 인간적이고 세상적일 때 하나님은 소망이 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이 신자가 바라는 참 소망과 구원자되심은 오직 인간의 근원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9, 하나님은 놀란 자와 같거나 무력하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슈퍼스타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세속적 욕구를 채워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자신들의 인간적 욕구를 채워주시는 차원으로 하나님을 끌어내렸다.
하나님께서는 타협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구원은 타협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공의에 의한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이들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으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시며,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를 담당하시도록 하셨다.
인간의 참된 구원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죄악이 드러나고 고발되어야만 한다.
(10, 정죄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죄악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신다.
인간의 죄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이상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변명을 할 수가 없다.
유대인들의 마지막은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이 마음에서 하나님과 멀다는 것을 증명해주고있다.
(11, 백성을 위해서 구하는 복은 근본 해결책이 아니다.)
문제는 항상 근원적으로 접근해야한다.
중요한 것을 외면하고 급한 것 위주로 해결할 경우 문제는 반복된다.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을 위해서는 현재의 부정적 상황을 직면해야할 필요가 있다.
(12, 중심에서의 회개가 아니기 때문에 응답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그냥 때를 쓴다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근원적이고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해결책을 원하신다.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 하실 수 있는 문제이다.
(결론)
모든 어려움은 우리에게 단순히 어려움을 극복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다.
어려움의 근원에는 우리의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가 내포되어있다.
참된 신앙은 현상을 쫓아가는 신앙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과 근원이 어떠한 지를 알고서 하나님과 본질적인 관계 회복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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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3장 20-27절 말씀 묵상
20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
21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우두머리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네가 고통에 사로잡힘이 산고를 겪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22 네가 마음으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
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26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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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잘못된 계략의 결과)
원래 아담에게는 창조명령을 통하여 에덴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는데 , 아담이 사단의 말을 듣고서 직책에 실패하였던 것과 같이, 유대의 직분자들, 즉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맡겨놓았던 양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과 우상을 쫓았던 관계로, 결국에는 북방민족의 침략으로 인하여 그토록 자랑하던 양떼들을 잃게되었다.
애굽과 우상을 의지하는 것이 급박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항상 급한 것보다는 중요한 것을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어도 워낙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났던 관계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는 유대인들이나 현대인이나 마찬가지이다.
(21-22, 세상을 의지한 결과)
세상을 의지하면 세상의 지배를 받는다.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한다.
신자에게는 교회나 가족이나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회도 의지의 대상이 되면 우상이 될 수가 있다,
교회에서 우상 숭매가 만연하지만 이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교회가 의지의 대상이 될 때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의지 할 때, 교회가 오히려 자신을 지배하는 권력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이 당하는 수치는 이 세상을 의지한데서 오는 결과물이다.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23, 바뀔 수 없는 인간의 상태)
인간이 악에 익숙해있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기에 원래부터 선을 행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타락한 인간은 사단의 종이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의지가 없다.
인간이 행하는 선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 것이며, 인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악마의 세상이되며, 인간의 존재는 악마의 좀비일 뿐이다.
(24, 하나님의 흩으심)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하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견고한 약속을 근거로 어느 이방민족도 감히 건드릴 수가 없었던 거룩한 땅이었지만, 이제는 정 반대의 상황에 직면해있다.
이유는 한가지, 즉 우상숭배로 인하여 교만해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그곳이 있는 인간까지 거룩한 것은 아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교회나 마찬가지다.
교회 공동체의 교인이라고 견고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가나안 땅에서의 위치를 견고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의지하여 교만하여졌던 것과 같이, 교회의 규모를 자랑하며, 자신의 직책을 자랑하며, 교회 공동체에서 든든히 뿌리내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외적인 교회를 의지할 때, 바람에 흩날려가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교인들도 뿔뿔히 흩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식하여야 할 것이다.
(25, 거짓 것을 신뢰한 결과)
거짓 것은 총체적으로 우상과 일치된다.
