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18. 2. 21. 22:51

사도행전 20장 28-38절 말씀 묵상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교회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피로 사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하여 있는 교회로서, 성령이 감독자를 임명하여 양 떼를 맡기신 것이다.

목회자는 교회를 보살피는 감독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임받아 잠시 관리하는 사람일 뿐이다.

감독자는 양 떼를 위하여, 혹은 양 떼를 위하여 근신하면서 자신을 관리할 의무가 있다.

일반 성도들은 목회자의 양이 아니라 주님께서 피값으로 사신 주의 양들이다.

목회자는 잠시 주의 양을 맡아 관리하는 위임받은 자일 뿐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목자가 되신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인 작품이며,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이 나타나야한다.

하지만 현재의 교회는 정체성을 상실해가고있으며, 바울이 염려하였던 사나운 이리가 활개를 치는 광야가 되어가고있다.

자유주의 신학의 출현은 교회의 속성 마져도 변질시켜가고있다.

교회는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이 아니다.

톰 라이트는 신약의 교회를 유대 이스라엘의 확장이라고 주장하지만, 유대 이스라엘은 주께서 피값으로 사시지 않으셨다.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주님께서 피값으로 이 땅에 세우신 나라이다.

톰 라이트는 유대 이스라엘을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실체로 보고있으며, 교회를 확장된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지만 이는 개혁주의에서 보는 입장과는 전혀 다른 주장이다.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사나운 이리)

이리들은 자신의 먹잇감을 찾아다닌다.

참 목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이리가 가만히 들어온다.

양은 이리의 좋은 먹잇감이다.

양은 전혀 방어할 능력이 없다.

오직 목자만이 양을 지킬 수 있기에 양을 지키라고 위임받은 감독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감독자가 이리라면 양에게는 치명적이다.

하지만 이리가 양의 탈을 쓰면 양은 이리를 분별하기가 쉽지않다.

이러한 경우가 오늘날에는 너무 많아서 진짜 이리가 참된 감독자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리의 특징은 양들을 참 목자되신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집중시켜 자기를 따르게한다.

교회에서도 파당을 조성하여 자기를 따르는 자들 중심으로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쫓아내기도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목회자이지만 실상은 이단 교주와 별 다른 바가 없다.

이러한 못된 짓은 목회 성공을 위해서 훈련 코스로 각광받기도한다.

목회자가 두 날개 훈련을 받고나면, 성도를 자신에게 집중시키면서, 바울이 경고한 바와같이,자기를 따르게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한다.

바울이 경고한 이단성을 가진 사나운 이리를 양육시키는 과정이 교단 안에 아무 문제 없듯이 광고까지 하고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제는 일반 성도가 깨어서 분별하지 못하면 이리에게 먹히기 십상이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이 어떠한 사도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이다.

누가 성도를 위해서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할 수 있겠는가?

사랑과 눈물이 없는 훈계는 성도들의 마음을 난도질 하여 상처를 주기에 십상이다.

대제사장도 거룩한 지성소에 들어갈 때 끈을 매고 들어갔는데, 하나님께서 피값으로 사신 하나님의 성도들을 아무 두려움도 없이 너무 쉽게 볶아댄다.

바울의 말로 훈계하면서 바울의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있다.

목회자들 사이에서 성도를 볶는 노하우는 자랑스럽게 공유되는 것이 현실이다.

가슴 아프고 통회해야만 할 일이다.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삼년의 목회는 아데미의 위상을 흔들 정도였지만, 오늘의 많은 감독자들은 성추문부터 시작하여 온갖 불미스러운 일들의 총집합을 이루면서 사회의 걱정이 되고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상황의 심각함에도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자족하면서 목회를 하였다)

바울은 어디에서도 십일조를 언급하지 않았다.

목회를 소득과 연계시킬 때 진실된 목회를 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이는 전임 목회자 제도가 가지는 많은 장점을 깍아먹는 치명적 약점이다.

소독의 영역과 목회의 영역이 중첩되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개신교가 로마카톨릭의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약점이다.


(약한 자를 돕는 것)

바울은 자족할 수 있었기에 약한 자를 돌 볼 수 있었다.

일단 연보는 자신의 영역의 확장하기보다는 연약한 이들을 돕는 용도로 사용되어야한다.

바울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 따로 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온전하게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전년 할 수 있었다.


(헌금을 강조할 수 밖에 없는 교회 구조)

전임 사역과 건물 중심의 교회 구조는 많은 고정 비용이 소요될 수 밖에 없다.

외적 형태를 가진 교회 구조는, 병원이나 학교처럼, 세상적인 경영 원리를 따를 수 밖에 없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외적인 성전 만큼이나 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소유가 허락되지 않는 레위인을 위해서 십일조등 많은 비율의 헌금이 필요하였다.

교회 구조가 성던의 구조를 갖게되면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이 십일조등 많은 헌금을 요구하게되어있다.

이러한 형태는 중세의 로마카톨릭도 마찬가지였다.

종교개혁은 초대교회를 본받아서 중세 로마 카톨릭의 외형을 벗어버리는 열매를 맺어야하는데 현재의 개신교의 모습은 구약의 이스라엘, 혹은 중세 로마카톨릭의 외형을 따라가고있다.

여기에는 구조적으로 많은 비용이 요구되기에 참된 교회는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바울 서신서 어디에도 외적인 구조로서의 교회 건물을 요구하는 내용이 없다.

외적 구조를 최소화했던 바울의 지혜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단)

교단 차원에서 십일조를 교인의 의무로 규정하는 것은, 신약 성경에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외적인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되고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다.

십일조가 성도의 자격은 아니다.

성도와 교인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는 성도와 교인을 구분하는 수단이 되고있다.

교인이 되기 위해서 십일조를 교인의 의무 사항으로 규정한다면, 성도의 개념과 교인의 개념에 대한 차이는 더욱 확연해지게된다.

교인과 성도를 구분하는 것으로서 성경적은 아니다.

십일조에 대하여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사신 교회에서,  사나운 이리와 같이 어그러진 말을 하는 것으로서 교회의 본질을 손상시키고 성도를 교회 바깥으로 내어 쫓는 행위이다.

이는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면서 교회 중심적이었던 로마카톨릭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바울 서신 어디에도 직접 십일조에 대한 말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며, 바울은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자족하면서 약한자를 돕는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한다.

교회는 정작 십일조는 강조하면서도, 교회 예산의 대부분을 교회 운영비로 사용하면서 약한 자를 돕는데는 인색하기만하다.

교단이 십일조를 강제한다면, 차라리 교회 예산의 십일조를 바깥으로 돌리지 않는 교회는 교단에서 제명하여야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함께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

인간은 서로 사랑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사랑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할 대상이 없는 사람이다.

지옥이 불행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며, 천국이 행복한 이유는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3년간의 목회는 이별의 고통을 감당해야만하는 함께함의 행복이 있었다.

혼자 사는 자는 주를 위해서 살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더라도 자기를 위해서 혼자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자녀가 주는 축복 가운데 한 가지는 자녀가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혈육에서 가질 수 있는 사랑은 인간이 죄인임에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다는 증거다.

성도는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자들이다.

사랑을 통한 공동체의 회복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성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성도들은 다른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미움을 조장하는 파벌이나, 집단이기주의는 다시 회복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일그러뜨리는 행위이기에, 특히 교회 공동체에서 금해야할 사항들이다.

복있는 자는 서로 미워하지 않으며, 파당을 짓지 않으며, 고소하지 않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posted by Wonh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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