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9장 8-20절 말씀 묵상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의 지상 사역 가운데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신 것이다.(행 1:3)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이 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시작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신 의를 근거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 참여되기 위한 조건이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하고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관점에서 말하듯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이라는 케제만이 제창한 “하나님의 의”를 근거로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아볼로나 에베소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요한의 세례만으로는 이 땅에 온전하게 임할 수가 없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성령에 의하여 전파되는 나라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 세례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사건은 자신의 유대주의적 사고에 대한 전환을 가져왔으며, 이는 바울이 회심 전에 생각하였던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에서 새언약을 근거로하는 하나님 나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은 윤리나 도덕적 접근 방식이 아니었다.
성령 세례를 받고 변한 이들의 삶의 방식은 공동체적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을 지닌 것이었다.
이는 사람의 도에 의한 윤리나 도덕적인 나라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행위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바울이 요한의 세례만 알던 에베소에서 성령 세례를 행하고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한 것은 성령 세례와 하나님 나라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가 말하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다르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형일뿐 실체는 아니다.
새관점에서는 신약을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보고있지만,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와 병행 관계가 아니라 전환을 통한 대립 관계에 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유대주의적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공로를 기초로하는 인본주의적이며, 공로주의적인 나라이기에, 은혜를 근거로하는 새언약에서의 하나님 나라와는 대립관계에 있다.
톰 라이트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중심이 되어 예수의 혁명적 행동을 따르는 이들로 구성된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새관점에서의 하나님 나라에는 그리스도의 의도 필요로하지 않으며, 성령 세례도 필요로하지 않는다.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성도는 떠남의 지혜가 필요하다.
부딪히고 비방하는 이들과 변론하는 것은 아무 열매가 없을 수가 있다.
부딪힘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원론적이 될 수도 있다.
최근에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창조론자들과 유신론적 진화론자들과의 논쟁에 끼어드는 것은 무의미하다.
창세기 1-3장은 창조과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체인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모형으로서의 첫째 아담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되어져야함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논쟁으로 성경의 본질을 훼손시키고있다.
(이에 관해서는 John Fesko의 “last things first”에 잘 설명되어 있으며, 이를 요약한 여기를 참조하면된다.)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두 해 동안의 바울 사역은 이방인 지역이 복음화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만약에 바울이 오늘날 이 시대에 살아서 설교를 하였다면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우선 바울은 신학학위도 없는 자격이 미달된 자이다.
신학과정도 밟지 않은 바울이 두 해 동안 강의를 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책들을 참조하여야했을텐데 여행을 자주하는 바울이 과연 얼마나 많은 책들을 소지하고 다녔을까?
반면에 신학자들이 많은 학문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기 힘든 것은 성령의 도우심보다는 주로 자신의 지식에 의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이 시대가 은혜 안에 거하기 어려운 시대임을 말해준다.
신학이 고도화된 이 시대에는 많은 경우 철학이나 역사적 예수 탐구와 같은 역사비평이나, 혹은 도덕과 윤리로 예수를 증거하려고 하지만 단지 무능력함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쇠퇴를 가져오기도 한다.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복음 전파의 긴박성 만큼이나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용하시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지금 시대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엄청난 부작용이 생겼을 것이다.
지금 시대는 성경이 바울을 대체하고있기에 오직 성경을 통해서 성숙된 자녀로서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을 것이다.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어디나 가짜가 있게 마련이다.
유독 기독교에 이단이 많은 것은 역으로 기독교만이 참 진리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귀신같이 안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이미 많은 이들의 경험을 통해서 나온 것이다.
성도는 귀신같이 아는 귀신에게 틈을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이길 수가 없다.
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오직 주 예수만이 귀신의 권세를 이길 수 있기에 성도는 세상을 이긴 자에 속한다.
에베소는 바울이 오기 전에 요한의 세례만 알던 곳이었고, 우상 숭배의 악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바울의 3년 가까운 사역 동안에 많은 변화의 축복을 경험 할 수 있었던 곳이다.
이는 오직 성령의 열매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발전 속도는 세계에서 금메달 감이지만, 교회의 확장과 쇠퇴 또한 세계 금메달 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교만을 질책하셨듯이, 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것에 대하여 반드시 회개할 필요가 있다.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에베소 사람들은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된 사람으로서의 행동을 하였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앞에서 세상적인 가치는 무의미한 것이다.
인간이 쌓는 많은 재력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참된 축복은 인간의 욕심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되는 것이다.
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주의 말씀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다.
세상에 함몰되어가고있음을 보여주는 교회의 부패는 복음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사용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대대적 점검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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