교회의 외적인 규모, 안정된 직장, 든든한 재정적 여유, 장성한 자녀들 등등….
우리의 마음을 든든하게하는 모든 것이 다 거짓 것이 될 수 있다.
이런 것들에 의지하는 것은 거짓 것을 신뢰하는 우상 숭배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의지하거나 의지할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신자는 어떠한 외적 환경에서도 목을 곧게 할 수가 없으며,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높아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순간, 실질적인 추락이 시작된다.
(26, 심은대로 보응받는 유대인)
유대인들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애굽을 의지하고 우상을 의지함으로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배제시킴으로 하나님을 수치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이제 유대인의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셔서 그들로하여금 수치를 당하게하신다.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있는 상황으로 인하여, 언젠가는 교회도 수치를 당할 때가 올 것을 염려해야한다.
신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그가 환란 가운데 있을 때 그를 구해주실 것이다.
(27, 오랫동안의 간음의 결과)
유대인들은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더러워진 상태에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사악한 행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정죄하실 것이 두려워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미 간음에 길들여져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위치에 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문명의 발달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왔다.
문명을 거부하는 아미쉬들도 스마트폰에서는 자유할 수 없다는 기사를 보면서, 이제 하나님을 거부하는 현대 문명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와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
(결론)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의지해야한다.
교회공동체도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도가 교제하는 것과 서로 힘이 되며 의지 할 대상이 되는 것은 다르다.
교회 공동체가 의지의 대상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교회 공동체에 종속되게되며,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가 우상으로 전락되며 교회 공동체로 인하여 수치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현대인들은 점점 더 문명의 기기에 의존하면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환경을 조성해가고 있다.
이럴 때 일 수록 더욱 경계하여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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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3장 12-19절 말씀 묵상
12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13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14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16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17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18 너는 왕과 왕후에게 전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19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
(13, 악에 잔뜩 취한 자들)
should be filled with wine
I am going to fill with drunkenness
#채워져야할 포도주 대신에 어둠이 채워짐.
예루살렘의 모든 이들에게 어둠이….
하나님께서 내어버린 자들은 온갖 재난과 재앙에 휘말려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리면, 유대의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자신들의 죄악에 취하여 서로를 상하게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를 말한다.
아담 안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은 왕, 선지자, 제사장의 직책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에덴 공동체에서 아담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의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로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에 취하도록 내어버려두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자신의 형상을 거두어 가심으로서, 더 이상 이스라엘과 함께하시지 않으시겠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내어버리시면 그동안 그들 가운데 억제되었던 죄악이,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이 날 뛰게 되어있다.
그 결과 공동체는 붕괴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14, 공동체의 붕괴)
14 ‡ I will smash them one against the other, parents and children alike, declares the LORD. I will allow no pity†or mercy or compassion†to keep me from destroying†them.’”Threat of Captivity
#하나님께서 주시는 파괴는 결과적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에 대한 위협이다.
구조는 남아있는 가운데 그 안에서의 충돌이 아니라 완전히 구조 자체를 없애는 걷어냄이다.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되는 공동체는 부자지간이다.
부자 사이에도 충돌이 있어 서로 상하게 하는 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일반은총 마져도 거두어 가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 안에서 기본적인 질서가 유지되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도 아담의 후손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게되면 아담의 후손이 가지고 있는 서로에 대한 파괴적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있다.
우리는 주어진 좋은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유대 공동체와 같이 서로에 대한 파괴적인 본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5, 끝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
15 ‡ Hear and pay attention, do not be arrogant, for the LORD has spoken.†
1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끝까지 교만하고 건방진 백성들에게 끝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
# 아담의 후손으로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성의 지독함을 보여준다.
(16, 마지막까지도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마지막까지 자존심의 싸움?
끝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을 거부하는 유대인들.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 드려야할 영광을 사단에게 드리는 반역 행위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우상에게 하나님의 귀한 것을 가져다 바친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흔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도 당연히 생각하며, 감사하지도 않고,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사용한다.
