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7. 12. 29. 12:37

예레미야 11장 18절- 12장 6절 말씀 묵상

18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1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22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예레미야의 질문

1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6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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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고향 사람들에 의한 박해)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는 일이 없다고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레미아 선지자도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환영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해까지 받고있다.


인간에 구축된 사회적 환경은 배타성과 죄성과 연계될 수 밖에 없다.


고향 사람과 지역주의, 민족주의등 배타적 이기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배타성으로 귀결되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다.


이는 혈연, 학연, 지연에 기반을 둔 교회가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기도한다.



(22-23, 때가 되면 징벌하시는 하나님)


세상에 기반을 둔 이들은 당시에는 견고한 것 같지만, 이들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배타성에 대한 결과는, 바로는 아니어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를 하시게 되어있다.


이들의 악함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상대하면서 소모전을 벌일 때 오히려 우리 자신도 그들의 악함에 동참하는 또 다른 악을 낳게 되는 경우를 보게된다.


상대의 악함은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오직 주님을 향하여 열심을 품어야한다.



(2, 거짓된 목자들)


말로만 하나님을 부르며, 마음에서는 먼 사람들...


차라리 불신자라면 몰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에게 핍박을 받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어렵기만 하다.


이런 이들이 교회를 장악하고 참된 신자들을 쫓아내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황들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하여 예레미아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는 교회 안에서 핍박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관심이 앞서신다.


악한 이들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마련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보다는, 우리에게 다가 올 일을 걱정하며, 지혜롭게 준비되어지는 자가 되어야한다.


악한 이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4-6, 우리의 형평을 아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적절한 환경을 허락하신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선지자에게는 다행일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과의 친분은 신자에게 환란보다도 더욱 어려운 시험과 유혹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이나 다 감당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걱정하시며, 가장 가까운 이들도 우리를 속일 수 있음을 경계하게하신다.


의리, 가족애, 친분등 세상적인 관계가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핍박을 받는 것과 같이, 참된 신앙을 가질 때 세상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들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이들이 될 수가 있다.


고향에 있는 형제와 아버지 집과 함께 하려는 것이, 선지자에게는 말과 경주하는 것이되고, 넘치는 요단 강물이 될 수도 있다.


오랫동안 말씀을 공유 할 수 없었던 혈연, 학연, 지연으로 뭉쳐진 교회가 결국 붕괴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세력과 함께 할 수 없음을 경험해본다.



(결론)


신자의 고난은 많은 부분 세상 욕심을 추구하는 이들과의 충돌에서 온다.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거민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입으로 하나님을 불렀던 것은 한 마디로 기복신앙이었다.


혈연, 학연, 지연에 기반을 둔 교회는 세상에 뿌리박은 기복신앙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기복신앙은 복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이 세상에서 참된 신앙을 갖게되면, 이 세상과의 충돌로 인한 손해는 물론이고, 많은 희생을 감당하여야한다.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교회에서는 종종 예수믿고 어려운 가운데 복을 받았다는 간증들을 많이 하곤 한다.


기복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 숭배의 한 가지이다.


참된 간증은 세상 복받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에 대한 간증이 되어야한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간접적으로나마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환란 중에 건져내시고, 자신을 핍박하는 이들을 벌하시는 것에 대한 간증을 전한다.


참된 간증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것이 되어야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는 자를 핍박하는 자들을 결코 가만히 놓아 두시지는 않으신다.


성도의 어려움과 성도가 속해있는 교회와 국가의 어려움에 대하여, 예레미아가 하나님께 질문하였던 것과 같이,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물어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 안에 거하는 것임을 생각해본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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