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6장 1-9절 말씀 묵상
1 이는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고 명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니
가나안에서의 요구 조건은 사실상 이스라엘에게는 실행할 능력이 없었기에,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떤 조직이든 간에 정관이나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게 마련이다.
가나안이라는 곳은 오직 하나님 만의 다스림을 받는 곳이기에, 하나님의 말씀만이 삶의 규범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의 속성에 적합한 조건과 방법들을 제시하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보기에 좋으신 하나님이 꼭 좋으신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의 패역은 뻔할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풍요의 땅인 가나안은 이스라엘을 부패시키기에 적합하였기에, 하나님의 엄격한 명령이 없었다면, 축복이 저주로 바뀌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제시하신 명령과 규례와 법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이상적인 가나안이 실현되기 위한 조건들이다.
이상적인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법을 지켜야지만 존속이 가능했다.
이러한 점에서 가나안은 에덴에 비교된다.
아담은 에덴에서 법을 지켜야지만 존속이 가능했다.
이스라엘과 아담은 범죄함으로 인해서 쫓겨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으로 참이스라엘이 되셨으며, 둘째 아담이 되셨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연합된 성도는 참이스라엘인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며, 더 이상의 율법의 요구가 없는 안식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2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이러한 조건 제시는, 나중에 생기는 문제의 원인이 이를 이행하지 않는 이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제시되는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가나안에서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
자신과 아들과 손자들에게 자신이 규례와 명령을 지키는 모습이 이어진다면, 가나안에서의 시간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역으로,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이 되지 않는다면 가나안에서의 삶은 더 이상 존속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삶은, 조건이 충족되는 동안 한시적인 것이다.
가나안은 한시적 기간이 충족되면 영원한 종말론적 안식이 이어지는 에덴과는 다른 곳이다.
에덴은 타락 이전의 아담에게 주어진 곳이었지만, 가나안은 이미 타락하여 능력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곳이기에, 이스라엘의 부패성을 증명해주는 곳일 뿐이다.
가나안의 역할은,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처에 이르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드러내는 환경은 모두에게 가나안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좀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삶에 있어서 대부분의 문제가되는 환경의 일차적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
인간의 가장 큰 딜레마는, 부정적 환경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은 축복의 최우선 순위이다.
이는 아담에게 명령하셨고, 노아에게도 명령하셨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약속하셨다.
번성한다는 것은 땅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가나안에서의 번성은 에덴에서의 번성을 상기시킨다는 의미에서, 모세 언약이 아담 언약의 재연republication이라는 속성을 가지고있음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스라엘에게는 번성을 행위 언약에서의 명령으로 제시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은혜 언약으로 제시되었다.
현재의 번성된 결과는 유대적 이스라엘의 번성이 아니라, 참이스라엘인 교회의 성도들의 번성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은혜 언약의 성취로서의 번성은, 톰 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유대적 이스라엘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라, 신약의 교회의 성도들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지 못하여 소멸되어갈 수 밖에 없었지만, 참 이스라엘되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의 번성을 볼 수 있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인간의 존재 자체가 신을 섬기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은 본능이다.
인간은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신적 존재와 함께 하려는 공동체적 본능이 있다.
신을 섬기는 것은 공동체적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담의 반역은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다른 신을 선택하여, 다른 신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인간이 섬기는 다른 신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신들의 공통점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만드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인이 추구하는 첨단 과학은 신의 역할을 하기까지 이르게 된다.
앞으로는 첨단 기술이 인간을 상대해주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뿐만이 아니라, 다른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되기를 거부하면서, 혼자만의 공동체를 만들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대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할 가나안의 이스라엘과는 다른 세계로 갈 수 밖에 없고, 그 종국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어가심으로 파멸에 이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러한 최선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가나안에서의 생활은 최선의 노력이 없이는 결코 저절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고무줄을 최대한 당기고있는 것과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야한다.
최선을 다하는 것은, 긴장 상태의 지속이다.
하지만 긴장이 지속된다면,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
고무줄도 힘을 빼면 줄어들듯이, 긴장을 하지 않게되면, 인간의 마음과 뜻과 힘은 하나님께 향할 수가 없다.
긴장과 안식은 대조를 이룬다.
안식은 긴장과 당김의 시간이 아니다.
죄인에게 가나안은 긴장과 안식이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진 곳이기에, 의인에게만 적합한 곳이다.
이러한 부조화는 인간의 타락에 의한 본성의 변화에서 온 것이다.
바리세인들의 문제는, 이러한 긴장을 지속시킴으로서 자신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있지만, 이들의 본성은 긴장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거짓된 부패한 모습반 드러낼 뿐이다.
참된 안식은 인간의 본성의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영원한 가나안 땅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에서 회복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평안한 상태가 될 것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위적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모두를 대표한다.
현대인들도 부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기에, 본능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정도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지만, 현대인들은 이러한 시도조차 하려고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이들이,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조건에서 얼마나 멀어져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신자들에게도 마참가지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구원을 얻어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데까지 이르러야하는 것이다.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시에 마음에 새겨져있었던 것이 타락과 더불어 손상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아담의 타락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알 수 있다.
인간이 마음 다짐을 하여서 마음에 새기는 것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으로 마음에 새겨넣는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죄인은 마음으로 원하여도 육신의 약함으로 인하여 죄에서 자유할 수가 없다.
인간은 인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에 새겨넣지만, 인간에게는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마음에 새겨넣고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이지만,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이러한 부지런함은 가장 선하면서도, 가장 악이 될 수도 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이러한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은 이러한 삶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는데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은 이렇게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은,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 공을 그리스도께 넘기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아직도 스스로의 힘으로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열정은 본 받을 만하지만, 복음은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열심은, 자신들이 아담의 범죄와는 관계없음을 증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악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만들려는 이들 가운데,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인한 타락한 죄인이라는 것을 외면하는 이들은, 오히려 자신의 의를 내세우며, 그리스도의 의를 대신하려는 악한 이들이 될 수도 있음을 조심해야할 것이다.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외적인 방식은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다.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인간은 외적인 행동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내적인 문제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새관점에서는 율법이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행동 방식이라고 규정하고있지만, 이러한 기준이 적용된다면, 과연 누가 은혜 안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내적인 변화가 없이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한시적일 뿐이다.
에덴에서의 아담과 달리 이미 내적으로 부패해 있는 아담의 후손으로서의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한시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내적인 변화가 없는 외적인 규제는, 부모가 자녀에게 잔소리하는 것이나, 학교에서의 윤리 교육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교회에서의 설교는 외적인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보다는 내적인 변화를 위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통로가 되어야한다.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주변 환경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인지 할 수 있도록 해야하지만,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있다면 이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종종 시내 도로 한 복판에 표어들을 붙이곤하였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기에 요즘에는 볼 수가 없다.
내적인 변화가 없이는 표어를 붙인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독교의 진리는 내적인 변화를 수반한 이들에게는 생명의 말씀이며, 내적인 변화가 없는 이들에게는 심판의 기준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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