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7. 12. 29. 12:36

예레미야 11장 9-17절 말씀 묵상


9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10  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12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13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14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15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

16  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7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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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생겨난 반역의 심각성)


이스라엘의 반역은 아담의 범죄의 속성과 맥락을 같이하고있다.


에덴에서 하와에게 틈을 타 들어온 반역은 에덴 공동체를 파괴시켰다.


이스라엘 공동체도 마찬가지로 그들 가운데 들어온 반역이 이스라엘 전체를 파괴시켰다.


이스라엘의 선조는 궁극적으로 아담으로 귀결되며, 아담은 하나님께 반역한 자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단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반역한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겠다고 맹세한 행위 언약에 대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반역한 백성을 무조건 용서하신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반역한 이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실 때 하나님의 공의가 증명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이들 가운데 들어온 일부의 반역을 수용한 결과였기에 공동체 안애 들어온 일부의 반역이 전체를 파괴시킨다는 보여준다.



(11, 피할 수 없는 재앙)


사람들은 쉽게 “오 마이 갓”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심지어는 욕을 할 때  “지저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고있다.


현재의 인간들의 상태가 얼마나 보편적으로 타락해 있으며, 현재의 죄악이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 못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인식이 없이, 재앙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징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필요할 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과연 쉽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겠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거나 회개함이 없이,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개선이 없이, 과연 쉽게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


아담의 범죄는 나의 범죄가 아니기에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나 자신도 아담을 대표로하는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범죄에 참여하고있는 것이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모든 부정적 상황의 원인이 자신과 관계가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아담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절대로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12, 무력한 우상)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는 것과 같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 일단 현대 기술을 이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는데, 현대인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을 피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마치 애굽의 재앙에 맞서서 싸우는 바로와 같이, 현대인들은 기술로 재앙을 이겨내려고하지, 절대로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민들의 신들이 그 곤액 중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하리라고 하신 것과 같이 인간은 결코 기술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을 해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13, 우상의 보편성)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백성들이 만든 우상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고있다.


처음에는 일부였겠지만 이를 용납한 결과가 어떠한 지를 보여주고있다,


일본만 보더라도 우상이 거리 곳곳에 즐비하고 집집마다 가득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나라는 교회가 가득한 나라지만, 일본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늠 것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교회를 섬기고 있는 관계로, 너무도 많은 외형적 교회가 부패한 이스라엘 성전과 같이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이제는 너무도 보편화되었고,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외형적 교회 안에 진리와 거짓이 혼잡하게 되었기에,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예루살렘 거리의 수효대로 수치스러운 물건이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다.



(14, 버림받은 자들)


로마서 1장에서와 같이 내어버려두고, 포기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이상 말로 안되는 이들은 직접 재앙을 경험함으로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게 하는 수밖에 없다.


현대문명의 발전은 마땅히 하나님께 향해야할 인간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든다.


문명의 발전 만큼이나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수없이 말씀하셔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방법으로 재앙을 경험하게 할 수 밖에 없었듯이, 현대인들도 현대문명으로 인한 재앙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깨닫지 못 할 것이다.



(15, 악을 도모하며 기뻐하는 자들)


오늘날의 교회는 교회에 충성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면 최고의 교인이 된다.


하지만 교회가 부패하고 잘못될 때 이들이 과연 교회에서 제대로된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열심과 충성 봉사, 그리고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이 마치 무당이 푸닥거리 하며 돈을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리한 생각일까?


교인들은 목회자를 대적하면 벌받는다면서 질질끌려가는 모습이 마치 무당의 협박에 끌려서 돈을 더 얹혀주는 이들을 연상시킨다.


교회에서 진리는 사라지고, 기뻐할 것을 기뻐하지 못하고, 슬퍼할 것을 슬퍼하지 못하는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계략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도들을 교회 밖으로 내어쫓고있다.



(16-17, 축복 할 수 없는 이유)


감람나무를 심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이를 망가뜨렸듯이,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도 마찬가지로, 죄를 용납하는 이들로 인하여, 가지 꺽인  감람나무와 같이 훼손되고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들을 본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기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좋은 것을 주어도 나쁘게 사용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심으신 감람나무도 인간이 누릴 자격이 없음을 증명해주고있을 뿐이다.


인간은 윤리나 도덕으로 변화되거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것을 변질시켜서 악한 것으로 이용하는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아예 할례를 받지 않은 모든 열방의 백성에게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간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선하신 것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해 본다.



(결론)


교회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공동체 의식의 결여에서 온다.


교회들 가운데 들어온 일부의 세상적인 방식이 교회 전체를 붕괴시키는 보편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아무리 거룩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체질을 갖고있기에, 잘못된 것에 대하여 쉽게 수용을 하고, 이로 인하여 공동체 전체가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된다.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스라엘과 유다 가운데 있는 죄가 고발되고, 들어온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붕괴가 초래되었듯이, 신약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말씀에 의해서 교회 가운데 들어온 죄가 고발되고,  가만히 들어온 죄로 인하여 교회 공동체 전체가 붕괴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인하여 죄를 용서받았다고 함부로 행동하는 이들은 실상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며, 이들의 잘못된 행동은 교회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죄를 용납하는 행동은 죄에 대한 합리성을 제공해주며, 교회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생각을 할 때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죄를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보다도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서 이를 피하려고 노력해야하며, 바울과 같이 사망의 몸인 육신의 소욕에 대하여 심각하게 경계를 하고 죄를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한 가지 예로서, 아무리 유능하고 능력이 있는 신학자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활이 부인과 자녀를 놔두고 수십년을 비서와 동거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그 머리에서 나오는 신학 사상이 성령의 간섭하심에 의한 결과물인지에 대하여 의심해 볼  수 밖에 없다.


경건한 하나님의 성도는 자신의 죄를 다윗의 범죄에 빗대어 합리화시키거나, 죄에 대한 핑계를 대지 않는다.


울법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자녀로서의 관계가 아니었지만,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더 심각하게 인식을 할 것이다.


교인들의 보편적인 죄악과 무례함과 몰상식은 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예레미아 선지자와 같은 심정으로 죄가 공동체에 미치는 심각성에 대한 인식을 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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