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017. 12. 29. 14:00

예레미야 19장 14절- 20장 6절 말씀 묵상


14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

1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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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도벳과 성전의 긴밀성)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목이 곧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마음이 완고한 이들이었기에, 예레미야는 현장에서의 실증을 통해서, 그리고 또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반복하여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성전은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의 마지막 보루로서, 이곳은 안전할 것이라는 일말의 생각마져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재앙 선포를 통하여 무너진다.


성전에서의 경고는 최후의 보루까지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은, 아담과 이스라엘 백성의 유형적 관계에서 볼 때, 성전으로서의 에덴의 종말이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생명 나무의 길이 막혔음에 대하느선언이며, 오직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인간은 구원의 길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종말은 아담의 후손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의 경직성과 하나님을 거부하는 완고함의 실상을 보여줌으로서, 인간에게는 더 이상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도벳과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현장에서의 증언을 통한 경고하는 심판은, 유다 백성들에게 도벳의 현장을 통하여, 이들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실증적 예증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인류 모두에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패하고 잘못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의미가 있다.


도벳을 통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유다가 멸망당하는 것의 정당한 이유를 보여주셨듯이, 역사적 이스라엘의 목이 곧은 인간의 죄성을 보여주심으로서, 마찬가지의 죄성을 가진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도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심으로서, 이러한 류의 일들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적 실증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것이다.


도벳은 유다 백성들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도벳은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욕을 먹는 현장이 될 수도 있다.


도벳은 부모의 욕심을 위해서 자녀들이 사교육의 현장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도벳은 온갖 음란물이 판치는 인터넷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도벳은 사람이 정당하게 경제 활동을 하는 한 가운데서도 있을 수가 있다.


도벳은 심지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교회 공동체 한 가운데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은 모두 다 유다 백성들과 같은 죄성을 가지고있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끊임없이 사랑해야할 이들을 희생시키면서,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행동을 하게 되어있다.



(1-2, 바스훌의 박해)


예레미야의 도벳과 성전 뜰에서의 말씀 선포는 분명 성전의 총감독인 바스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을 것이다.


자신이 총감독을 하고있는 성전에서 이제껏 없던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스훌은 성전의 책임자였기에, 어떠한 형태로든 반응을 했어야했는데, 결국 대중의 편에 서서 예레미야를 박해한 것이다,


성전의 총감독으로서의 제사장 정도되면, 도벳에서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텐데도, 오히려 바른 말을 하는 예레미야를 핍박을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운 것이었다.


바스훌의 이와같은 잘못된 행동은  예루살렘 성전의 전반적 상황이 얼마나 부패되고 변질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직자가 세상과 타협하게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이들은 이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있다.


성직자는 삶의 고달품과 어려움으로 인해서 수동적으로 세상과 타협할 수도 있고, 많은 명예와 권력과 부로 인해서 적극적으로 죄에 참여 할 수도 있다,


성직자라 할지라도 인간은 어느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를 짓기 이전에 죄성을 가지고 있다.


성직은 많은 권력과 명예를 제공해주기에 인간에게는 가장 위험한 곳이다.


성직자는 자신의 권력과 명예, 그리고 부에 대한 도전이 올 때, 선택의 갈림길에 설 수 밖에 없다.


성전 총감독으로서의 바스훌과 같이, 자신의 권력과 명예와 부가 클수록 선택이 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일들은 단지 성직자의 부패만이 원인이 아니었다.


요나의 외침을 들은 니느웨의 경우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3일만의 외침으로도 도시 전체가 회개를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상이 가득했던 니느웨성도 회개를 하였는데 유다와 예루살렘의 하나님에 대한 거부는 상식을 넘어선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과 연관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속성이 있다.


아담은 타락하고서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피하려고했다.