욕심을 쫓는 것은 사단의 종노릇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이 높아지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취하는 영광은 사망의 그늘이며, 어둠이기에 인간의 교만은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사라진,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17, 마음을 얻지 못하신 하나님)
17 ‡ If you do not listen,†I will weep in secret because of your pride; my eyes will weep bitterly, overflowing with tears,†because the LORD’s flock†will be taken captive.†
유대인들에게 대한 간절함은 그들의 형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나오길 바라시는 하나님의 간절함이 묻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끝까지 원하신다.
유대인의 우상숭배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사랑하는 자로부터 받는 배신감과 상처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은 비통에 잠기신다.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영광으로 취하는 도둑질이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신 축복을 자기를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교만은 사랑하는 자에게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눈물을 흘리게하는 악한 행위이다.
교만은 주신 자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놓는 배은망덕의 행위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로 말미암아 언약 백성에 대한 상실의 마음을 가지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가 잘못되는 것에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마음을 가지신 분이시다.
아담의 후손인 죄인들은 사랑과 눈물에 대하여 진실된 감각이 없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들이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하지 말아야한다.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사랑하시지 않으셨다면 이렇게까지 계속해서 마지막까지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신다.
(18-19, 제거된 면류관)
18 ‡ Say to the king†and to the queen mother,†“Come down from your thrones, for your glorious crowns†will fall from your heads.”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왕을 원하였기에 세워진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였으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되는 자리였다.
왕으로하여금 보좌에서 내려와서 왕관을 벗으라고하는 것은 한 개인에 대한 자격 박탈 일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표현이기도하다.
인간은 자신이 누리는 좋은 환경을 교만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된다.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에 인간은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하나님은 주신 영광을 도로 찾아 가신다.
중세 시대 교황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기에 조금만 틈만 보여도 높아지려고한다.
교회의 영역은 절대로 자신이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단지 풍요할 때 감사하고 교만하지 말아야한다.
교회에서 장사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이들은 결국에는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밖에 없다.
(19. 내려진 막)
19 ‡ The cities in the Negev will be shut up, and there will be no one to open them. All Judah†will be carried into exile, carried completely away.
무대 공연의 종료를 선언하신다.
하나님의 선언이시며, 인간이 다시 시작 할 수가 없다.
아담의 후손이 어떠한 지에 대한 절망을 보여준다.
(결론)
산자는 신자이기 이전에 아담의 후손이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부정적 상황 가운데 죄가 고발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야한다.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부정적 상황을 불평하기 이전에, 부정적 상황에는 사랑하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심정이 내포되어있음을 생각하여야한다.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긍정적 환경을, 자신을 자랑하는 교만의 도구로 사용하지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신자가 행하는 교만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눈물로 돌려드리는 행위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취해서는 안된다.
비록 거듭나지 않은 신자가 함께하는 외형적 교회라도,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기 위해서 신자는 목을 곧게 세워서는 안된다.
직분자의 직책은 섬기는 직책이지 절대로 계급장이 될 수가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에, 자신에게는 절대로 자랑 할 것이 없는, 교만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마땅히 처할 낮아짐의 자리를 대신하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교만과 높아짐을 담당하고서 낮은 자리에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느 인간도 교만하거나 높은 자리에 설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인간이 교만하거나 높아지려는 자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
세상은 세상이기에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교만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는 교만을 허락 할 수 없는 곳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높은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낮아져야 할 죄인이 교만하게 높아질 때는 반드시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다.
이 악한 세대는 힘과 권력과 명예와 높아짐의 시대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구제 불능의 죄성
#-인간은 누구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으로서,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두드린다고 하더라도 열려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직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인간은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를 말할 수밖에 없다.
#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신다.
