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1. 29. 23:12

사도행전 12장 1-17절 말씀 묵상

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야고보의 순교)

야고보는 형제 요한과 함께, 주의 우편에 앉고 싶은 욕심에서, 그리스도께서 마시는 잔과 그리스도께서 받으실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었다.

야고보는 자신이 말한대로 일찍, 그것도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순교를 당했다.

야고보는 그 잔의 의미를 잘 모르고 한 대답이었지만, 말한대로 된 것이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대로 된 것이다.

물론 야고보의 순교는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워주는 역할을 하였지만, 성도는 특히나 말하는데 있어서 조심해야한다.

잘 알지도 못하거나, 아니면 자존감에서 서원이나 장담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격체로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하는 인격체라는 것을 생각하여야한다.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형상 안에 담겨진 인격이 회복된 존재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인격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한다.



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헤롯의 박해는 인기를 얻기 위한 얄팍한 행동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성전을 확장한 것도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지 결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서 베드로를 가두었지만, 헤롯의 악한 행동 뒤에는 유대인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이 유대인들에게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대중의 인기를 얻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카이퍼와는 달리, 자크 엘룰은 그리스도인이 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직업으로 정치를 말한다.

이는 아마도 정치하는 이들의  부패성도 문제이겠지만, 이들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하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정치를 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이권에 따라 움직일 수 밖에 없지만 교회는 세상과는 구별되어야한다.

만약에 목회자가 교회의 확장을 위해서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한다면, 더 이상의 참된 목회는 불가능할 것이며, 확장된 교회는 온갖 이권이 작용되는 세력들의 규합에 의해서, 규합된 세력의 힘을 바탕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신학교나 교단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에서는 외롭고 힘든 길이지만, 그리스도의 평안이 함께 하는 가운데 베드로가 감옥에서 누렸던 평안을 맛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4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인간의 완벽한 방어도 넘어서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본다.

인간이 아무리 완벽하게 준비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헛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제공되는 최첨단 기술도 결코 인간을 완벽하게 보호해주지는 못한다.

헤롯과 유대인이 베드로를 결박하려는 것이나,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배제하려는 것이나, 본질에 있어서는 같을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 인간이 스스로 독립하려는 인간 문명은, 아무리 발전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붕괴될 수 밖에 없다.

현대 사회의 고도의 발전된 기술과 뛰어난 과학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가 점점 더 많은 문제와 재난에 노출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스스로 완벽해지려고 하는 것은 마치 헤롯이 베드로를 결박하려는 것과 같이 허사가 될것이다.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적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지만 이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행동의 모든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하늘의 신비를 종종 경험하는 사도시대의 이적들은 성경이 정립된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교리로 체계화되어야만 하지만, 정경이 갖추어져있지 않았던 사도시대에는 교리가 정립 될 수가 없었기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간섭하심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정경을 통해서 교리가 정립된 이후에 경험하는 기적들은 종종 여러가지 혼란을 가져다 주기도한다.

한 가지 예로, 예전에 중국의 가정교회 지도자였던 윈형제의 간증집 “하늘에 속한 사람”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몇겹이나 잠겨져있던 감옥에서 아무 간섭과 방해 없이 걸어나올 수 있었다.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가 한국에 와서 강의했던 내용 가운데에는 교리적인 체계를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경험과 개인적 확신이 교리를 대체하고있었으며, 그 결과물이 백투예루살렘이었다.

이는 언약신학과 대립되는 세대주의적 구도 가운데서 나온 것이다.

그가 과연 걸어서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면 그 이후의 계속적인 활동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일종의 탈옥수로서 우리나라에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집단들, 다윗의 장막이나 신사도 운동, 24시 기도의 집등의 집회에서의 강의들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자신이 경험한 신비한 일들을 전하는 것이었으며, 그 가운데서 교리적 접근 방식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미 정경이 갖추어져있는 이 시대에 신앙의 기반을 신비에 두는 것은, 나침반이 없이 직감에 의해 항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11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너무나도 여유있게 변한 베드로의 모습은 제정신이 아닌지, 아니면 너무나도 평안한 모습이 성령 충만함에서 나온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지만, 분명 이전의 모습과는 차이가 많았다.

상황의 긴박감 가운데에서도 베드로의 진지하지 못한 모습이 너무나도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옥에 갇힌 첫날 밤은 여러가지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인해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을 위해서 밤새 기도하는 무리들의 긴장감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이는 마치 시편 기자가 기록한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 127:2)”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단순한 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인한 잠이다.

베드로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하고도 비교될 수 없는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할 수 있었기에 평안을 누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식은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능력이 될 수 없기에, 베드로가 누리는 평안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성경 말씀은 어느 누구나 읽고서 자신에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한낱 능력없는 교훈에 그칠 수 밖에 없다.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이 성도들 가운데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 가운데 한 가지이다.

구약시대에는 개인적인 기도는 있었지만, 무리가 모여서 공동체적으로 하는 기도는 없었다.

공동체적 기도를 통해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이 이 땅위에 구현되고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일그러진 타락한 사회에서는 외침이나 요구가 무시되거나 거절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성도의 기도는 성도 가운데 회복된 하나님의 인격적 형상의 표현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무시하거나 거절하시지는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대부분의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지 않거나 자신의 육신의 욕심에 의한 것이다.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  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위기에서 경험하는 초자연적인 역사는 위기 가운데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된다.

평온한 시대에는 육신의 평안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견디기 힘든 무력감에 사로 잡히기도하지만,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긴장감 가운데서는 오히려 생의 활력을 경험하게된다.

수십년 전의 이야기지만, 스위스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였으면서도 높은 자살율과 마약 중독이 큰 문제였다.

중립국이라는 위치로 인하여 많은 국제회의가 열렸었고, 비자금의 도피처가 되었으며, 풍부한 관광자원으로 국민들은 풍요 가운데 살았지만 이러한 풍요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무료해진 사람들은 모험을 즐기거나 마약을 하거나 아니면 우울증등으로 삶을 마감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이 풍요로 말미암아 왜곡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성장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성이 왜곡되게 나타난다.

이는 교회의 부패와 변질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인간 사회나 교회나 긴장감은 꼭 필요하다.

긴장감과 위기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긴장감과 어려움이 없이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어렵다.

초대 교회의 성장의 이면에는 박해라는 부정적 상황이 큰 역할을 하였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또 긴장감들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통로가 될 때, 우리를 감싸는 부정적 상황은 긍정적 상황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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