가인은 범죄하고나서 에녹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과 관계없이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바벨탑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독립 선언이었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하나님의 간섭에 대하여 철저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사람들의 세상적인 결속 매체인 혈연, 학연, 지연은 하나님을 배제한 육적인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선지자는 이러한 관계성으로 인해서 고향에서 환영받을 수가 없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 사람으로부터 예언을 하지말라고 협박을 받았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이방인이었지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일원이었기에 더욱 거부를 하였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같은 제사장 계통의 바스훌에게서 핍박을 받는다.


교회가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선포될 수 없다.


교회에서의 선후배 관계나, 세습에 의한 친인척과의 관계등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는데 방해가 되며, 심한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


지역 교회에서 온전하게 말씀을 선포했던 부교역자는, 그 다음날 바로 교회 사택에서 쫓겨나야만 했으며, 결국 열악한 환경에서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 해야 했던 경우를 두 눈으로 보기도 했다.


성직자나 신학자가 혈연 학연 지연을 넘어선다는 것은 밥줄하고도 연관되기에, 이를 넘어서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성직자가,  복잡한 인간 관계성으로 인해서, 자신을 스스로 속이면서까지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한다.


어느 보수 교단의 경우에는, 재판은 돈 많은 쪽이 이긴다는 것이 정설이 되어있다.


이러한 상황들은 바스훌이, 대중의 편에서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잘못된 결정을 하는 모습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교회들이 예루살렘 성전 못지않게 얼마나 부패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들이다.


후배 신학자가 선배 신학자의 생각에 반하여 소신있게 말을 한다면, 그는 당연히 사회에서 매몰 될 것이다.


참된 신학자가 되려면, 이러한 핍박을 각오하면서까지, 자신의 소신을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라는 조그마한 나라의 특성상 많은 지역 교회들이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조그마한 나라에서 신학자들이 서로를 뻔히 알기에,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도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있다.


이러한 특성은 이 시대 한국교회의 급속한 쇠퇴의 원인이 되고 있지만, 바스훌과 같이 세상과 타협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3,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름  마골밋사빗)


바스홀의 이름은 부흥과 확장의 개념이 들어있는 “증가하고있는 방백" 혹은 “세력을 확장시키는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부패한 유다였지만 나름대로 희망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박해한 후에 마골밋사빗 즉 “두려움이 모든 것을 둘러싸서 도망 칠 수가 없게 된다"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이름은 지어주는 것은, 지어주는 사람의 주권과 지배권이 행사되는 것이다.


바스훌의 이름이 바뀐 것은 하나님의 뜻이 바뀌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은 동물들에 대한 아담의 왕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뜻을 행하고자 종종 이름을 바꾸어 주시기도한다.


아브라함, 사라, 이스라엘, 바울등등…


이는 하나님의 주체가 되심을 선포하는 주권적 의미도 있다.


바스훌에서 마골밋사빗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앞으로 당하게 될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4, 정죄에서 용서로)


예레미야는 바스훌 앞에서 다시 한번 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이 인간 관계를 넘어서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예레미야가 모든 인간 관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더욱 힘을 실어주신다.


처음에는 핍박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불신하기도 했으며, 자신의 고통을 하소연하기도했지만, 예레미야의 성숙된 모습에서 점진적으로 담대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도는 처음부터 세상에 대해서 담대해 질 수는 없다.


누구나 다 처음에는 세상의 핍박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세상에 대해서 담대하게 말씀을 선포하는 과정을 밟아 간다면, 하나님과의 동행 과정에서 더욱 더 큰 그릇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세상의 핍박보다도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에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 할 수 있었다.


신자는 모두다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직책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에 대해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실제적 과정을 밟아가야할 것이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 백성들에 대한 재앙의 저주와 같이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용서를 통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교회공동체는 이스라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곳이지만, 정죄에 대한 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종결되었기에, 정죄를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않된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의 죄는 정죄의 대상이었지만, 교회 공동체에서 드러나는 죄는 용서와 화해의 대상이다.


인간은 누구나 아담의 후손이기에 죄가 드러나지 않을 수는 없다.


교회 공동체는 드러난 죄를 정죄하기보다는 용서하고 화해하는 가운데 이 땅에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을 구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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