욕심에 이끌려 세상 것을 의지하는 현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나라가 북한 핵문제로 인하여 여러가지로 어려운 상황이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읽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은 우둔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듣기에 너무 하나님을 멀리하고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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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3장 1-11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하시기로
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5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6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 하시기로
7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10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레미야 선지자는 실제로 두 번이나 유브라데 강가에 갔다왔다고 보기 보다는 환상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외형적인 상징은 이해력이 부족한 유대인을 설득시키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적인 의도도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허리에 띠는 띠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장식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할 유대인들이, 유브라데 강가에서 여러날 동안 바위 틈에 감추어진 띠와 같이, 어둠 가운데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포로생활을 한 다음에는 썩어버린 띠와 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모습으로 바뀔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주고계신다.
빨지 않은 띠와 같이 교만한 유대인들은, 포로 생활이 아니고는 교만한 특권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10, 듣지 않는 이들은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고 우상 숭배로 귀결된다.)
버림을 받았다는 말은 한 때는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버림받는 것은 더 이상 듣기를 거절한데서 연유된다.
듣는 것은 순종의 조건이다.
듣기를 거절하는 유대인들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어야 하며, 성도들 간에도 말씀이 공유되어야한다.
말씀이 공유가 되지 않는 교회는 결과적으로 다 자신들의 굽은 마음대로 욕심에 이끌려 행동할 수밖에 없다.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결국 유대인들과 같이 망할 수밖에 없다.
현재의 한국 교회의 몰락은, 말씀을 자기들이 듣기 좋은대로 왜곡시켜서 들었기 때문이며, 실상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듣지도 않은 결과물이다.
(결론)
성도의 힘은 여호와께로부터 온다.
자신이 잘 나가면 자신이 잘 나서 그렇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자신의 목에 힘을 주게되면 허리의 힘이 빠지게되며 결국에는 유대잊들과 같이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선교사들의 피값으로 급성장한 한국 교회가, 마치 자신의 공로로 성장한 것인마냥, 그 교만으로 말미암아 힘이 빠져가고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의 유대인들에게도 끊임없이 경고의 말씀을 하셨듯이,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끊임없이 되새겨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는 장로교회는 모든 운명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달려있는 것과 같이 무책임한 행동을 하고있지만, 유대인들의 잘못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외치심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책임을 단순하게 인간이 이해하는 예정론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틀 안에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지만,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에 대한 간절함과 한없는 노력하심과 끝없는 두드리심은 결코 인간이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스스로를 속이고 착각하고있는 유대인들과 같이, 선민 의식에 빠져서 스스로를 속이며 자신이 하나님께 아무 문제거 없다고 스스로를 속이지는 말아야겠다.
유대인의 특권적 선민의식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의한 특권의식에 빠진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취향대로 왜곡시켜서 들으며, 허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인간은 모두 아담의 후손이기에, 내면의 높아지고자하는 마음이 꺽일 때, 썩어버린 띠와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질 때, 교만한 특권의식이 사라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음을 생각해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신자는, 자신의 잘남에 의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으며, 또 다시 유대인과 같은 특권의식이나 교만에 사로잡혀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실상을 보게되면, 특권의식과 교만과 더불어,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입으로만 하나님을 말하며, 마음에서는 하나님과 멀어져있는 모습을 흔하게 보게된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은혜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교만한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심판하시기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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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2장 7-17절 말씀 묵상
7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8 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라
9 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10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11 그들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
12 파괴하는 자들이 광야의 모든 벗은 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도다
13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
14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 내리라
15 내가 그들을 뽑아 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16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17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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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 특권을 누렸던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을 내어 버리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세우신 집은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하심으로 인해서 많은 풍요를 누리게되지만, 그 안에 거하는 이들은 이로 인해서 부패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온갖 좋은 것으로 입히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없는 근본적인 죄인이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무늬있는 매와같이 자신을 장식하며 자신을 자랑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증명해주고있다.
