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7. 12. 29. 13:59

예레미야 19장 1-13절 말씀 묵상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2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3  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

4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 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 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음이며

5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6  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8  이 성읍으로 놀람과 조롱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조롱할 것이며

9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10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11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 곳과 그 가운데 주민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 성읍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

13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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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실례를 통한 말씀의 선포)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가운데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한 가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유다 백성들을 이해시키시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명하신 토기장이의 옹기를 통한 말씀 선포는,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의 이해력에 눈높이에 맞추신 하나님의 배려하심의 표현이다.


토기장이의 옹기는 이미 결과적으로 모양이 만들어진 상태이며, 결과물이 잘못되었을 경우 수정이 불가능하며 깨뜨려 폐기 할 수밖에 없기에 종종 인용이 되고있다.


옹기는 이스라엘의 결과적 상태로서 이스라엘이  폐기될 수밖에 없는 절망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낸다.



(4, 더럽혀진 거룩한 곳)


유다 백성들이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한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결과물이다.


중립지대에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그 신에 대해서 알고서 그 신이 더 좋아서가 아니다.


인간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이들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올 때는 가나안 땅이 어느 정도는 깨끗하게 되었지만 인간의 우상에 대한 집착력은 안보이는 것도 찾아 낼 정도로 집요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하나님의 왕권을 이 땅에 선포해야했다.


이스라엘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가나안 땅의 거룩이 전제가 되어야 했다.


거룩한 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왕권이 선포되고있다는 것이다.


이 땅을 불결하게 만들며 우상 숭배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왕권이 아닌 다른 신의 지배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도전이었다.


유다 백성들이 거룩한 땅을 불결하게 만들고, 무죄한 어린 아이의 생명까지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피를 흘리게한 것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여자의 후손의 탄생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사단의 종노릇을 하는 꼴이 되었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고 사단의 세력을 확장시키고 사단의 좀비에 불과했다.



(5. 아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인간의 욕심이, 아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릴 정도라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쉽게 도덕과 윤리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려고 많은 말을 하지만, 이는 거대한 탐욕의 불길에 바가지 물을 뿌리는 꼴이다.


바알 산당에서 행하던 음란한 행위는 축복에 대한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들의 축복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줄 만큼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교회에서의 교인들의 축복에 대한 욕심도, 같은 인간이기에, 마찬가지 일 것이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축복 대성회, 각종 부흥회, 입시를 위한 기도회 등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온 가증한 것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6, 죽임의 골짜기)


자식을 불살라 바알에게 바치면 축복을 받을 것 같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결코 가만히 놓아 두시지는 않으신다.


결국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살육당하고 짓밟혔으며, 결국에는 로마군에 의해서 완전히 폐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셨듯이, 예루살렘에는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였던 상황에서 열혈당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싼 내분과 예루살렘 주위를 둘러싼 로마군에 의해서 예루살렘은 피비린내나는 처참한 상황 가운데 기근과 더불어 지옥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기근과 핍박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벽에서 뛰어내린 자들은 뱃속에 금이 감추어져있다고 생각한 로마군에 의해서 전부 배가 갈리면서 살육을 당했고, 성내에서는 내전에 의한 살육과 기근으로 모두가 최악의 비참함을 경험해야만했다.


다윗에 대한 축복과 더불어 시작된 거룩한 시온성인 예루살렘이 왜 이렇게 파멸될 수밖에 없었는지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7-8, 문제에 대한 근원적 해결책)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계략도 효과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주검이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명령하셨는데, 아담의 범죄의 결과가 다스려야할 대상의 밥이 되어버린 것이다.


창 1:28의 생물과 창 3:1의 짐승은 같은 히브리어(חַי  chay)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뱀, 결국 사단의 존재가 포함되어있었는데, 유다 백성들은 결과적으로 사단의 밥이 되고만 것이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의 저주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게된 원인은 무시하고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문제의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상황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일반적으로 삶의 환경에서 접하게되는 많은 부정적 상황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에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과 인간 사회는 근원적으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관계성이 파괴되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방향성은, 가인과 같이, 하나님을 등진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인간은 삶의 환경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 스스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해결하려고한다.


문명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발전이 되는 것이다.


문명이 발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현대의 첨단 문명에서는 하나님이 철저히 배제되어있다.


하지만 첨단 문명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북한의 핵도 제거하실 수 있으시고, 주변의 부정적 상황도 충분히 제거해 주실 수 있지만, 이러한 환경을 허락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더 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하는 현대 문명 사회의 결국이 어떠할지 심히 염려스럽기만하다.



(9, 심은데로 보응받는 재앙의 저주)


아들과 딸과 친구의 살을 먹어야되는 상황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이는 이들이 도벳에서 자신들의 자녀를 바알에게 번제로 드렸던 사건에 비교하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만 할 짓을 한 댓가라고 할 수 있다.


아들과 딸과 친구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공동체의 가장 기본되는 틀을 파괴하는 행동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될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미 유다 백성들이 자신의 자식을 바알에게 번제로 바침으로서, 스스로 공동체에 대한 파괴적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10-11, 이스라엘의 종말을 고함)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종말을 고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시내산에서 언약에 대한 맹세를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을 하셔서 하나님의 법을 직접 주시고, 친히 나라를 다스리셨는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인격적인 다스림으로는, 모든 인류가 아담의 범죄와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육적인 인생의 한계이며, 하나님의 최고의 노력하심에도, 모든 인간은 결국  깨뜨려야할 옹기밖에 안되는 인생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상황은 하나님의 구속사 한 가운데 있다,


이 세상은 그냥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실행되는 과정 가운데 운행되고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에 대한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계신데 비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는 삶의 방향성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모든 상황과 인간의 행적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가운데서 반드시 정리될 것이다.


톰 라이트는 지옥을, 힌놈의 골짜기와 동일시하면서, 하나의 상징이라고 말하지만, 힌놈의 골짜기 도벳은 실제 있는 지옥이라는 실체의 모형과 그림자일 뿐이다.


유다 백성들은 일차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바알에게 자신의 자녀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을 행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을 삶에서 배제한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도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자녀들을 악에게 내어주는 행동을 하고있다.


현대인은 시대를 결산하는 마음 가짐으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12-13, 우상 숭배의 최후)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의 최후는 자신을 대표하는 선조들이 시내산에서 맹세한 것에 대한 결과이다.


맹세를 자신들이 직접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선조들의 맹세에 절대적으로 귀속된다.


인간은 누구나 다 공동체성과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다 공동체와의 관계 가운데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공동체를 배제한 개인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의 공동체성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을 때,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인간의 속성 안에 담겨진 것이다.


부모와 자녀는 공동체의 가장 기본이며, 친구는 사회 공동체의 근간이다.


자녀와 친구의 살을 먹는 재앙은 가나안 땅이 더 이상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적 구현이라는 목표가 실현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우상 숭배의 죄악은 결과적으로 자녀와 친구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밖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인,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만찬은, 더 이상 자녀와 친구의 살을 먹는 악행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어주는 생명의 매개체가 된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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