무늬만 있는 새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을 자랑하는 수단으로 바꾼 결과로서, 원래의 모습과는 상이하게 달라진 이상하게 바뀌어진 변질된 새를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들의 높아짐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며, 몰락한 유다인들과 같이 결국에는 이방의 먹이감이 되어 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경우는 외형적으로 거대해진 교회에서 한결같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나 마음에서는 하나님과 멀어진 이들로서, 결국 자신들의 욕심을 섬기지만, 이것이 죄인으로서의 즐거움이 될 지는 모르겠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낳는 심각한 우상 숭배의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이 추구하는 기복신앙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자신의 소욕을 쫓아서 행동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 밖에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미움을 살 수 밖에 없게되며,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내어버린 존재가 되고만다.
하나님이 선택한 목자로서의 유다도,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결과, 들짐승이 되어 하나님의 포도원을 허무는 사악한 반역자가 되어버린 것과 같이, 하나님의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대형 교회의 직분자들은 더욱 조심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였던 대상이라도 자신의 품을 떠난 이들에 대해서는 내어버려둠으로서 징계를 하시는데, 많은 한국 교회의 무질서하고 자기 소견에 좋은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이들의 결과가 결코 평탄치 않음을 생각해 본다.
목회자이건 성도이건 간에, 교회에서 이익을 보는 자들의 경우에, 교회의 주인 노릇하며 진리를 훼방하는 경우, 하나님의 성전에서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다인들과 같은 류가 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해야한다.
(10-13, 황무지가 된 포도원)
당연히 소산이 있어야 할 포도원이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둘 정도로 황무지가 된 것은 자신의 소욕을 따라서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다.
하나님을 떠난 유다인들은 재앙을 피하려고 온갖 방법들을 다 동원해 보지만, 이들은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이 자신들의 반역으로 인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앙이 외적으로는 파괴하는 자들로 인한 것이지만, 포도원을 황무지로 만든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이들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쫓는 이들까지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하나님을 떠난 자들에 대해서는, 오직 분노가 임할 뿐이다.
(14-17, 악한 이웃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악한 이웃을 파괴하는 자로 사용하시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행동을 기뻐하시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이들을 다시 벌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하여야하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성을 사용하시어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지만, 하나님께 사용되어진다고 모든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란을 기회로 삼으셔서, 이들에게까지도 말씀이 전파되어 이들이 구원에 참여되길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율법을 받은 이들이 아니지만, 이들도 율법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배워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세워지길 원하신다.
(결론)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풍요와 축복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본질적 죄인이기에 환란과 어려움을 통해서 정금같이 순화되면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은 마땅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나 정죄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만들어지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의 과정임을 인식해 본다.
인간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황폐함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에서 온다.
그렇다고 표면적인 풍요가 인간 승리나 하나님의 축복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풍요에 취한 인간도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은혜를 거두어 가심을 인한 것이다.
인간은 마땅히 풍요를 누릴 권리와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이미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 분리된 자, 즉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이기에 어떠한 풍요도 누릴 권리와 자격이 상실되어있는 상태이다.
인간이 누리는 풍요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기에, 인간은 풍요를 주장할 권리가 전혀 없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 경험하는 재앙과 슬픔은 전적으로 은혜를 입은 죄인들의 반역의 결과일 뿐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풍요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여도 마음에서는 하나님과 멀어져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는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의 실행 과정 가운데 있기에, 구속에서 멀어진 이들은 결과적으로,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같이,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 쓰임받았다고 자신을 정당화시키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을 사용하시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이들이 하나님 백성 가운데 세움을 입는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부패해도 교회 자체를 대적하거나 교인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정당화시켜서는 안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들이 부패하고 타락 했을 때, 이들과 대적하거나 투쟁하는 것보다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슬픔과 분노처럼, 이들의 악에 대하여 분노하면서도 이들의 악함을 슬퍼 할 수 있어야한다.
교회가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외형적 교회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모형이기에,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가 궁극적으로 세워가야 할 교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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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예레미야의 질문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6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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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고향 사람들에 의한 박해)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일이 없다고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레미아 선지자도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환영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해까지 받고있다.
인간에 구축된 사회적 환경은 배타성과 죄성과 연계될 수 밖에 없다.
고향 사람과 지역주의, 민족주의등 배타적 이기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배타성으로 귀결되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다.
이는 혈연, 학연, 지연에 기반을 둔 교회가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한다.
(22-23, 때가 되면 징벌하시는 하나님)
세상에 기반을 둔 이들은 당시에는 견고한 것 같지만, 이들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배타성에 대한 결과는, 바로는 아니어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를 하시게 되어있다.
이들의 악함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상대하면서 소모전을 벌일 때 오히려 우리 자신도 그들의 악함에 동참하는 또 다른 악을 낳게 되는 경우를 보게된다.
상대의 악함은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오직 주님을 향하여 열심을 품어야한다.
(2, 거짓된 목자들)
말로만 하나님을 부르며, 마음에서는 먼 사람들...
차라리 불신자라면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핍박을 받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어렵기만 하다.
이런 이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참된 신자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황들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하여 예레미아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교회 안에서 핍박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관심이 앞서신다.
악한 이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마련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보다는, 우리에게 다가 올 일을 걱정하며, 지혜롭게 준비되어지는 자가 되어야한다.
악한 이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4-6, 우리의 형평을 아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적절한 환경을 허락하신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선지자에게는 다행일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과의 친분은 신자에게 환란보다도 더욱 어려운 시험과 유혹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이나 다 감당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걱정하시며, 가장 가까운 이들도 우리를 속일 수 있음을 경계하게하신다.
의리, 가족애, 친분등 세상적인 관계가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핍박을 받는 것과 같이, 참된 신앙을 가질 때 세상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이 될 수가 있다.
고향에 있는 형제와 아버지 집과 함께 하려는 것이, 선지자에게는 말과 경주하는 것이되고, 넘치는 요단 강물이 될 수도 있다.
오랫동안 말씀을 공유 할 수 없었던 혈연, 학연, 지연으로 뭉쳐진 교회가 결국 붕괴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세력과 함께 할 수 없음을 경험해본다.
(결론)
신자의 고난은 많은 부분 세상 욕심을 추구하는 이들과의 충돌에서 온다.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거민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입으로 하나님을 불렀던 것은 한 마디로 기복신앙이었다.
혈연, 학연, 지연에 기반을 둔 교회는 세상에 뿌리박은 기복신앙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기복신앙은 복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이 세상에서 참된 신앙을 갖게되면, 이 세상과의 충돌로 인한 손해는 물론이고, 많은 희생을 감당하여야한다.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에서는 종종 예수믿고 어려운 가운데 복을 받았다는 간증들을 많이 하곤 한다.
기복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 숭배의 한 가지이다.
참된 간증은 세상 복받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에 대한 간증이 되어야한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간접적으로나마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환란 중에 건져내시고,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을 벌하시는 것에 대한 간증을 전한다.
참된 간증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것이 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자를 핍박하는 자들을 결코 가만히 놓아 두시지는 않으신다.
성도의 어려움과 성도가 속해있는 교회와 국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예레미아가 하나님께 질문하였던 것과 같이,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물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 안에 거하는 것임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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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9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12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13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
16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7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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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생겨난 반역의 심각성)
이스라엘의 반역은 아담의 범죄의 속성과 맥락을 같이하고있다.
에덴에서 하와에게 틈을 타 들어온 반역은 에덴 공동체를 파괴시켰다.
이스라엘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들어온 반역이 이스라엘 전체를 파괴시켰다.
이스라엘의 선조는 궁극적으로 아담으로 귀결되며, 아담은 하나님께 반역한 자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반역한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겠다고 맹세한 행위 언약에 대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반역한 백성을 무조건 용서하신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반역한 이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공의가 증명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이들 가운데 들어온 일부의 반역을 수용한 결과였기에 공동체 안애 들어온 일부의 반역이 전체를 파괴시킨다는 보여준다.
(11, 피할 수 없는 재앙)
사람들은 쉽게 “오 마이 갓”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심지어는 욕을 할 때 “지저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있다.
현재의 인간들의 상태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타락해 있으며, 현재의 죄악이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 못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인식이 없이, 재앙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징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과연 쉽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거나 회개함이 없이,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개선이 없이, 과연 쉽게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
아담의 범죄는 나의 범죄가 아니기에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도 아담을 대표로하는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범죄에 참여하고있는 것이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모든 부정적 상황의 원인이 자신과 관계가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아담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절대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12, 무력한 우상)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는 것과 같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일단 현대 기술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는데, 현대인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애굽의 재앙에 맞서서 싸우는 바로와 같이, 현대인들은 기술로 재앙을 이겨내려고하지, 절대로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민들의 신들이 그 곤액 중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하리라고 하신 것과 같이 인간은 결코 기술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을 해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3, 우상의 보편성)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들이 만든 우상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고있다.
처음에는 일부였겠지만 이를 용납한 결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고있다,
일본만 보더라도 우상이 거리 곳곳에 즐비하고 집집마다 가득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나라는 교회가 가득한 나라지만, 일본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늠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섬기고 있는 관계로, 너무도 많은 외형적 교회가 부패한 이스라엘 성전과 같이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이제는 너무도 보편화되었고,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외형적 교회 안에 진리와 거짓이 혼잡하게 되었기에,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예루살렘 거리의 수효대로 수치스러운 물건이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다.
(14, 버림받은 자들)
로마서 1장에서와 같이 내어버려두고, 포기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이상 말로 안되는 이들은 직접 재앙을 경험함으로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다.
현대문명의 발전은 마땅히 하나님께 향해야할 인간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든다.
문명의 발전 만큼이나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수없이 말씀하셔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방법으로 재앙을 경험하게 할 수 밖에 없었듯이, 현대인들도 현대문명으로 인한 재앙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지 못 할 것이다.
(15, 악을 도모하며 기뻐하는 자들)
오늘날의 교회는 교회에 충성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면 최고의 교인이 된다.
하지만 교회가 부패하고 잘못될 때 이들이 과연 교회에서 제대로된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열심과 충성 봉사, 그리고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이 마치 무당이 푸닥거리 하며 돈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리한 생각일까?
교인들은 목회자를 대적하면 벌받는다면서 질질끌려가는 모습이 마치 무당의 협박에 끌려서 돈을 더 얹혀주는 이들을 연상시킨다.
교회에서 진리는 사라지고, 기뻐할 것을 기뻐하지 못하고, 슬퍼할 것을 슬퍼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계략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내어쫓고있다.
(16-17, 축복 할 수 없는 이유)
감람나무를 심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이를 망가뜨렸듯이,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도 마찬가지로, 죄를 용납하는 이들로 인하여, 가지 꺽인 감람나무와 같이 훼손되고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들을 본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좋은 것을 주어도 나쁘게 사용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감람나무도 인간이 누릴 자격이 없음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인간은 윤리나 도덕으로 변화되거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것을 변질시켜서 악한 것으로 이용하는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아예 할례를 받지 않은 모든 열방의 백성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간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선하신 것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 본다.
(결론)
교회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공동체 의식의 결여에서 온다.
교회들 가운데 들어온 일부의 세상적인 방식이 교회 전체를 붕괴시키는 보편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체질을 갖고있기에, 잘못된 것에 대하여 쉽게 수용을 하고, 이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된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과 유다 가운데 있는 죄가 고발되고, 들어온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붕괴가 초래되었듯이, 신약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말씀에 의해서 교회 가운데 들어온 죄가 고발되고, 가만히 들어온 죄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 전체가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를 용서받았다고 함부로 행동하는 이들은 실상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며, 이들의 잘못된 행동은 교회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죄를 용납하는 행동은 죄에 대한 합리성을 제공해주며, 교회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할 때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보다도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서 이를 피하려고 노력해야하며, 바울과 같이 사망의 몸인 육신의 소욕에 대하여 심각하게 경계를 하고 죄를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한 가지 예로서, 아무리 유능하고 능력이 있는 신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활이 부인과 자녀를 놔두고 수십년을 비서와 동거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그 머리에서 나오는 신학 사상이 성령의 간섭하심에 의한 결과물인지에 대하여 의심해 볼 수 밖에 없다.
경건한 하나님의 성도는 자신의 죄를 다윗의 범죄에 빗대어 합리화시키거나, 죄에 대한 핑계를 대지 않는다.
울법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자녀로서의 관계가 아니었지만,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더 심각하게 인식을 할 것이다.
교인들의 보편적인 죄악과 무례함과 몰상식은 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레미아 선지자와 같은 심정으로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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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1장 1-8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2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
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4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5 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6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
7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8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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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절, 언약의 대상인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의 존재적 삶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서의 삶이다.
이들의 가나안 땅에서의 삶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순종을 조건으로 허락받은 삶이었으며, 불순종에 대해서는 저주가 약속된 행위 언약 안에서의 삶이었다.
이들의 이전 상태는 쇠풀무 애굽 땅에서의 종이었지만, 가나안 땅에서의 현재적 삶은 종에서 해방된 삶으로서, 순종과 명령을 따를 것을 조건으로하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무시하였으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을 살았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언약에 대한 파기를 의미하지만,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행위 언약에 의해서 그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실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이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저주는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이 행위 언약 안에 있었던 것을 근거로하는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이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거주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신 것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주는 죄성은 인간이 결코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있다.
(6-8절, 하나님의 원하심)
하나님께서는 부패할대로 부패한 백성들에게도 예레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됨으로서, 유다백성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끝까지 언약의 요구인 순종을 요구하신다.
예레미야로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순종하고 명령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실 저주는 행위 언약을 근거로 한 것이기에, 순종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완악한 이들이 자신들에게 임하게 될 저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행위 언약을 근거로한 순종에 대한 요구는 결과적으로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임할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참여할 자리가 없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해주시는 것이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였듯이 이스라엘은 보편적인 인간의 실상이 어떠한 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있다.
모든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현재적 삶도,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삶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행위에 대한 심판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행위 언약 관계 아래에서 대표자 아담을 통해서 행위 언약 아래있었다.
아담은, 유다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같이, 행위 언약을 근거로 에덴에서 쫓겨난 자이다.
우리는 이미 아담 안에서, 실패한 아담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죽은 상태에 있는 자이다.
이스라엘은, 행위 언약 아래에서, 이미 죽어있는 자들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고발하고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미 죽어있는 자들이 고발되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에게 또 하나의 언약(원시복음: 창 3:15)을 세우심으로서, 타락한 아담이 낳은 아들 셋 안에서 여호와를 부를 수가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적 삶은,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언약 관계로 인하여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노아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반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인류 모두는 누구나 다 양심과 같은 자연법을 통하여 자신이 언약 안에서 저주를 받은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원을 위해서는 죄가 고발되어지는 인생을 경험해야만 하는데, 이는 자연법을 통해서 인간의 실상이 고발되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누구나 예외없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며,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하심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제대로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없다.
펠라기우스와 같은 이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에 모두 다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하며, 어거스틴은 생물학적인 유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행위 언약을 근거로한 하나님의 강령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실상이 어떠한 지를 깨달을 때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이 주어질 수 있다.
이미 아담 안에서 죽은 우리는, 행위 언약 안에서 저주받은 자이기에, 더 이상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우리의 행위는 단지 고발되어질 뿐이다.
아담의 아들 셋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것과 같이,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 고발되어지는 인생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것이기에, 인간의 행위는 구원의 공로에 더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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